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 인습, 전통 등 해묵은 관념을 가뿐히 뛰어넘는 초월적 가족의 초상. 세 가족이 말하는 새 가족의 정의.

우주 재킷 Heathen and Miro, 레이어드한 셔츠 Youth, 팬츠 Carnet-archive,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승은 니트 톱 Curetty, 스커트 Millo Women, 레이어드한 톱과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민 니트 톱 Acne Studios, 팬츠 Dickies,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상하지만 별다르지 않은 우리

승은, 우주, 지민

2020년에 승은이 쓴 에세이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를 통해 세 사람이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 사랑) 관계를 맺으며 한집에 거주하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현재 승은과 우주, 승은의 친동생, 강아지 세 마리가 함께 지내며 지민은 근처 오피스텔에 혼자 산다. 서로를 사랑하는 많은 존재 중 하나로 인식하고, ‘비독점’이라는 화두에 공감하며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

승은, 우주, 지민의 가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승은 이 질문을 받는다면 많은 사람이 비슷한 대답을 할 것 같아요.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웃음)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딘가 이상하지만 사실 별다를 게 없는 사이예요.

흔치 않은 형태의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면서 ‘가족’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을 것 같아요.

승은 정말 많이, 계속 논의했어요. 가족을 화두로 삼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 가족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우주 가족이란 단어를 쓰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요. 가족을 다르게 정의할지, 가족 말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어떨지 이야기를 나눴죠.
지민 가족의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하지만, 들을 때마다 갸웃하게 돼요. ‘확장’은 기존의 그릇이 커져서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다는 뜻인데, 가족이란 그릇에 담기고 싶지 않은 관계도 있을 테니까요.
승은 편견을 내포하는 언어를 오염시킬 것인가, 대체할 표현을 만들 것인가. 둘 중 뭐가 맞는진 모르겠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어요.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출간 당시에는 한집에 살았지만, 이젠 지민 씨가 따로 산다고요. 혼자 살게 되니 어떤가요?

지민 (웃음)
승은 되게 좋아 보여요.(웃음)
지민 ‘같이 산다’는 개념이 제게는 좀 모호해요. 집이란 공간을 점유하는 데 거부감이 적거든요. 승은과 우주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뜬금 없이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와도 ‘어, 왔네’ 하는 정도고, 아무도 없을 땐 제가 가서 강아지들 밥이랑 약 챙겨주고. 제 짐이 여전히 그 집에 있기도 해요.
승은 전 20대 때부터 누군가와 동거하지 않은 기간이 거의 없어요.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거실에 소파를 놓는 게 오랜 로망이었죠.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랬을까 싶어요. 요즘 우리가 서로 떨어지길 바라는 상태라…(웃음)
우주 기존 가족의 형태를 깨고 나온 초반엔 ‘우린 다르다’는 데 집중한 듯해요. 그러다 보니 ‘셋이 모여 살아야 한다’, ‘서로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했죠.
지민 새로운 관계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어떠한 틀 안에 있는 상태였던 거죠. 기존 가족의 대안을 만들 게 아니라, 저마다 삶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삶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세 분을 가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세 분은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은가요?

지민 서로 앞에서 기꺼이 약해지는 관계. 나의 약한 모습으로 상대를 마주할 수 있고, 상대도 내게 그러기를 바라게 될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족에 가깝다고 느껴요.
승은 표정만 봐도 ‘배고프구나’ 하고 알 수 있을 만큼, 의성어나 의태어만으로 소통이 가능한 관계. 결혼식이나 혼인신고를 하진 않았지만, 주위에서 우리 관계를 존중하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럴 때마다 관계도 사회적이라는 걸 느껴요. 만약 제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겨진 것들을 기꺼이 넘기고 싶은 존재기도 하고요.
지민 말할 때 쓰는 어휘나 사고 체계도 비슷해졌어요. 제가 이 관계에 많은 뿌리를 두고 있구나 싶어요.
우주 깊게 얽혀 있는 거죠. 그게 서로에게 많은 것을 맡길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니라고 봐요.
승은 징글징글 하기도 해요.(웃음)
지민 전 그렇게 징그럽진 않아요. 오늘 상처받고 가는 날일 수도 있겠어.(웃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느끼는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승은 우리 관계에 대한 글을 쓰고, 우리를 향한 차별에 적극적으로 맞서다 보니 어느새 셋이 한 세트로 묶이더라고요. 그게 좀….
지민 한 명이 의견을 말하면, 나머지 두 명의 의견도 동일하다고 여기는 거죠. 그게 몇 년간 고착되다 보니, 우리 안에서도 ‘제발 따로 생각해줘!’ 하는 마음이 점점 강해진 듯해요.
우주 우리 사이에 틈새를 어느 정도 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타인의 말 중 무엇이 제일 인상 깊었나요?

