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알게 된 제 확실한 취향 중 하나는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주어진 노선을 자꾸 비껴나고, 벗어나 탈주하거나 이탈하는 존재들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거예요.”
김아영 작가가 올려 세우는 세계, 그리고 그 안의 존재들.

2023년 6월, 아트바젤 필름 프로그램에서 김아영 작가를 처음 만났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그의 작품 ‘딜리버리 댄서의 구’를 감상하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 바젤의 빈 4차선 도로 위로 오토바이에 오른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가 굉음을 내며 스쳐지나갈 것만 같은 이상한 마음의 환영이 일었다. 엄청난 속도감과 그에 비례하는 쾌감을 선사하는 ‘딜리버리 댄서’는 AI 배달 플랫폼에 의해 통제되는 가상의 서울, 여성 배달 라이더 에른스트 모(Ernst Mo, ‘Monster’의 철자 재조합)와 그녀의 도플갱어 엔 스톰(En Storm, ‘Monster’의 철자 재조합)의 쫓고 쫓기는 서사를 담은 영상 작업이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2023년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최고 상인 ‘골든 니카’를 받았고,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이 모든 수상에서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오는 11월에는 MoMA PS1에서 뉴욕 첫 대규모 개인전도 열 예정이다. 이견 없는 한국 현대미술의 새 챕터인 그는 엄청난 기세와 성실을 바탕으로 올해만 해도 15여 개의 개인전과 그룹전,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2년 만에 김아영 작가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그의 표현대로 ‘폭발적이고, 폭주하듯 융단폭격을 당한 듯한’ 행운을 맞았지만 그는 여전히 낙원상가, 작은 창문이 난 작업실에서 무수한 밤을 새우는 중이었다. 작업 컴퓨터 옆,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작은 침대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어떤 형식의 작업이든 결국 세상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고 봅니다.
어떤 것은 더 참여적이고 저항적이며 사회적이라고 평가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작업은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이거나 서정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모든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고,
저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반응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작가 및 호주국립영상미술관(ACMI) 제공.

그래픽 시트, 원형 스크린, 27분 43초, 가변 크기, 2024 Ⓒ작가 제공.
어제까지 출품해야 하는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콩 M+ 뮤지엄에서 파사드 커미션을 맡아 작업 중이에요. 10월 첫째 주에 공개할 예정인데, 어제가 1차 데드라인이라 며칠 밤을 새웠어요. 이 커미션은 M+ 뮤지엄과 시드니 파워하우스 미술관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독특한 이니셔티브예요. 두 기관이 함께 커미션을 하고, 이후에는 각각 따로 전시를 열어요. 컬렉션 또한 두 기관이 한 에디션씩 나눠 소장하고요.
그곳에서 ‘딜리버리 댄서’ 연작의 신작이 공개되죠. 110m 너비의 파사드라고 하는데, 어떤 모습일지 가늠조차 안 되는 스케일입니다.
M+ 박물관 외벽 파사드에 선보이는 작업이라 스케일이 커요. 무성(無聲)이고, 해상도가 높은 화면이 아니기 때문에 몇 가지 제약이 좀 있어요. 멀리서 보는 관객들에게 어떤 압도감을 줄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고민에 대한 하나의 해법으로 공간을 하나의 픽셔널한 몰(mall)로 설정했어요. ‘쇼핑몰’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몰’일 수도 있고요. 홍콩이 워낙 수직적으로 압축된 도시잖아요. 그런 아시아적 특징을 지닌 가상의 몰을 세운 거죠. 몰의 중심부는 마치 중세 시대의 아레나 같은 검투장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 안에 ‘딜리버리 댄서’ 연작의 주인공인 에른스트 모(Ernest Mo)가 세 명 등장해요.
