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직접 개발한 한지사를 사용한 작품 ‘MOVEMENT, 2025’을 바라보고 있는 ‘포목’ 배영진 대표.
포목더텍스타일아카이브 대표 배영진.


본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패션업계에서 일한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 15년은 ‘꼬세르 배영진’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한복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달렸고, 한복 디자이너로 시작해 드라마 <궁>의 의상 제작 총괄을 맡기도 했죠. 이후 15년 넘게 소재 연구에 몰두하며 ‘포목’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한복을 디자인하면서 텍스타일 작업으로 영역을 넓힌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옷을 만드는 일에서 원단 자체를 연구하는 일로 시선이 넓어진 특별한 순간이 있었나요? 옛것을 그대로 이어가는 일은 결국 재현에 머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섬유 개발로 시선이 넓어졌습니다.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소재의 차별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느낀 거죠. 소재에서 색, 질감, 구조 모두 중요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촉감으로 다가오는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요.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이야말로 소재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텍스타일에 깊이 빠졌습니다.

모 글로벌 패션 하우스에서도 포목의 원단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2008년에 한 글로벌 패션 하우스에서 한국의 천연 염색과 손누비 작업을 의뢰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당시 천연 염색과 손누비는 제 전문이었죠. 그들이 원하는 작업을 빠른 시간 안에 완벽하게 마무리해 전달했고, 이후 그 브랜드에서 조금 더 난도 높은 수작업을 맡겼습니다. 그렇게 손으로 만드는 핸드 트위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한국 사람 특유의 완성도 높은 수작업과 빠른 속도가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안되는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어떤 작업이든 해냈고, 그런 긍정적인 태도가 결국 신뢰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타일 사업을 시작한 이후 3만 개가 넘는 샘플을 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다양한 원단을 만들었습니다. 손수직 트위드, 손누비 원단, 실크 자카드, 그리고 지금의 한지 원단 멀벡스까지요. 특히 손으로 만드는 원단은 변수가 많기 때문에 늘 어려움이 따릅니다. 돌이켜보면 원단 하나하나 모두 사연이 있어요(웃음). 그때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각고의 노력을 했습니다. 다행히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모든 원단을 완성했습니다.

3만 개 이상의 원단 제작 가이드가 담긴 샘플 스톡북.

해외 글로벌 패션 하우스나 국내 브랜드에서 포목에서 제작한 원단에 대해 남긴 기억에 남는 평이나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글로벌 브랜드는 보통 1년에 한두 번 현지 감사를 진행합니다. 한 번은 감사업체에서 오신 분이 세계 여러 원단업체를 다녀봤지만 한국에 이 정도로 퀄리티 높은 원단을 만드는 브랜드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놀라워했죠. 또 해외 바이어들은 저희의 정교한 마감과 작업 속도에 늘 놀라고 감탄합니다. 국내 브랜드 디렉터나 디자이너들은 저희 아카이브를 보고 한국 섬유 산업의 발전을 위해 포목의 아카이브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보셨을 때, 좋은 원단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결국 중요한 것은 완성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완성도를 위해 어떤 부분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미세한 실의 굵기, 질감, 색감 등을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합니다. 이런 작은 차이가 모여 결국 완벽한 퀄리티를 만듭니다.

브랜드에서 디자인이나 컨셉트를 전달하면 그것을 실제 원단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아이디어를 직조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컨셉트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그것을 표현하는 세심함입니다. 컨셉트는 하나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원단을 만들때는 오감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기준은 분명합니다. 아름답거나 멋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어가 원하는 원단의 느낌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현해내느냐, 그 차이가 바로 전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수많은 텍스타일을 산업적으로 생산하는 시대입니다. 그 속에서 ‘핸드 위빙(hand weaving)’이라는 방식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저희도 물론 기계 직조가 중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업적으로 사용할 원단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꾸준히 이어가는 작업 중 하나가 바로 핸드 위빙입니다. 이 작업은 어떤 면에서 원초적 감각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실 하나하나가 엮이며 원단이 되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단에서만 느껴지는 장인정신과 감성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종종 “옷의 절반은 원단이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텍스타일 장인으로서 원단이 패션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시나요? “옷의 절반은 원단이 만든다”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단에 따라 브랜드의 컨셉트와 옷의 가격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원단 자체가 디자인이 되는 브랜드도 많습니다. 옷의 기본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소재는 무궁무진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혼용률, 색감, 터치, 가공 방식 등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텍스타일이 패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면의 벽을 실로 가득 채운 소직기 방에 있는 포목 배영진 대표.

“결국 중요한 것은 완성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완성도를 위해 어떤 부분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미세한 실의 굵기, 질감, 색감 등을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합니다. 이런 작은 차이가 모여
결국 완벽한 퀄리티를 만듭니다.”

