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탐험하는 용기와
여전히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

어제와 내일이 아닌,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배우 김태리의 나날들.

드라마 <정년이> 촬영이 끝난 지 보름하고도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그사이 조금 쉬었나요? 저는 더 많이 쉬어야 해요.(웃음) 10월에 방영하기 때문에 아직 쉬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나도 ‘자유! 해방!’은 아닌가 봅니다. 촬영이 끝났다는 게 크게 실감 나지는 않아요. 조금 심심한 날이 있긴 한데,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작품이 종영해야 쉼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후반 작업이나 홍보 등 작품과 관련한 일정이 많이 남아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정년이>는 배우로서는 허들이 꽤 많은 작품이더라고요. 창만 하기도 어려운데 무용도 배우고, 사투리도 써야 하니까요. 1950 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인 데다 내용상 국극단 내에서 올리는 공연도 바뀌잖아요. 등장인물도 많아 호흡을 맞춰야 할 상대 배우 수도 상당하던데요. 이 허들을 배우가 모르고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요. 모르고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 알고 들어간 것도 아니에요. 이미 예상한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는가 하면 ‘와, 이런 것까지?’ 싶은 것도 많았어요. 대단한 작품인 것 같아요.

펜싱(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든 것만 골라내느냐고요?(웃음)

네. 직전엔 귀신에 씌이기(드라마 <악귀>)까지 했잖아요.(웃음) ‘나 편안한 거 할 거야’ 한다고 편안한 작품이 오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일에는 때에 맞는 타이밍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정년이>를 하고 싶었고, 이렇게 끝까지 오게 됐어요. 그 안에 있으면 응당 해야 하는 일이고, 또 하다 보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최대치로 해내고 싶잖아요.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그래서 저는 그냥 합니다. 이야기하신 대로 해야 할 것이 많은 작품이다 보니 생각보다 불안이 좀 있었어요. 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소리 수업을 시작했지만, 혼자 준비하던 때를 지나 촬영 일정이 잡힌 이후부터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다고 느꼈거든요. 무용, 사투리 등 할 게 많았어요. 긴장도 많이 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수업을 잡고, 연습하고 집중해 준비했어요.

우리가 작년 한 해 틈틈이 만났잖아요. 당시 소리 수업을 받고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목포에 사투리를 배우러 가기도 했다고요? 어학연수.(웃음) 엄마로 등장하는 문소리 배우님, 언니 역할인 배우님과 함께 시장에 가서 어머니들 이야기도 곁에서 들어보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만히 앉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기도 했어요. 노인정에 찾아갔다가 내일 오라고 퇴짜 맞고.(웃음) 왜 원래 어학이라는 것이 귀가 뚫려야 입이 트이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리스닝부터 차근차근. 재미있었어요.

배우라는 일이 어떤 경로도, 방향도 없잖아요. 그 과정에서 김태리 배우는 씩씩하게 종횡무진하며 낯선 곳으로 자신을 보내는, 탐험하는 사람 같습니다. 경계 너머로 가보는 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던가요? 작품 선택에 관한 질문인 것 같아 다른 대답일 수 있지만, 제 탐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저는 어떤 작품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1차 목표예요. 한데 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전제는 ‘나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거든요. 이를 위해서는 내 밸런스를 찾는 게 중요해요. 그 밸런스가 곧 경계를 찾는 일인 것 같고요. 일적으로든, 관계에서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에서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얼마인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상태를 찾는 탐험인 거죠. 이는 작품의 목표나 연기적 목표와 다른, 제 개인적인 목표예요. 그래서 작품마다 다른 목표 지점을 설정하면서 움직여왔어요. 그러다 보면 딱 맞는 균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요. 이렇게 하면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구나 혹은 이렇게 되면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이번에는 이쪽으로 완전 집중해볼 거야 하는 식으로 작품마다 경계를 달리하며 움직여왔어요. 그러니 이 탐험도 계속되는 거죠.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싶으니까.

임계점에 깃발 꽂기 같은 탐험이네요. 맞아요! 여기에 꽂았으니 다음에는 저쪽으로 다섯 발자국 더 가볼까? 혹은 내가 아직 여기에 적응이 덜 됐나? 그럼 이번에는 여기에 최선을 다해볼까? 아주 그냥 내 몸을 여기에 묻어볼까?(웃음) 하며 다음 작품의 목표를 설정하는 거죠. 추상적인 이야기 같기도 한데, 저는 이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해나가요.

나라는 재원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를 계속 실험해보는 거잖아요. 자기 실험을. 그렇죠. 가장 건강한 상태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예전에는 ‘저기까지 간다. 건강하지 않아도 돼. 어쩔 티비! 몸이 썩어도 상관없어. 혼이라도 간다’ 하며 갔었는데 그럼 제대로 완주할 수가 없을 뿐더러, 주변 사람들도 챙길 수 없게 돼요.

거듭되는 경험에서 자기 운용 요령도 생기겠습니다. 결국 이 과정은 욕심을 분별하게 되는 일 같아요. ‘여기는 내가 안전하지 못한 곳이구나’, ‘이것까지는 욕심이었구나’ 하고 느끼기도 하거든요. 내가 쟁취해야 할 욕심인지 아니면 버려야 하는 욕심인지,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하는 욕심인지를 구별하는 탐험인 거죠. 예전에는 끝간 데 없이 욕심을 부렸는데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뭐, 요즘은 그렇습니다. 언젠가 마음이 또 바뀔 수도 있겠죠.