곧 공개될 신작에서는 주인공 에른스트 모가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났네요. 등장인물에 비례해 액션도 확장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완전히 액션물이에요. 자기 자신과 싸우며, 질주하며 따돌리고 쫓고, 과격한 액션으로 이어져요. 한참 동안 액션이 이어진 뒤에는 홍콩의 아름다운 거리도 배경으로 펼쳐지고요.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항상 공간을 부유하거나 자유낙하하는 인물이 등장했는데 이번에도 아주 스릴 있는 공중 부양과 자유낙하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특히 1980년대 황금기의 홍콩 액션 영화들, 특히 성룡 액션 장면을 많이 참고 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1990년 대 초반 피터 정(Peter Chung)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온 플럭스(Æon Flux)> 속 액션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번 작업은 유독 ‘처음부터 끝까지 액션으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했어요. 주류 미디어에서는 여성과 여성 사이의 액션이 자주 다뤄지지는 않잖아요. 특히 난폭하거나 과격한 장면은 거의 없고요. 그 이유의 큰 지분 중 하나가 무술 감독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일 거예요. 지금까지 <오징어 게임> 무술팀에도 있었던 여성 무술 감독 김차이 감독님과 작업을 해왔거든요. 이번 신작에도 함께했습니다. 이분 역시 여성 대 여성 액션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저 또한 굉장히 과격하고 폭력적이면서도 섹슈얼한 코드가 버무려진 액션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 컸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요?(웃음)
액션의 기본이라 할, 신체성에 대한 관심의 시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팬데믹이 막 끝나가던 무렵인 2021년 말부터 2022년 초에 이 작업을 시작했어요. 여러모로 복잡하고 절망적인 시기였죠. 픽션에 몰두해 사변 서사를 끊임없이 만들고 마무리할 즈음에 팬데믹이 시작 된 거예요. 코로나 팬데믹이 인간의 물질성과 유약함, 신체에 종속 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여실히 드러냈잖아요. 아무리 제가 사변적 상상력을 멀리 뻗어가도, 결국 인간의 몸은 바이러스 하나에 쉽게 무너지고, 그 작은 충격 앞에 전 세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이 물질성, 신체의 버거운 현실을 외면한 채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처음으로 실사 촬영의 비중을 크게 늘렸어요. 초기작인 <PH 익스프레스>도 실사이긴 했지만 크로마키 합성이 중심이었거든요. 이번에는 배우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 카메라가 배우를 따라가며 움직이는 워크가 많았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허덕이는 몸뚱어리’를 그리고 싶었어요. 시간에 쫓겨 분투하고, 자기 몸을 어쩌지 못하는 여성의 모습. 자꾸만 뒤처지고 어떤 시간에서는 아예 누락되어 버리는 여성의 존재를요. 특히 배달 라이더라는 직업은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여겨져 ‘고스트 워커’라고 불리기도 하거든요. 그중에서도 여성 라이더들은 더욱 드러나지 않죠. 그런데 실제로 여성 배달 라이더도 꽤 많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주로 여성이 행위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 퀴어 로맨스(GL)의 뉘앙스를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복잡하고 분열적인 내면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동시대 여성 관람객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고요. 또 아시아 퓨처리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뿐 아니라 중동, 동남아시아, 태평양의 섬까지 아우르는 넓은 아시아를 배경으로 여성이 주체가 되는 서사를 좋아해요. 이전 작업인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도 예멘 이주자 출신 여성 ‘소하일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든요. 여성 임파워링 서사에는 늘 끌립니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제 확실한 취향 중 하나는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주어진 노선을 자꾸 비껴나고, 벗어나 탈주하거나 이탈하는 존재들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후 2년 뒤 발표한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에는 시간성이 덧붙여졌죠. 시간은 작가에게 주요한 소재이기도 합니다.
M+와 파워하우스 미술관 신작 작업을 하면서는 사라 샤르마의 책 <틈새 시간>을 자주 봤어요. ‘시간 주권’에 대한 연구자의 책인데요. 우리 앞에 놓인 불평등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예요. 저 또한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를테면 10분이라는 시간이 딜리버리 라이더에게는 일각을 다투는 절체절명의 시간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시간이기도 하죠. 다양한 상대적인 시간들이 존재하고, 계급화되어 있다는 것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예요. 회의를 위해 공항으로 가는 비즈니스맨의 시간과 그 시간에 종속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택시 운전사의 시간은 전혀 다른 결을 지니고 있죠. 또 비즈니스 여행자들의 시차를 보정하기 위한 수많은 테크놀로지와 호텔 맞춤형 서비스들이 발달해왔지만 그 역시 노동자들이 시간에 종속되는 구조인 셈이고요. 심지어 요가 강사들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회사 점심 시간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수업을 하며 ‘민주화된 시간을 누려보라’는 슬로건을 걸지만, 결국 그 또한 자본주의화된 시간 속에 있는 것이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어요.
시간의 화폐화는 대도시, 특히 서울의 삶과 밀접하죠. <딜리버리 댄서>가 그 접점에서 시작되었고요.
