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의 중심, 파리에서 K-패션은 어떻게 대체 불가능한 종으로 진화 중인가?
“파리는 더 이상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K’라는 수식어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이 제시하는 지속 가능성, 해체주의, 장인정신의 깊이에 주목하고 있다.”
명수진 볼드북 대표・패션 칼럼니스트
파리는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오트 쿠튀르의 문법과 ‘사부아페어(savoir-faire)’, 즉 장인정신이라는 견고한 성벽 안에서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한동안 이 무대에서 K-패션은 그저 신선한 외부 자극에 가까웠다. K-팝의 거대한 파도에 올라탄 행운아들, 혹은 이국적 모티프로 시선을 끄는 변방의 손님들. 그러나 2026년 현재, 우리는 K-패션의 진화를 목격하고 있다. 이제 한국 디자이너들은 대체 불가능한 ‘새로운 종(species)’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 거대한 흐름의 변곡점은 2018년이었다. 피비 파일로의 셀린느 아래서 정교한 테일러링을 흡수한 황록(ROKH)이 한국인 최초로 LVMH 프라이즈 준우승에 해당하는 특별상을 거머쥐며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황록은 2024년 H&M과 협업해 대중적 파급력까지 증명하며, 신예의 전위성이 어떻게 견고한 하우스 비즈니스로 안착하는지 그 생존 교본을 제시했다. 황록이 해체주의적 테일러링으로 K-패션도 럭셔리 하우스의 문법을 완벽히 구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면, 2022년 한국인 최초로 파이널리스트(8인)에 오른 애슐린 박(ASHLYN)은 요지 야마모토의 패턴 커터 출신답게 극도의 입체 재단 테크닉으로 원단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매끄러운 실루엣을 완성해냈다. 동서양의 기법을 접목해 자신만의 미학을 세우고 완벽한 만듦새까지 보여주며 디자인만 그럴듯한 신예들과는 체급이 다른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 밖에도 2021년 세미파이널리스트(20인)로 뽑힌 임동준의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AF)은 구조적 실험과 넘버링 시스템(1.0에서 시작해 현재 7.0까지 발표)을 통해 K-패션의 아방가르드한 매력을 각인했다. 또한 2024년 세미파이널 리스트인 지용킴(JiyongKim)은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일반적 워싱 방식 대신 햇빛에 원단을 노출해 자연스럽게 바래게 만드는 ‘선블리치’ 기법으로 자연의 시간성과 지속 가능성, 그리고 미감을 하나의 언어로 결합해냈다. 물과 화학약품 사용을 최소화하고 데드 스톡을 활용하는 지속 가능한 방식은 하이엔드 럭셔리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태도와 맞닿아 있었다. 이처럼 기존 하우스의 매너리즘을 타격하는 독창성과 동시대성, 미래적 관점을 동시에 제안하는 한국의 신예들에게 LVMH 프라이즈라는 권력의 심장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이들이 LVMH가 발견한 보석이라면, 김인태의 김해김(KIMHĒKIM)과 이혜미의 잉크(EENK), 박소희의 미스 소희(MISS SOHEE)는 스스로 높은 성벽을 뛰어넘은 사례다. 발렌시아가에서 쿠튀르의 정수를 체득한 김인태는 2014년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고 진주, 한복의 선, 그리고 머리카락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미학을 유럽의 장인정신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는 33세이던 2019년에 한국 디자이너 중 최연소의 나이로 파리패션연맹(FHCM)의 전신인 파리의상조합의 정식 회원으로 등록되었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 파리 패션계의 높은 문턱을 넘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김해김은 2019년 공식 캘린더 데뷔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파리 패션위크의 메인 스케줄을 지키고 있으며 최근 2026 F/W 시즌에는 브랜드 설립 10주년을 돌아보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알파벳을 테마로 한 영리한 브랜딩과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이혜미의 잉크는 2026년에 FHCM의 공식 멤버로 등재됐다. 잉크는 파리의 예술적 감성과 실질적 판매 파워를 모두 잡은 K-하이엔드 컨템퍼러리의 가장 성공적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박소희의 미스 소희는 2025년부터 파리 오트 쿠튀르 위크의 공식 게스트 회원으로 초청되어, 한국 전통 민화의 숨결을 하이엔드 쿠튀르의 수작업으로 번역해내고 있다. 박소희는 데뷔 이력도 독특하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CSM) 졸업 당시, 코로나19로 쇼가 취소되자 졸업 작품 ‘만개한 소녀(The Girl in FullBloom)’를 SNS에 올린 후 카디 비, 벨라 하디드 등 글로벌 셀러브리티의 러브콜을 받고 이후 2022년 돌체앤가바나의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의 공식 후원을 받아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데뷔 쇼를 열었다. 김해김, 잉크, 미스 소희처럼 파리 공식 스케줄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이제 샤넬, 루이 비통과 같은 타임라인에서 비즈니스를 겨루는 ‘제도권의 일원’이 되었음을 뜻한다. 우영미(WOOYOUNGMI)와 준지(JUUN.J)가 파리의 척박한 땅에 K-럭셔리의 깃발을 꽂은 1세대 개척자라면, 이제 그 토양 위에서 후배들이 각기 다른 변이적 진
화를 이뤄내고 있는 셈.
이들은 모두 K-패션이 단순히 트렌드를 발 빠르게 잘 따라가는 강점에서 더 나아가 자신만의 고유한 무기를 가지고 헤리티지를 쌓아가는 성숙기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파리는 더 이상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K’라는 수식어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이 제시하는 지속 가능성, 해체주의, 장인정신의 깊이에 주목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변방의 침입자가 아니라, 글로벌 패션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진귀하고 필수적인 ‘종’으로 깊이 각인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