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비감을 간직한,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나지 않는 사진을 좋아해요.”
무수히 명멸하는 패션 사진 속에서 독보적 작품 세계로 사랑받는 포토그래퍼, 파올로 로베르시(Paolo Roversi).
올해 7월 14일까지 파리 의상 장식 박물관(Palais Galliera)에서 열리는 그의 특별한 작품과 전시, 그리고 마리끌레르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잊지 못할 에피소드에 대하여.
“내 카메라와 함께 나는 사랑,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다. 다른 단어는 없다. 카메라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마리끌레르와의첫번째작업이당신에게매우큰의미가있다고들었다. 1977 년에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기뻐서 뛰었다”고? 맞다.(웃음) 내가 최초로 작업한 패션 매거진이 바로 <마리끌레르>였다. 당시는 전설적인 편집장 클로드 브루에(Claude Brouet)가 <마리끌레르>를 이끌던 시절이었는데, 정확히 20×25 폴라로이드로 만든 대형 시리즈를 들고 편집실에 찾아갔었다. 모두가 폴라로이드를 낯설어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우려와 달리 일반 컬러 인쇄가 가능했고, 내 폴라로이드 사진이 패션 매거진에 최초로 실리는 역사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 다시는 필름을 사용하지 않았나? 나는 폴라로이드만 고집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당시 사진가들은 필름으로 촬영하기 전에 조명, 구도, 설정 등을 확인하기 위해 폴라로이드로 테스트를 거쳤다. 매거진이 내 폴라로이드 사진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폴라로이드는 은판사진이나 오토크롬처럼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나는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대형 폴라로이드를 촬영했다. 컬러로 시작해 점차 흑백으로 바꿔갔고, 결국 둘 다 해냈다.
폴라로이드는 2008년에 생산을 중단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작업을 조정했는가? 디지털화는 당신의 작업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나는 디지털 사진 역시 긴 시간 노출을 설정해 작업한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이라고 불리는 매우 간단하지만 오래된 사진 기법을 선호하는데, 이 기법을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패션 사진에 처음 적용했다. 나에게 사진은 검은 페이지 위에 일종의 빛으로 글을 쓰는 행위다. 음악과 그림은 흰 종이에 쓰이고 그려지지만, 사진은 검은 페이지에 빛으로 표시된다. 카메라 내부는 검은색이고 암실 역시 이름처럼 어둡다. 빛은 어둠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검은색은 사진에서 필수적이다.
당신의 사진에는 차별화된 무언가가 있다. 사진은 나에게 여전히 향수를 부르는 예술이다. 과거는 흘러가고 사라지지만 사진을 통해 현재화된다. 이 점이 나를 깊이 매료시켰다. 우리 앞에 누군가가 사진으로 있지만 실재하지 않을 때, 이는 때론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모호함이 참 좋다.
이번 전시에서 당신이 아홉 살 때 처음 찍은, 드레스를 입은 여동생의 사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 당신이 사진작가가 되고 이것이 당신의 삶이 될 것을 알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당시 나에게는 사진이 일종의 게임이었고 마술 같은 것이었다. 한 번도 ‘나는 사진가가 될 거야!’ 하고 다짐한 적이 없다. 이 일은 우연히, 조금씩, 연속적으로 일어났고, 지금은 매우 만족하지만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이다. 시간을 멈추고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마법 같다.”
“퇴색과 불규칙적 효과가 있는 폴라로이드. 나는 이것이 아름답고 시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당대 패션 피플이 거쳐간 파리 14구에 있는 당신의 작업실인 스튜디오 루체(Studio Luce)에있다. 이 장소에 대해 소개해주기 바란다. 내 스튜디오를 작업의 주제로 삼은 적이 있다. 실제로 <스튜디오>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그만큼 이곳은 나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나는 일상의 도구, 내 작업에 끊임없이 도움이 되는 사물, 장소가 주인공이 되고 사진의 주제가 되기를 원했다. 소녀, 소년 또는 옷을 묘사하는 것처럼 이곳의 카메라, 램프, 배경, 작은 의자까지 모두 촬영하고 싶었다. 그만큼 애정이 깊다.
당신은 여성을 매우 존중하고 동일한 모델과 연속적인 촬영을 즐기는 것 같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당신의 오랜 친구일 것 같은데 어떤가? 내가 모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마치 ‘사진 같은 우정’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발전적이고 서로를 신뢰하는 특별한 우정. 하지만 이 관계는 지속적인 갱신이 필요하다. 일을 더 쉽게, 그리고 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모델은 무엇보다도 존재 그 자체가 깊은 감동을 준다. 나는 그들의 신비를 찾고 그것을 사진에 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고 베일의 한쪽만 들어올릴 뿐이다. 전체가 아닌 일부가 신비롭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당신은 동시대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들과 작업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어떤 인상을 받았나? 레이 카와쿠보는 일본과 서양의 문화가 혼재된 매력적인 인물이며 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처럼 상반되는 동시에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한 그와 그가 표현하는 패션 세계에 매우 큰 흥미를 느꼈다. 레이 카와쿠보도 내가 촬영하는 방식을 항상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한 교류를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운좋게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특정 분위기와 작품 세계를 함께 만들 수 있었다. 내 스튜디오에서 아제딘 알라이아가 모델에게 옷을 입히고, 존 갈리아노가 스타일링을 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이러한 경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고 특별하다.
당신의 사진에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펠릭스 나다르(Fe′ lix Nadar)와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 사실, 모든 위대한 초상화가들이
라고 말하고 싶다.
현대 패션 사진에 대한 당신의 의견도 궁금하다. 동시대 사진가들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솔직히 말해 나는 위대한 거장의 작품을 더 많이 찾아서 보는 편이지만, 이들 못지않게 자극을 주는 젊은 사진작가들도 존재한다. 다만 내가 싫어하는 것, 나를 몹시 괴롭히는 것은 현재 무수히 존재하는 의미 없는 이미지들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이유 없이, 사랑 없이, 기쁨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들…. 이러한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한 경험들이 당신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나? 나는 황제가 잠든 웅장한 석관과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의 모자이크가 있는 라벤나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화려한 비잔틴 성벽에 분필로 골대를 그린 후 축구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내 잠재의식 속에서 내 작업물의 디테일을 결정짓기도 한다.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나의 미학과 상상력에 분명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비감을 간직한 채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나지 않는 사진을 좋아한다. 어떤 미스터리, 일종의 비밀을 간직한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