특히 한국은 시간, 속도, 생산성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 사회잖아요. 그런 감각은 어린 시절부터 늘 느껴왔던 것 같아요. 심지어 작가로서 작업을 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체감합니다. 현대미술가라는 직업이 자본주의 경쟁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과거 시각디자이너로 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현대미술이라는 곳 역시 치열한 경쟁과 시간에 대한 분투,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 생산성을 증명해야 하는 인정 투쟁의 공간인 거죠. 시간, 속도에 대한 인식이 곧 한국 사회를 너무나 잘 대변하고 있고, 나아가 전 세계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K-팝 비즈니스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산업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이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그런 양가적인 21세기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고요.
작업 초기에는 리서치 기반의 작품에 몰두하다 〈다공성 계곡〉을 기점으로 사변적 픽션과 사변 서사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취했습니다. 여러 차원의 장대한 시공간을 누비는 작업은 큰 자유를 주는 동시에 거대 담론이 주는 무게도 함께 안겨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떻게 느끼고 계신가요?
무엇보다도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의 세계를 세우는 주체가 되고, 세계관의 창조자가 된다는 건 정말 큰 쾌감이죠. 어릴 때부터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고, 픽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몰입했는데, 그것이 결국 저와 잘 맞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2016년쯤 아프로퓨처리즘 소설들을 읽으면서 옥타비아 버틀러 같은 사변 소설가들의 작품에 큰 자극을 받았고, ‘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트리거가 생겨 즐겁게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동시에 말씀하신 거대 담론의 무게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지정학, 정치, 모더니티 같은 주제들, 예를 들어 예멘 난민과 같은 현장의 문제를 조사해 반영하는 작업은 사변적 상상과는 전혀 다른 무게추가 되어주죠. 사변에만 몰두하면 이야기가 허구적으로만 흘러갈 수 있는데,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작업이 단지 가벼운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봐요. 결국 두 축이 제 작업을 지탱해주고 있다고 느끼고요.
SF나 Sci-Fi 장르에 심취한 이들은 얼핏 탈세계화·탈현실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태도를 지닌, 누구보다 미래를 염려하는 이들이라고도 하죠.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예전에 한창 그런 논의가 있었잖아요.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듯, 시적이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 말이죠. 하지만 저는 어떤 형식의 작업이든 결국 세상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고 봅니다. 어떤 것은 더 참여적이고 저항적이며 사회적이라고 평가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작업은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이거나 서정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모든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고, 저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반응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영상이라는 매체가 양가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분열증적으로 온갖 미디어 영상에 포위돼 있고, 잠시만 정신을 놓아도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도시 한가운데서 있을 때면 영상이 공해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현대미술의 영상은 무엇이 달라야 할까 라는 고민도 있으신가요?
지난 10년 사이 LED 패널의 발전과 원가 절감으로 수많은 도시 경관이 미디어 월과 미디어 파사드로 뒤덮였잖아요. 저 역시 많은 경우 공해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택시를 타면 앞좌석 뒤에서 영상이 나오잖아요. 심지어 소리까지 흘러나오고요. 영상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현대미술은 어떤 시간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편집의 속도만 해도 2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노 단위로 프레임이 세분화됐거든요. 아티스트로서 이 변화를 당연히 수용할 수밖에 없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지라기보다,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이요. 산업과 커머셜 문화에서 쓰이던 미감이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오게 되었고, 점점 서로를 상호 침투하잖아요. 어떤 작가들은 이 현상을 오히려 작업의 핵심으로 삼기도 하고, 또 어떤 작가들은 문화 산업의 언어, 자본주의의 언어를 작업에 활용하기도 해요. 그렇게 다양한 층위가 들어오고 교차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저는 이것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막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개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자문할 때가 있나요?
끊임없이 생산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시간이 점점 가속화되는 이 환경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무게중심을 자신에게 두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노이즈 프리퀀시가 존재하죠. 스마트폰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알람, 카톡 단체방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또 수없이 최적화되고 개인화된 콘텐츠가 피드로 밀려들어 오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들을 어느 정도 배제한 상태로 자신의 주파수에 집중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요. 내 주파수가 무엇이었는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안테나와 주파수를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이야말로 주체를 상실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 같아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절실히 느끼는 부분이기도 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내 시간과 체력을 몰입해서 쏟아내려면 결국 깊이 침잠해야만 가능하겠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이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선별하려는 것이죠?
아마 많은 작가들이 나이가 들면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이제는 많은 책을 읽기보다는 소수의 책을 여러 번 읽게 돼요. 보석 같은 책들은 두고두고 다시 읽고 싶어져요.