승은 “어떻게 그리 부지런해요? 한 사람이랑 관계 맺기도 힘든데.” 이 말을 들을 때 면 이렇게 답해왔어요. “만약 이게 부지런한 거라고 느껴진다면, 그동안 부지런히 관계를 맺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요.
지민 이젠 불편하기보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말이 있는데, 아마 다들 기억할 거예요. “너희 언제까지 가나 보자.” 제일 많이 들은 저주죠.(웃음)
우주 실제로 우리 사이가 끝나더라도 관계의 형태 때문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이별의 이유가 단 하나라고 믿겠죠. 일대일 이성애 연애에서도 헤어질 만한 사람들은 헤어지는 건데.
승은 그런데 우리 헤어진 상태 아니야?
지민 이렇게 인식할 수도 있는 거죠.(웃음) 우리 관계도, 관계를 맺는 저 자신도 계속 달라지고 있으니까요.
승은 나조차 나를 잘 모르는데, 서로를 온전히 안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저 모르는 상태로 변해가는 중인 것 같아요. 우리 관계의 또 다른 시절들을 맞이하면서.
지민 예전엔 ‘시절 인연’이 서운한 말이라고 느꼈는데, 그 말이 오히려 해방감을 줄 때가 있어요. 물론 감정적으론 슬플 수 있지만, 변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가족과 관련한 표현 중 전복하고 싶은 것 있다면요?

우주 너무 많다.
승은 “결국 가족밖에 없다.” 여기저기 나오지만, 문제적인 말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이 말 자체가 진실이 아니고요. 가정 폭력이나 불평등을 지우고, 돌봄과 안전망 역할을 가족한테 떠넘기는 사회에 변명거리를 주는 말이기도 해요. 가족의 일은 개인적인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사회제도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지민 최근에 지인이 비슷한 말을 들었대요. “이건 집안 문제야.” 이처럼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공적 개입’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해버리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 나아가 노후 생활마저 가족끼리 알아서 하라는 식이 되어버릴 거예요.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거죠.
우주 전 모성애나 부성애, 효도 같은 단어에 거부감이 들 때가 많아요. 유전적 본성일 수도 있지만, 인간이 그것만으로 사는 생명체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가족을 폐지하라>라는 책에 “화목한 가족은 아주 낮은 확률에 얻어걸린 것” 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동의해요. 그런 가족을 꿈꾸게 하는 드라마들이 인기가 많잖아요. 부모의 사랑과 가정의 온기가 큰 행복을 주지만, 한편으론 부채감도 안긴다는 걸 보여준다고 느꼈어요.
지민 한 가지 더 꼽자면 ‘가족 같은’이란 수식에 괄호를 치고 싶어요. 비워진 괄호 안에 저마다 생각하는 대체어를 마음대로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의 형태가 무수하고 다양해진 만큼, ‘좋은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커지는 것 같아요. 좋은 가족은 무엇을 필요로 한다고 보나요?

우주 개개인이 자율적 결정권을 갖는 것.
지민 저도 자립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해요. 코로나19 시기에 재난지원금이 가구 단위로 나왔는데, 그때 각 구성원에게 가야 할 복지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가정 내 개인이 취약해진 경우들이 있었거든요. 가족 중심으로 발전해온 복지 시스템이 개별적인 대상을 향해 가지를 더 깊게 뻗어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정책적 맥락이 아닌, 철학적 의미의 자립은 달라요. ‘이 세상에 혼자 설 수 있는 존재가 있나?’ 하는 질문을 떠올리면, 답은 ‘없다’인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우린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의존이 타인을 소유하게 만드는 형태가 되어선 안 되겠죠. 잘 의존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승은 한 사람, 한 집단에만 의존하면 위계가 생기거나 착취로 이어질 수 있고, 결국 함께 힘들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관계든 고립되면 위험해요.
우주 요즘 ‘연립’이란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요. ‘여럿이 어울려’ 서는 거죠.
승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연결되어 살잖아요. 혼자 살더라도, 몸이 아플 때 누군가에게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하거나 운전을 부탁하기도 하면서요. 이처럼 관계가 지닌 가능성을 폭넓게 상상하면서 여러 관계망을 열어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 분이 이룬 가족도 열린 관계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지민 셋이 이어져 있고, 저마다 새롭게 맺는 관계도 있어요. 그걸 생각하면, 별들이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우주 우리는 각자 별자리를 이루는 수많은 별 중 하나인 거죠.
승은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면 주변에 있는 무수한 별들도 함께 보여요.
지민 물론 저 멀리 이어진 별은 내가 잘 모를 수도, 친밀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죠. 그럼에도 별자리는 계속 커지고 있어요. 그게 ‘식구’ 하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예요.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 우리의 가훈을 만든다면 어떻게 짓고 싶나요?

승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하고, 서로가 없어도 살 수 있도록 하자. 우리 함께 살고, 따로 살자.
우주 좋은 생각입니다.(웃음)
지민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에 제가 제일 믿는 말이 있는데요. 마무리하면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