‘정년이’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잖아요. 극 전체로 본다면 한 인간의 진실된 성장담이기도 하고요. 김태리 배우 역시 변화하고 있다는 감각이 중요한 사람인 걸까요? 변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삶을 꾸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작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서 내가 하는 선택이 전부 나를 발견하는 일이고, 알아가는 일이고, 다듬어가는 일인 것 같아요. 변화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지 않을까요.

혹자는 잠깐 멈춰도 돼, 안주해도 돼 하고 이야기하기도 하잖아요. 멈추고 쉬어가는 것에도 변화는 있다고 생각해요. 쉼은 중요한 일이고, 무엇보다 본인이 쉬어야 할 때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 멈춤의 과정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과정이 변화의 과정인 거죠.

그런 느낌 받을 때는 없나요? ‘지금 이대로 너무 좋다’ 하는. 있죠. 있죠. 하지만 그 또한 짧은 순간인 것 같아요. 아, 더할 나위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하고 느끼는 순간이 당연히 있지만, 다 지나가잖아요. 예전에는 그런 순간이 지나가는 게 아쉽고 슬펐어요. 한데 이제는 자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기게 되는 것 같아요. 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이를 내가 계획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최대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 의지대로, 마음대로 다 되는 일은 없다는 것.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의지대로 결괏값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죠. 진보를 위한 변화가 퇴보가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진 않나요? 결과에 대한 기대는 경계해야 하는 일이자, 동시에 요행을 바라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내가 선택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경우가 세상에 너무나 많잖아요. 그럴 때는 그저 순간순간 잘 지나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오지 마 한다고 안 오는 게 아니니 그저 맞이하는 수밖에 없죠. 맞이하고, 다시 잘 일어나야죠.

눈물, 콧물 쓱 닦고 일어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나요? 버티는 거죠. 삶을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하잖아요.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고 싶어지고요. 그러면 다시 일어나야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크게 돌아보지 않아요. 결판이 난 사안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거쳐요. 이 일에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정리하고,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을 파악한 이후부터는 그 명제만 갖고 다음 일에 임하죠. 다시 사건을 돌아보고 곱씹으며 그 안에 나를 가두지 않는 거죠.

웹툰을 보는 동안 정년이와 배우 김태리가 겹쳐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특히 <춘향전> 무대를 마친 후 “시방 내가 뭘 헌 거여”라는 대사가 있죠. 처음으로 나조차 알지 못하던 나를 마주하고, 자신을 뛰어넘음으로써 세계가 바뀌는 경험을 한 순간을 기억하나요? 몇 년 전, 기자님과 인터뷰한 어떤 시기인데요. 제게는 늘 뿌옇던, 늘 어렵고 모르겠던 세상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고리가 쫙 짜맞춰지는, 서사의 조각이 전부 들어 맞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세계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데 힘들고 슬픈 순간이 지나가듯 그렇게 시야가 맑아지는 시기도 지나가거든요. 그렇지만 그 시기를 겪음으로써 제가 얻은 것이 있어요. 그걸 경험할 수 있어 너무 좋았어 요. 그때 제가 얻은 가장 가치 있는 게 있어요. ‘나의 최선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예요. 사방이 맑던 시기는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그 깨달음은 여전하고 그 사실에 아주 당당하고요.

그때를 지금 돌이켜보면 새로이 보이는 것이 있나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내가 주변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게 보여요. 그래서 더 조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만나니까 참 좋네요. 위인전의 매 챕터를 주기마다 멀리에서 읽고 있는 느낌이.(웃음) 범인(凡人)전.(웃음)

배우라는 일은 자주 낯선 사람이 되는 일이죠. 인물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를 반추하게 되고, 그 경험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들 텐데요. 오늘의 김태리는 어떤 사람인 것 같습니까? 캐릭터를 통해 나 자신을 깨닫기보다는 그 작품에 임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 혹은 어떤 상황과 싸우고 부딪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저 자신을 많이 보고 만나는 것 같아요.

질문을 바꿀까요. 그 과정에서 김태리는 어떤 파이터인가요?(웃음) 저는요.(웃음) 이기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요. 솔직한 사람이고 그리고 목소리가 큽니다. 책임감도 강하고요. 친구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요. 그리고 무척 예민하면서 한없이 무던한 사람입니다. 내일이나 어제보다는 오늘을 사는 사람 같아요. 2024년 7월의 태리입니다.

좋아요. 마무리할까요. 2024년 7월의 김태리를 즐겁게 하는 건 뭔가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요? 요즘 비가 와서 좋아요. 바람도 선선히 불고, 적당히 시원한 기온도 좋습니다. 집에서 고양이들 배를 만지면서 (시간을 보내요). 그리고 요새 꽂힌게 있어요. 로봇 청소기를 아무 생각 없이 하염없이 바라봐요. 걔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아이가 막 멍청한 짓도 하잖아요? “멍청한 놈” 하고 혼잣말도 하고, “으이그, 똑바로 해야지!” 하고 크게 혼도 내요. 음, 계획은 딱히 없습니다. 계획이 있다면 ‘계획 없는 앞으로’를 잘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