책 이야기가 나와 여쭙니다. 작업의 시작이 특정 책이나 구절이었던 경우가 많이 있더라고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 작업과 관련해 <위대한 개츠비>의 한 구절을 언급하셨죠. ‘나는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면서 인생의 무한한 다양성에 매력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는 문장이었습니다. 작업과는 무관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일맥상통하는 문장이라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종종 있어요. 어릴 때 문학을 좋아했는데, 그때 읽은 구절들이 불현듯 ‘유레카!’ 하고 떠오르며 작업과 맞닿는 순간이요. 그것이 소위 말하는 컨버전스가 아닐까 싶어요. 한동안 VR에 몰입했던 시절이 있어요. 다섯 달 동안 하루에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씩 VR을 하며 ‘이멀시브한 세계는 정말이지 경이롭구나’ 하고 젖어 들었죠. 그런데 석 달이 지나면서는 지루함과 환멸, 어떤 한계를 체감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하게 됐습니다. ‘나는 이 세계 안에도 있고, 동시에 이 세계 밖에도 있구나.’ 그렇게 두 세계를 오가고 있는 듯한 기이한 주체성을 느꼈어요. 그때 떠오른 구절이 있어요. 전혀 상관없는데도, 꼭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석양이 저물며 황금빛이 반대편 건물의 창을 비추는 순간, 방 안에서는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데 창밖을 내려다보다 지나가는 행인과 눈이 마주친 장면이죠.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었다’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 기이한 구절이 문득 겹쳐졌습니다.
동시대 가장 최신의 예술을 하는 작가의 가장 깊은 뿌리가 책이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매체라는 사실에 흥미로웠습니다.
디지털 결과물을 보여줄수록 많은 분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어요. 바로 그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 아날로그한 시간, 그리고 신체적인 노동입니다. 모션 캡처 작업만 해도 무술 감독과 스턴트 배우들이 땀을 흘리고, 때로는 다치면서 구르고 뛰어다니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이 과정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어서, 아티스트 토크나 여러 자리에서 꾸준히 언급하며 드러내고 있어요.
동시에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에서는 처음으로 AI를 활용했습니다. AI 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접근하고자 하나요?
AI를 다루는 데 있어 작업자이자 예술가로서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스스로 코딩이나 개발 역량을 갖추고 머신 러닝이나 AI 모델의 속성을 직접 다루며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경우죠. 다른 하나는 저처럼 개발 역량은 없지만 순수한 시각 예술가의 관점에서 상용화된 모델들을 차용하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주로 후자의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다만 저와 협업하는 테크 디렉터들이 개발자적 역할을 해주고, 그 과정에서 피드백과 기술적 도움을 받아 작품을 만들어갑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AI들은 ‘강 인공지능’이 아니라 ‘약 인공지능’이거든요. 강 인공지능과 약 인공지능의 차이는 의지와 자율성을 갖추고 있는가의 유무에 있는데, 현재의 약 인공지능은 자율성도, 주체성도, 의지도 없습니다. 단지 수동적이고 복잡한 알고리즘이 작동할 뿐이에요. 저는 주체성 없는 창작물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AI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무리 매끈하다고 해도 이를 예술로 볼 수는 없죠. 그것은 우리가 인스타그램이나 각종 플랫폼에서 접하는 가공된 이미지를 예술이라 칭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맥락입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예술가가 차용하면서 작품화 한다는 것은 그 예술가의 맥락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다시금 환기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최근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에서 심사위원을 맡아, 제가 몇 년 전 수상한 뉴 애니메이션 아트 부문(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Prix Ars Electronica) 심사에 참여했어요. AI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영상들은 놀라울 만큼 매끈하고 일관성이 뛰어났어요. 작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선정된 15편의 작품에는 AI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낸 영상은 단 한 점도 포함되지 않았어요. 결국 AI가 만든 작품을 예술로 전환하는 노동은 결국 인간의 몫이라는 거예요. 맥락과 해석이 필요하고, 예술적 가치가 필요하며, 인간의 결정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하게 되었죠.
같은 이유로 작가의 작업에는 실사 촬영은 물론, 균열과 구멍이 느껴지고 다양한 텍스처가 뒤섞여 있습니다.
