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소녀였던 우리 앞에 펼쳐진, 이토록 사랑스러운 패션 노스탤지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아이였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All grown -ups were once children. But only few of them remember it).” 그의 말처럼 우리는 대체로 한때 아이였음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삶의 예기치 못한 순간, 불현듯 우리를 그 시절로 데려가는 것들이 있다. 하굣길에 맡았던 떡볶이 냄새, 해 지는 줄 모르고 몰려다니는 동네 꼬마 무리, 문구점 앞 작은 뽑기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 따위의 아주 사소한 것들 말이다.
젠체하기로 유명한 패션 월드에도 이따금 타임 터너 같은 작용을 하는 트렌드가 등장한다. 이번 시즌 정점을 찍은 걸 코어(girlcore)가 대표적이다. 걸 코어는 큰 맥락에서 보자면 코게트 코어나 발레 코어, 페어리 코어와 공통된 코드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풍기는 기묘하거나 섹슈얼한 뉘앙스가 완전히 배제된 점에서 결을 달리한다. 또 최근 대두한 키드 코어와도 키치한 캐릭터 프린트나 선명한 색감 대신 아플리케 기법, 리본 디테일, 프릴 장식, 플로럴 모티프 등 부드러운 요소를 더한 부분에서 큰 차이를 드러낸다. 이렇듯 제법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걸 코어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공주 드레스를 연상시키며 현대인의 불안한 현실 가운데 더 어리고, 더 순수했던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특별함으로 패션계 안팎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시절 판타지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브랜드는 샌디 리앙이다. 디자이너 샌디 리앙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관념을 브랜드 전반에 투영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걸 코어를 정의 내린 인물로, 지난 시즌 메가히트를 기록한 발레 코어 트렌드를 선도한데 이어 새 시즌 아기 보닛 같은 모자로 완성도 높은 걸 코어를 이룩했다(그가 시즌을 준비하며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인테리어 브랜드 콜드피크닉 창립자의 딸 프레야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촬영한‐한 장은 전 세계 패션 인사이더 사이에서 크게 회자되며 걸 코어 트렌드에 불을 지폈다). 시몬 로샤 식 걸 코어도 인상적이다. 그는 데뷔 이래로 고딕적 무드를 가장 많이 덜어낸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특히 모델들이 품에 안고 나온 커다란 인형 모양의 백은 유년기의 애착 인형을 상기시키며 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둡지 않게 끌어가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이 밖에도 Z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수잔 팡은 마치 인형
옷 시리즈 같은 미감과 놀이터라는 장소를 통해 주제를 전달했으며, 세실리에 반센과 슈슈통은 아플리케나 깃털처럼 쿠튀르적 소재를 도입한 드레스를 출시하며 트렌드 대열에 합류했다.
한편 걸 코어의 인기가 생각보다 널리 영향을 미침에 따라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는 추세다. ‘소녀스러운(girly)’이라는 단어가 오래 지녀온 스테레오타입을 답습하고 재생산하는데다 다소 유아 퇴행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일각에서는 ‘패션은 패션일 뿐’이라는 항변을 내놓을 테지만, 사회학적 관점‐그간 패션계가 여성주의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가치에 판매와 명분을 의탁한 대가로 얻은 일종의 필수 검열 항목인‐에 비추면 무시할 수 없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패션이 이미 성적 대상화나 문화 찬탈을 비롯한 여러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트렌드를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시킨 경우를 심심찮게 목도해왔다. 걸 코어에 대한 선호야 사람 나름이겠지만 때로 지나치게 정제된 탓에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패션계에, 그리고 삭막한 어른들의 일상에 동심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점만은 유의미하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패션계가 여러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학습한 것처럼 비판의 지점을 잘 수용하고 수정해 더 건전한 판타지를 선사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부디 그렇게 되어 이따금 거울을 보며 우리 안의 소녀와 소년을 소환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걸 코어가 너무나 소중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