괴짜와 쿨,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에서 찾아낸 긱 시크라는 신대륙.

  

우리는 종종 패션을 이분화한다. 럭셔리와 길거리, 또 하이패션과 매스패션이라는 불가침의 등급표를 붙이며.그러나 트렌드의 생멸에 관한 한 이 둘은 결코 가분의 관계가 아니다. 트렌드를 낳는 건 하이패션의 일이지만, 거기에 숨을 불어넣고 양생하는 건 명백히 리얼 웨이의 몫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거대한 하우스가 설계하고스타들이 칭송-일부는 계약관계에 의해-하더라도 거리에서 좇고, 말하고, 재생산하지 않으면 옷은 그저 옷인 채로 사장되기 마련이다. 지난 몇 시즌간 패션계가 만들어내려 한 무수한 흐름이 허무하게 사라진 이유 역시 이런 시스템에 기인한다. 하우스가 미끄러질 듯 우아한 아틀리에에서 공들여 창조한 무언가가 현실 세계에서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예술 작품을 방불케 하는 드레스는 종종걸음으로 걷는 현대인이 입기에는 너무나 거창했고, 표현의 자유를 표방하며 탄생한 섹슈얼 스타일은 무채색의 사무실로 출근하는 사회인의 일과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서 훌륭한 합의점을 찾아 우리삶에 유연하게 자리 잡은 이름이 있으니, 바로 긱 시크다.

  

사실 긱 시크 트렌드는 언뜻 보면 특별할 게 없다. 새로운 소재나 기술을 반영하지도, 세상에 없던 신선한 아이디어에 기반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이는 리얼 웨이에서 바라는 오랜 열망의 집합체임을 알 수 있다. 긱 시크의 흐름을 타고 새롭게 조명된 안경을 예로 들어 보자. 발명 이래로 안경은 매력적인 여성, 더 신랄히 말하자면 ‘메일 게이즈에서 매력적으로 보일 의무를 가진 여성’의 옷차림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숱한 장점을 지녔음에도 외면당해왔다. 불과 수년 전 한 여성 앵커가 안경을 쓴 채 뉴스를 진행해 도마 위에 오른 사건이 이런 인식을 뒷받침한다. 안경은 그렇게 미운털이 박힌 채, 오랜 시간 침대 옆 협탁에서 주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려왔다. 그러다 긱 시크 시대의 도래와 함께 ‘액세서리’라는 작위를 부여받았을 때, 수억의 안경 인구와 함께 렌즈를 반짝이며 환호했으리라.

  

  

그뿐 아니라 긱 시크는 ‘괴짜’라는 뉘앙스 아래 거의 모든 걸 허용한다. 늘어진 애착 티셔츠, 촌스러운 청바지, 애매한 길이의 발목 양말, 하다못해 모범생의 전유물로 간주되던 폴로셔츠까지. 속된 말로 ‘구리다’고 평가받으며 옷장에 갇혔던 것들이 이제 일제히 면죄부를 받았다. 그 결과 거리로 나온 저마다의 긱 시크 룩은 정해진 틀 없이 각양각색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엿볼 수 있다. 고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신상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헤아릴 수 없는 이유로 숨겨온 은밀한 취향을 내세울 자유, 나아가 인정받지 않아도 될 자유로 치환되는 열망을. 몇 년 만에 탄생한 메가트렌드가 반가운 나머지 도처에서 긱 시크를 분석하고 정립한다. 물론 이론적 측면에서 기록해야 할 단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미우미우나 슈슈통 같은 선구적 브랜드들, 벨라 하디드나 빌리 아일리시로 대표되는 긱 시크 스타일의 선두 주자들이 여기에 포함될 터다.

  

  

그러나 타이트한 셔츠를 반드시 입어야 한다거나, 어떤 색과 길이의 양말을 신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몇몇 규율에는 감히 반대 의견을 표하고 싶다. 긱 시크는 트렌드의 얼굴을 한 현상이다. 적어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입지 못할 게 없다는, 실용과 효용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이다. 이 글을 통해 패션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는 송구하지만, 긱 시크의 본질은 그런 데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긱 시크라는 단어의 굽어살핌 아래 무엇이든 자유롭게 입어보길. 세상 어디에도 룰에 얽매이는 괴짜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