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젠가부터 감정 표현에 면역이 생겼다. 이 예민한 면역반응은 현대사회의 질병에 가깝다. “너무 좋아해서 그래요, 내가. 너무 좋아해서.” 전화기 너머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맙소사!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나를 쫓아오는 기분이다. 막다른 길에 갇힌 로봇 청소기처럼, 이 넓은 집 안에서 하필 가장 좁은 복도 끝을 하염없이 맴돌기 시작했다. 대화란 탁구와 같은 것이라, 이제 공은 나의 코트로 넘어왔다. 대답을 해야 한다. 도대체 이제 어떻게 이 공을 넘기지? 이렇게 간지러운 공은 도대체 어디서 난 걸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철벽같은 태세로 테이블 끝에 유유히 서 있는, 저 미소 띤 공격수에게도 빈틈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값비싼 고등 교육과정이 남겨준 모든 지성을 총동원해 실낱같은 탈출로를 찾는다. 조금 건조한 유머를 섞어야 한다. 가장 재치 있고 담백하고 담담한 뉘앙스로, 가볍고 부드럽게 이 공을 넘겨야 한다. 단지 이 얼얼한 달콤함으로부터, 이 간지러운 상황과 신기루로부터, 잠시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간지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이 몸부림은 매사 의심이 많은 현대인에게 종종 나타나는 면역반응이다. 분명 기분이 아찔하고 좋으면서도, 날카로운 의심이 깨어난다.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누군가 이렇게 금방 나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이 상황은 운 좋은 날씨와 음악이 만나 생성된 판타지일 테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질 수도 있다. 내가 예뻐 보이는 1년 중 몇 번 없는 어떤 날로부터, 내 취향이 주는 약간의 판타지와 어쩌다 웃겼던 우연한 농담으로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날 하필 좋았던 날씨로부터,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씨와 기분은 종잡을 수 없이 변하고, 시간은 언제나 내 반대편에 서 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호도된 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사기꾼이 된 기분이다.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그의 예쁜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이렇게 외치고 싶다. 쉽게 생긴 것은 쉽게 사라진다고 했던가. 나는 이 갑작스러운 로맨스가 금방 사라질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곧 휘발되어버릴지도 모를 이 감정을, 섣불리 소리 내 말해도 괜찮은 걸까?

 

 

“그가 달콤한 표현 쪽으로 그래프를 기울일
때면 나는 본능처럼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진정 우리는 자주 담백하게 먹고,
가끔 아찔하게 달콤하며, 지속적으로 즐거운,
그런 균형을 찾을 순 없는 것일까?”

 

 

나는 유년 시절의 주입식 교육을 탓했다. 지나친 달콤함은 중독성이 있어서결국은 몸에 해로울 것이라고 배웠다. 중독에 빠지면 점점 더 많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어느 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에 빠질 것이라고 배웠다. 달콤한 연애보다 담백한 연애가 더 지속 가능하다고 배웠다. 사실일까? 이 모두가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에 주입된 허구가 아닐까? 어쩌면 달콤하고 귀한 음식은 단지 좋은 것이며, 가능만 하다면 최대한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주입식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착한 학생이었기에, 이 불안에서 쉽게 털고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담백한 맛에 길든 사람이다.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흰쌀밥에서도 기분 좋은 달콤함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이다. 의사는 내게 위험한 탄수화물 중독자라고 경고했다. 그래서 그가 건네는 얼얼할 만큼 달콤한 표현들은 사실 나의 1년 치 섭취량과 비슷했다. 내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는 일이란 마치 완벽한 초콜릿을 거절하는 야만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한 관계에서 감당할 수 있는 달콤함의 양이란 정해져 있어서, 두 사람이 양쪽에서 팽팽하게 겨루며 균형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달콤한 표현 쪽으로 그래프를 기울일 때면 나는 본능처럼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진정 우리는 자주 담백하게 먹고, 가끔 아찔하게 달콤하며, 지속적으로 즐거운, 그런 균형을 찾을 순 없는 것일까?

내 면역반응은 언어적일 뿐 아니라 신체적이었다. 문득 그가 내 손을 잡기라도 하면 깜짝 놀랐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때때로 키스보다 더 친밀한 표현으로 느껴졌다. 내가 손의 감각이 유난히 예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꼼짝없이 결속되어버린 느낌 때문일 것이다. 손을 내어주고 나면 자유에 필연적인 제약이 생긴다. 부끄러운 순간 빠르게 도망가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그 어떤 간지러운 상황에서도 꼼짝없이 마주 서서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어 죽겠죠? 견뎌봐요.” 나는 조용히 손의 자유를 내어준 상태로, 오히려 감정이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나는 여전히 간지러운 문장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행동으로 인해 언어의 답답함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발견했다. 손을 잡고, 끌어안고, 쓰다듬는 모든 표현 속에는 스스로 신체의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누리고 싶은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숨어 있다. 나는 종종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그가 삶에 가져올 풍요로운 달콤함을 단지 적절한 방식으로 요리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가끔은 거뜬히 달콤함을 소화해내는 그의 신진대사가 부러울 때도 있다. 의심 없이 세상의 모든 낭만을, 모든 로맨스를,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그의 무모함과 추진력이 탐난다. 그 신통한 재주는 내가 갖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로 인해 간접적으로 내 것이 된다. 어쩌면 이 즐거움을 오래도록 건강하게 누리고 싶은 열망 앞에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마주 서 있는 느낌이다. 나는 또 한 번 이 경기의 균형을 맞추는 마음으로, 그렇게 반대편 코트로 공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