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김보희를 제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의 그림에 영감을 주고 있는 바다와 정원, 야자수와 강아지 레오가 우리를 반겼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김보희(1952)의 작품은 관람자에게 마음의 평온을 준다. 팬데믹 시기에 열린 금호미술관 전시는 모두에게 남다른 위로를 안겨주었다. 2003년 제주에 정착하며 그의 작품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매일 바라보는 아름다운 자연은 그녀의 상상력을 북돋웠다. 그의 그림은 무언가를 보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지구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구상이지만 추상이다. 그림을 그릴 때면 힘든 마음이 아니라 평온한 몸과 마음으로 그리려고 한다.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속상한 마음으로 그린 작품을 나중에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린 기억도 있다. 물론 강렬하게 삶의 분노와 슬픔을 그리는 이들도 있지만, 자신은 그런 작가는 아니라고 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기뻤던 마음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나쁜 마음을 보여주면 은연중에 슬픔이 전염될 것 같아 걱정이 된다고 했다. 자연 속에서 사는 평온하고 행복한 마음을 관람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 좋은 것을 보면 마냥 기쁘고, 너무 좋아도 슬프지 않은가. 8월 26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보희의 개인전 에서 그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신작들을 만날 수 있다.

김보희, ‘Towards’, 캔버스에 채색, 130×97cm, 2026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제주로 이사 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2003년 제주에 정착하셨으니 23년째 이곳에 살고 계시는군요.

1975년 제주로 신혼여행을 왔고, 그 이후 매년 결혼기념일 때마다 남편과 제주를 찾았어요. 제주가 너무 좋아서 결국 2003년부터 이곳에 정착하게 됐어요. 오랫동안 땅을 보러 다니다가, 귤밭이던 이곳을 구입하게 됐어요. 남편이 먼저 내려와서 집을 완성했고, 나도 곧 내려왔지요. 아무래도 제주에 내려온 이후 초록색을 더 많이 쓰게 된 것 같아요. 물감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제주는 다 초록색이니까 나도 그 색을 많이 쓰게 됐고, 그 초록이 좋아서 이곳에 온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합니다. 내 그림 중에서 겨울 풍경은 거의 없어요. 아주 예전에 서울 근교의 물가를 그린 겨울 풍경화가 한두 점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겨울을 그리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전혀 계획이 없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2층 작업실에 창문을 안 만든 이유는 작품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인가요?

햇빛이 창문으로 직접 들어오면 그림에 그림자가 생겨요. 그래서 창을 내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른쪽으로 나가면 야외 테라스가 있어서 언제든지 제주 바다를 볼 수 있죠.

1층은 집, 2층은 작업실이로군요. 이곳을 건축하면서, 작가로서 염두에 둔 점은 무엇이었나요?

결혼 후 처음에는 소형 아파트에서 살면서 거실을 작업실로 쓰다가 점차 집을 늘려가면서 대형 아파트의 방 두 개를 연결해서 작업실로 썼는 데도 좁게 느껴졌어요. 남편이 제주에 먼저 내려와서 이곳을 직접 설계했는데, 마음껏 큰 그림을 그리라고 높은 천고의 작업실을 만들어줬어요. 국립현대미술관과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한 ‘더 데이즈(The Days)’는 27개의 100호 작품을 연결한 대형 그림인데, 총 가로 15m, 세로 4m 크기는 이 작업실의 실제 벽 크기이기도 합니다.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큰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2011년부터 2년 반 동안 그린 작품입니다.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할 때는 한 벽에 걸기가 어려워서, 코너를 이용해 ㄱ(기역)자로 설치했죠. 작업실 크기는 작가에게 너무 중요해요. 이 작업실이 아니었다면 대작은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이곳에서 얼마 전 아트바젤 바젤의 ‘언리미티드’에서 선보인 100호 작품 12점을 연결한 그림 ‘더 데이즈(The Days)’도 그렸습니다. 지금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TOWARDS: There Was Light>에서 ‘더 데이즈’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가 작품으로 옮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림 속의 풍경은 모두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가끔 상상 속의 풍경도 그리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씨앗 그림도 이국적이라서 상상 속의 생명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열대식물을 좋아해요. 여미지식물원 방문을 좋아하고, 우리 정원에도 열대식물들이 많아요. 정원과 연못도 모두 남편 솜씨입니다. 여러 곳에서 식물을 보고 상상해서 그리기도 합니다. 내 그림 속의 풍경은 모두 어딘가에 있을 수는 있지만,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은 아닌 마음속 풍경입니다. 지구가 얼마나 큽니까? 내가 상상한 풍경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겠지요. 씨앗 그림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상상해서 그린 씨앗이지만 그런 씨앗이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상상해 봅니다.

