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즈의 2025 F/W 컬렉션 퍼포먼스

올해의 젊은 공예인 이윤정의 합작품

2025 S/S 컬렉션 퍼포먼스

레포시의 블라스트 하이 주얼리 컬렉션
우리는 종종 하나의 이름을 통해 전체를 마주하려 한다. 프런트맨, 프로타고니스트, 솔리스트처럼 어떠한 대상을 대표하는 이름들 말이다. 패션 하우스의 프런트맨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불리는 헤드 디자이너다. 오늘날 이들의 명망은 너무도 대단해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브랜드의 운명마저 좌우할 정도다. 소비자들이 제각각 신뢰하는 디자이너의 행보에 따라 ‘사랑할’ 브랜드를 결정하게 된 이래로 팬덤의 크기가 곧 경쟁력이라는 암묵적 룰까지 생겼으니, 하나의 이름이 더 이상 단순한 ‘이름’이 아닌 셈이다. 물론 이들은 각자가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온전히 대변하고, 또 스포트라이트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진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공동체가 그렇듯, 그 이면을 지탱하는 무수한 존재까지 인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대상을 또렷이 바라보고, 그들의 예술 세계에 진정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패션계에도 반드시 캐내어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다. 수공예와 전통 기술을 수호하는 아르티장, 곧 장인들이다. 오래전부터 유수의 패션 하우스는 대량 생산되는 공산품의 낮은 품질과 가격에 대항하고, 진정한 의미의 럭셔리로서 살아가기 위해 장인 정신을 브랜드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구석구석 녹아든 정성, 탁월한 품질, 무엇보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끝에서 태어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라는 고유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높은 금액을 지불하고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여러 가치가 장인이라는 단어 안에 질서 정연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굳이 패션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계라는 토양에 뿌리내린 채 숨 쉬며 때로는 미학의 나무를 키워내고, 때로는 문화의 꽃을 피워냈다. 공치사도, 요란한 찬사도 없이.
그러나 이번 시즌만큼은 예외다. 패션계 안팎의 목소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장인에게 바치는 헌사를 쏟아낸 것. 빈번한 패션계의 지각변동 탓에 그간 당연하게 밟고 서 있던 오래된 지층이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고도 반갑고, 익숙하면서도 귀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흐름을 이끌어낸 주역은 토즈다. 토즈는 수공예의 미학을 논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브랜드로,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11명의 베네치아 장인과 고미노 모카신을 재해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데 이어 올해 5월에는 제품 홍보 없이 오로지 이탈리아 장인들의 삶과 초상을 다루는 책을 출간했다. 그뿐만 아니라 2025 S/S와 2025 F/W 밀라노 패션위크에서는 ‘장인들의 지식(Artisanal Intelligence)’이라는 공통된 테마 아래 거대한 장인의 손 조형물을 세우거나 장인의 시연 장면을 중계하고, 이탈리아 태생의 모델이자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 카를라 브루니에게 재생 가죽 조각으로 만든 설치형 드레스를 입혀 등장시킴으로써 모든 제품 뒤에 숙련된 두 손과 뛰어난 인간의 경험이 존재하며, 어떤 것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영감의 원천 그 자체로서 장인을 강조하는 움직임도 두드러졌다. 샤넬은 ‘만드는 손을 기린다(Celebrating the Hands That Mak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02년부터 메티에 다르 (Métiers d’Art) 컬렉션을 선보일 정도로 오랜 시간 장인 정신을 예찬해왔다. 이는 샤넬 산하의 공방 또는 파트너십을 맺은 장인 공방의 기술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며, 장인의 작품을 주연으로 조명하는 유의미한 무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샤넬은 세계 각국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는 코코 샤넬의 철학을 토대로 지난 2022년 한국 공예 후원 사업을 이끄는 비영리 재단인 ‘재단법인 예올’과 손을 잡았으며,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올해의 장인에 지호(한지와 풀을 배합해 종이죽을 만들고, 틀을 여러 겹 덧붙여 만드는 전통 공예) 장 박갑순을, 올해의 젊은 공예인에는 금속공예가 이윤정을 선정하며 2025년에도 진심 어린 행보를 이었다. 이와 맞물려 LVMH 그룹에 속한 주얼리 메종 레포시 역시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마사이족, 먀오족,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장인이 만드는 전통 장신구에서 모티프를 얻은 ‘블라스트 하이 주얼리 컬렉션’을 공개했다. 수작업 공정에만 250시간이 소요되는 블라스트 롱 네크리스를 포함한 모든 아트 피스는 메종 아르티장들의 손길로 완성되며, 문화 전유나 문화 전치 현상이 화두인 시점에 모티프의 기원을 명확히 표기하고, 메종 장인의 공을 빌려 그들의 역사에 경의를 표한 점에서도 모범적 선례로 평가된다. 비슷한 사례로 프라다는 컬렉션에 내놓은 신발 디자인이 인도 전통 샌들인 콜라푸리 차팔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고, 현지 장인들과 협업해 인도 문화에 헌정하는 컬렉션 제작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기류는 패션계 밖에서도 이어졌다. 장인 문화와 전통 공예를 깊이 탐구하는 전시, <실의 기억: 팔레스타인의 자수(Thread Memory: Embroidery from Palestine)>가 개막한 것.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이 스코틀랜드 던디에 새로 개관한 디자인 박물관 V&A 던디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팔레스타인의 전통 손 자수 기법인 타트리즈(tatreez)를 계승하는 여성들을 다루며,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삶의 터전을 앗아간 나크바(Nakba) 이후 타트리즈가 비폭력 저항의 수단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사람과 예술을 동시에 비춘다.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은 평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예술 작품에 관한 기획전을 선보이는 곳으로, 이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인들의 예술 세계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어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2001년부터 무려 17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보테가 베네타를 이끈 토마스 마이어는 말했다. “가방 하나를 든다는 건, 곧 장인들의 삶을 이루는 시간을 드는 것과 같다”고. (“When you hold a bag, you hold the hours of a craftsman’s life.”) 이렇듯 우리가 걸작이라 부르며 열광하는 드레스 한 올, 신발과 가방의 스티치 한 땀 뒤에는 길게는 평생을 바쳐 하나의 자수에, 무두질에, 금속세공에 헌신한 장인의 시간이 숨어 있다. 감각적 디자인이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면, 장인의 노고는 세월이 가도 물건의 가치를 지키는 방식으로 빛나고, 장인의 정신은 패션에 끝없이 영향을 주며 역사로부터 새로운 창의성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장인정신’이라는 입에 익은 단어를 다시 곱씹어본다. ‘정신’, 이토록 무거운 표현에는 시대가 잃어버린 집념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장인을 찬미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