저는 다양한 질감을 가진 리소스들을 충돌시키고 접합하는 방식을 특히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실사 촬영이 지닌 무거움, 게임 엔진으로 구현된 CG의 매끈함, 하이퍼 사이버펑크의 미감, 그리고 AI가 만들어내는 끊임없이 몰핑되고 둔갑하는 듯한 기이한 효과들이 겹겹이 중첩될 때, 저는 거기서 인지적 소격 효과를 경험합니다. 그 순간 하나의 세계가 단단히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 세계들이 동시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감각을 받게 됩니다. 최근 작업에서도 바로 그 지점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가능 세계’라는 개념에 워낙 깊이 빠져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제 전제 조건이 된 것 같아요. 세상은 단 하나가 아니라 무수한 버전이 있으며, 그것은 n=1에서 n=무한수까지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한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초한수 같은 개념을 수학자에게 직접 배우기도 했어요.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의 집합론에서 비롯된 ‘힐베르트의 호텔’이라는 사고 실험이 있어요. 꽉 찬 무한 호텔에도 새 손님을 넣을 수 있다는 역설을 이야기하는 실험인데, 무한히 열려 있는 호텔 방처럼 무한은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잖아요. 제 작업 속에서도 바로 그 무한, 그리고 가능성의 무한이 끊임없이 돌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는 곧 발표될 신작들에도 담겨 있는 개념이겠지요?
맞아요. M+ 파사드에서 선보일 작업의 제목이 ‘거울 미로 속 댄서(Dancer in the Mirror Field)’예요. ‘거울 미로’라는 건 곧 무한이죠. 미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거울은 무한히 복제되니까요. 결국 자기 자신의 무수한 영겁을 마주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어요. 내년에 진행할 작업도 있는데, 올해 초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인 ‘알마터 플롯 1991’과 연결됩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복기하고, 지정학과 아버지의 서사를 탐구했던 작업의 후속작이에요. 이제 제 작업이 두 트랙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는 끝 간 데 없는 사변으로 뻗어나가는 축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서사를 복기하는 축입니다. 두 방향이 각자 다른 궤도로 계속 이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 김아영 작가의 다음이 더 기대가 됩니다. 두 갈래의 길을 가는 두 명의 작가를 보는 여정이요. 그 갈래가 더 늘어날 수도 있을 테고요.
한 사람의 내면이라는 것은 결코 일관되지 않고, 여러 상충된 ‘나’들이 거울 조각처럼 흩어 쪼개져 있다고 봐요. 과거 근대적 인간들은 일관된 자아를 추구하도록 요구받았다면, 21세기—인스타그램, 스레드, 트위터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는 더 이상 그런 일관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의 세계는 부캐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세계이고, 깨진 거울 면처럼 무수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가능한 한, 제게 여력이 닿는 한, 그 거울 조각의 면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여주고자 합니다.
가장 가까운 때에 기대되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다가오는 11월 첫째 주에 뉴욕의 MoMA PS1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열어요. ‘딜리버리 댄서’ 연작의 주요 세 영상작품과, 헬멧 조각, 마네킹 조각, 미로 조각 등 다양한 설치물들이 펼쳐지는 큰 전시예요. 그리고 얼마 후인 11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는 뉴욕의 실험적인 퍼포먼스 페스티벌인 퍼포마 비엔날레에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딜리버리 댄서’ 연작의 또 다른 연장인데요, 처음으로 라이브 모션 캡처를 접목한 퍼포먼스를 시도해요. 한국의 여성 스턴트 배우 두 분과 김차이 무술 감독님과 함께 가서 진행할 예정이에요. 뉴욕에서 정말 좋은 시기를 만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아직 공개 전인데, 내년 여름에 한 달 간 수많은 과학자들과 함께 남대서양 해양 탐사에 나서게 될 것 같아요.(웃음) 큰 자선 재단이 운영하는 해양탐사 프로젝트에 초대를 받았어요. 이 재단은 과학자들이 해양을 탐사할 수 있는 거대한 탐사선을 보유하고 있는데, 일정 기간 아티스트를 동행시켜 탐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요. 기후 변화 연구와 심층 해양 탐사, 새로운 생물종 탐사를 함께 진행할 예정이라고 해요. 현재로서는 브라질, 우루과이 인근의 남미 해역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질 거라고 하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세상에, 다음 작업에 영향을 줄 만큼 엄청난 여정이 될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 가장 뜨거운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조금도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2023년, 2024년, 그리고 2025년까지 이어진 지난 3년은 제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운이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폭발적이고, 폭주하듯 융단폭격을 당한 듯한 시간이었어요. 작업자로서 너무 감사하고, 그저 ‘정말 다행이다, 이런 일이 벌어져서 다행이다’라는 생각 뿐입니다. 다행히 예전보다 작업의 연륜이 조금은 더 쌓여서, 작업할 때 중심을 잃지 않고 제 안에 주체성을 붙들 수 있게 된 것도 큰 행운이라 느낍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제 안에 생겼다는 게 다행스럽죠. 무엇보다도 전혀 들뜨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에요. 왜냐하면 제 삶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여기서 작업을 이어갈 거니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