캔버스에 한국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십니다. 캔버스 천을 뒤집어 밑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순서는 여전히 변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에는 장지에 그림을 그렸는데, 사실 장지와 캔버스에 따라 한국화 채색으로 하니까, 색깔은 별로 영향이 없어요. 한국화도 예로부터 비단, 삼베, 면에도 그렸기에 캔버스를 사용한다는 것이 이질감이 없고 이색적이라고 생각은 안 합니다. 하지만 종이는 문창살 같은 얇은 프레임에 붙여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상하기 쉬웠어요. 종이를 서로 연결한 이음새도 고민이었고요. 하지만 캔버스는 큰 그림을 그리기 좋고, 천이라 강하지요. 이제는 캔버스 천이 손에 익어서 작업하기 한결 수월합니다. 예전에는 젯소를 칠한 캔버스에 한국화 물감을 칠하니 잘 안 칠해져 고생했는데, 요즘은 젯소 칠이 안 된 캔버스 위에 한국화 밑칠을 하고 물감을 칠하니 색을 잘 먹습니다. 젯소가 칠해진 캔버스는 뒤집어서 사용도 하고요.

다른 여러 작가들도 한국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 작가님의 색은 왜 많은 이들이 한눈에 딱 알아볼 정도로 특별할까요? 특히 제주 바다색이나 달이 뜬 하늘색은 작가님의 작품과 너무 똑같아서 감탄할 정도입니다.

금호미술관 전시 덕에 저의 제주 그림이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서 그렇게 느끼시는 것 아닐까요?(웃음) 초록색과 파란색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색을 다 좋아해요. 색마다 그만의 매력이 있어요. 붉은색도 좋고 푸른색도 좋고 다 예쁘고 아름답지요. 그 색들이 어떻게 잘 어우러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래전 한국화 교수들은 학생들이 색을 쓰는 것을 싫어했어요. 채색은 일본 유학의 영향이고, 일본화의 잔재라고 봤지요. 검은 먹으로만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한 번 걸러서 사유적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나는 무언가를 보면 형태도 중요하지만 색이 보이기에 자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우리가 색맹도 아니고 세상이 색깔을 보여주는 데 왜 마다하겠어요? 안개 끼고 흐린 날은 세상이 온통 수묵화처럼 보이잖아요.

이번 전시 제목 <TOWARDS: There Was Light>를 설명해주시겠어요? 오랫동안 사용해온 연작 제목 〈Towards〉는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그 너머를 향하는 시선과 태도를 의미한다고 들었어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전시 평론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저 관람객이 상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항상 〈Towards〉라는 제목을 사용합니다. ‘빛’이 없으면 그림이 있을 수 없으니 가장 중요한 요건이지요. 햇빛과 달빛을 신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99% 신작입니다. 100호 그림을 12개 연결한 작품만 아트바젤 바젤과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적이 있어요. 모두 제주에 살면서 느낀 마음을 그린 그림입니다. 자연에서 받는 것이 많고, 그날그날 느낌이 다르고, 제주의 자연은 언제 봐도 신비롭습니다.

강아지 레오의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림 속의 레오는 실제 강아지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작가님의 분신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레오와 어떤 점이 닮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레오로 인해서 작품의 영감이나 에너지를 받는다고 생각해도 될런지요?

레오는 15년 동안 같이 산 식구예요. 그림 속에 사람을 넣기는 싫은데, 레오는 검은색이다 보니 자연을 그릴 때 오히려 눈에 더 띕니다. 좋은 소재이자 주제가 되는 사랑스러운 친구죠. 레오가 이렇게 인기 있을 줄 몰랐어요. 예전에는 조던을 그렸어요. 똘똘하고 착한 강아지였어요. 조던은 서울에서부터 키우다가 열아홉 살에 하늘나라로 가서 정원 끝에 묻어줬어요. 요즘은 레오가 뚱뚱해져서 날씬하게 그리고 있기는 합니다. 눈썹도 하얘졌는데 검게 그렸어요. 레오가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나와 닮았어요. 그래서 바다를 보는 나의 모습을 레오처럼 그리기도 해요. 숲속에 숨어 있는 레오의 모습은 자연 속에 내가 파묻히고 싶은 마음을 담았고요. 예전에는 인물화를 그렸지만, 안 그린 지 오래됐어요. 사람은 시기와 질투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안그리게 됐거든요. 15미터짜리 큰 그림을 그릴 때 사람을 그려 넣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안 그렸어요. 앵무새, 도마뱀, 거북이, 개구리가 있고, 그림 속 원숭이가 나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림 속에 낮과 밤이 함께 있는데, 그것은 하루일 수도 있고 인생일 수도 있죠. 물론 나중에 다시 사람을 그리게 될 수도 있지만, 아직은 계획이 없습니다.

