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F/W SAINT LAURENT COLLECTION

파리의 봄밤, 트로카데로 광장에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타났다. 나무와 가죽, 유리로 꾸며진 모던한 주거 공간 너머로 에펠탑이 반짝였고, 무대 중앙에는 이브 생 로랑의 아파트에 놓여 있던 고대 로마 시절 흉상의 대형 복제품이 자리했다. 세계 어디에나 존재할 법한 집이이지만 유리 벽 너머로 에펠탑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곳이 파리임을 각인시킨다. 생 로랑의 본향은 언제나 파리라는 선언일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의 2026 F/W 여성복 컬렉션은 그 집 안에서 시작됐다.

올해는 두가지 이정표가 겹친다. 이브 생 로랑이 여성에게 턱시도를 입힌 르 스모킹 60주년, 그리고 바카렐로가 이 하우스의 수장이 된 지 10년. 그 교차점에서 8벌의 블랙 팬츠수트가 런웨이를 열었다. 싱글과 더블 브레스티드를 오가며 1970~80년대의 절제된 긴장감을 환기하면서도, 최소한의 심지와 깊게 파인 네크라인은 느슨하고 감각적이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핀스트라이프 원단은 전통적으로 단단한 실루엣에 자유로움을 부여했다.

컬렉션의 두 번째 막은 블랙에서 브라운으로 전환됐다. 초콜릿, 러스트, 번트 오렌지, 마호가니가 실리콘 코팅된 시어 레이스와 오버사이즈 퍼 코트 위에 겹쳐졌다. 레이스에 라텍스를 입혀 카디건과 스트레이트 스커트로 재단한 것은 바카렐로 특유의 이중성이다. 연약함은 힘으로, 구조적인 수트는 관능적인 실루엣으로 전환된다. 비둘기 형상의 오버사이즈 골드 이어링, 슬릭한 시뇽, 스모키 아이가 하우스의 관능적 코드를 완성했다.

이 컬렉션은 영화적 서사 위에 놓여 있다. 바카렐로는 로미 슈나이더, 특히 1971년 영화 <막스와 고철장수> 속 부르주아적 우아함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로마의 봄>, 고어 비달의 <도시와 기둥>도 컬렉션의 서사적 뼈대다. 규범을 거부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여성에게 턱시도를 입힌 르 스모킹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피날레에서 모델들이 손에 든 것은 작은 지갑뿐이다. 런웨이에 핸드백을 올리지 않는 원칙은 바카렐로 치하 생 로랑이 고수하는 몇 안 되는 금기다. 10년을 채운 디자이너가 르 스모킹의 60년 위에 자신의 궤적을 겹쳐놓은 이 컬렉션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과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하우스의 언어로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