포목더텍스타일아카이브 대표 배영진

세검정에 포목의 터를 잡은 이유와 계기는 무엇인가요? 인사동에서 10년, 삼청동에서 10년, 서촌에서 또 10년을 보냈습니다. 20년 가까이 원단을 만들다 보니 우리가 만든 원단을 아카이빙해 디자이너와 브랜드에 공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이 아니라 조금 여유 있는 동네이기를 바랐고, 넓은 공간을 찾다 보니 세검정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포목점은 조선시대부터 다양한 원단을 모아 팔던 상점이었습니다. 저희는 그 개념을 이어 오늘날의 포목점을 만들고자 ‘포목더텍스타일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소재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사옥에 있는 갤러리에서는 오프닝 전시로 한지로 만든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모은 전시인 <한 올, 한 장>을 선보일 예 정입니다. 박서보, 정창섭, 이진우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제 작품 두 점도 보실 수 있어요.

포목 사옥 내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 <한 올, 한 장>. 포목이 이어온 섬유와 예술 사이의 관계를 박서보, 정창섭, 이진우 작가의 작품으로 조망한다. 배영진 대표의 작업 두 점도 볼 수 있다.
<한 올, 한 장> 3월 26일~5월 26일 포목더텍스타일아카이브(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7길 5 1층)

포목에서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소재가 한지 원단이라고 들었습니다. 많은 브랜드가 한지 섬유를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포목은 어떻게 성공했나요? 사실 한지 사는 오래전부터 써왔습니다. 10년도 넘었죠. 제가 한지라는 소재를 좋아하기 때문에 텍스타일에서도 꼭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한지사로 장식사인 팬시 얀을 만들어 트위드 원단을 짜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한지 원단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난여름에 포목으로 공간을 옮기면서부터입니다. 한지사는 우수하지만 까다롭고 가격도 높은 소재입니다. 울보다도 비싸고 리넨이나 헴프, 라미보다도 가격이 훨씬 높지만 그만큼 기능이 뛰어납니다. 닥나무에서 추출한 자연섬유로 통기성과 흡습성이 뛰어나고 매우 가벼운 소재입니다. 이 원사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한 포목만의 한지사를 개발했습니다. 완벽한 원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완벽한 실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연구 개발과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포목의 한지사는 ‘멀벡스(MULBEX)’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과 특허까지 받았습니다. 포목만의 기술로 만든, 세상에 없던 실이기 때문입니다.

한지 원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기술적으로나 감각적으로 가장 큰 도전이 된 순간이 있었다면요. 멀벡스 원단을 만들기 위해 먼저 기존 한지 원단의 한계와 단점을 분석했습니다. 한지 원단은 항균과 흡한 속건 기능이 뛰어나지만 수축률이나 형태 안정성이 낮고, 질감이 다소 뻣뻣한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또 종이 원사의 특성상 쉽게 끊어져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많은 업체가 도전하다가 도중에 포기했습니다. 포목의 멀벡스는 이러한 부분을 모두 개선했습니다. 원단으로서 가장 중요한 형태 안정성을 확보했고, 드라이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을 구현했습니다. 자연 소재 기반에 기능성을 더한 원단, 바로 그것이 멀벡스입니다. 그래서 멀벡스의 슬로건은 ‘내추럴 퍼포먼스(Natural Performance)’입니다.

한지사로 만든 멀벡스 원단으로 완성한 티셔츠와 피케 셔츠. 한지 특유의 흡습성과 가벼운 무게로 뛰어난 착용감을 자랑한다.

오랜 시간 소재와 직조를 연구하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텍스타일을 다루는 선생님의 원단을 바라보는 시선도 궁금합니다. 텍스타일마다 가치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원단은 기능이 중심이 되고, 어떤 원단은 질감이나 디자인이 중심이 됩니다. 각각 성격이 다르죠. 하지만 결국 모든 텍스타일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옷을 눈으로 보고 구매하지만 실제로는 몸으로 입습니다. 소재가 훌륭한 옷은 오래가고, 몸이 좋아하는 옷은 자연스럽게 더 자주 손이 갑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환경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소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국 텍스타일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요즘 한국 섬유 시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K-컬처와 K-패션의 인기에 비해 K-텍스타일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격경쟁에서는 중국에 밀리고, 기술이나 전통에서는 이탈리아와 일본에 밀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장인과 새로운 개발을 시도하는 공장이 남아 있습니다. 젊고 능력 있는 인재들도 노력하고 있고요. 그래서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같은 브랜드가 훌륭한 소재를 계속 개발하고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간다면 한국 섬유도 세계시장에서 분명한 위치를 갖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포목더텍스타일아카이브 한켠에는 원단만을 모아둔 공간이 있다. 30년의 헤리티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소.

앞으로 꼭 만들어보고 싶은 원단이나 소재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현재 개발 중인 멀벡스에 실크를 더해 감각적인 고부가가치 원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또 냉감이나 소취 기능을 더해 스포츠나 애슬레저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소재를 개발해보고 싶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셨고 지금도 계속 도전하며 이뤄가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또 도전한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실까요? 또 포목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언지 궁금합니다. 포목의 디자인 능력과 개발 능력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맞춰 트렌드를 선도하는 소재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처럼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소재 브랜드로 성장해 한국 섬유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습니다. 또 포목에서 개발한 멀벡스를 통해 한국의 섬유 기술을 널리 알리고, 한지 섬유의 메카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