김보희, ‘Towards’, 캔버스에 채색, 72.7×121.5cm, 2026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씨앗과 꽃, 그리고 시들어 늘어진 꽃술을 한 가지에 그려 넣은 ‘자화상’이라는 그림이 있고, 머그잔도 작가님의 흔적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림 속에 작가님의 모습을 숨겨놓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붙인 유일한 작품입니다. 시든 꽃, 열매, 꽃봉오리가 한 가지에 핀 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렸어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든 것도 우아하고 멋집니다. 옥수수수염처럼 시들었지만 그 안에 씨를 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늙어서 주름이 쭈글쭈글해도 아름답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저 꽃처럼 늙는다면 자신 있게 늙어도 되겠다는 마음이었죠. 주름을 창피해 하지 말자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입니다.

오래전 강과 산을 그린 그림 몇 점을 봤습니다. 과거의 색은 지금과는 달라 보이는데, 그때는 제작 기법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작가님이나 관람자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예전 그림은 쓸쓸해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쓸쓸한 것을 좋아합니다. 번잡스러운 것보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죠. 요즘 그림은 레오가 있어서 안 쓸쓸해 보이는 거 아닐까요?(웃음) 그리고 예전에는 남편과 주말 부부거나 연말 부부였어요. 건설회사를 다닌 남편이 해외에서 오래 근무했거든요. 제주에 와서는 강아지, 남편과 항상 함께 있으니 그런 마음이 반영됐을지도 모르겠네요.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바젤의 대형 작품 전시 섹션인 ‘언리미티드’에서 작품을 선보이셨습니다. 글래스고의 모던 인스티튜트 갤러리, 밀라노의 카우프만 레페토 갤러리 전시에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외국인들은 제주의 색이나 한국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해외 관람객이 작가님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으셨나요?

관람객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재료에 있어서 약간 특이하게 보기도 했지만, 글래스고와 밀라노의 갤러리에서도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난 프리즈 뉴욕에서는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이 새벽 풍경을 그린 내 작품을 컬렉팅했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내 그림을 좋아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도 작가의 국적과 상관없이 마티스와 모네를 좋아하잖아요. 나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해외 전시를 여러 번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갤러리와 아트 페어 오프닝에 가보니 관람객이 많이 오더라고요.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전시를 앞두면 하루 일과가 어떻게 변하시는지요?

그림을 많이 그려놓아야 부자가 된 것 같은 마음이라서 종일 그림을 그립니다. 남편은 적당히 작업하라고 이야기하는데, 작업실에 그림이 없으면 마음이 가난하고 조급해져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기도도 드리고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림을 그리다 11시 넘으면 점심 식사를 고민하죠. 예전에는 남편이 다해줬는데, 요즘은 그이도 나이가 있으니까 나도 종종 요리를 합니다. 잠시 낮잠을 자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에요. 중문해수욕장이나 서귀포 바닷가로 산책도 자주 나가요. 낚시하는 이들도 많고 경치가 참 좋아요. 레오가 나이가 들다 보니 바닷가 산책을 안 좋아해서 요즘은 동네 산책을 주로 해요. 우리 동네가 걷기 좋거든요. 가끔 사진도 촬영하고요. 그림 소재를 찾으려고 눈을 크게 뜨고 산책하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편히 보이는 데로 봅니다. 예쁜 노을빛을 보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잘 안 보입니다. 자연스럽게 봐야죠.

조용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명상과 수행이라고 봅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시는지요?

그림 그리는 순간은 매번 힘들어요. 원하는 색이 나오려면 한두 번 칠해서는 어림도 없고, 여러 번을 칠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요. 캔버스 천은 씨줄 날줄이 있고, 사이사이 굴곡이 있어서 그 속에 색을 스며들게 하는 게 어려워요. 그래서 연약한 한국화 붓이 아니라 서양화 붓으로 작업을 하는데, 손에 힘을 많이 줘야 해서 힘들어요. 예전에는 손이 아픈 줄 몰랐는데 요즘은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하지만 다 그려놓고 색이 제대로 살면 그때야 마음의 평안이 오지요. 그래서 작품을 빨리 완성하기보다는 오래 두고 보는 게 좋아요. 자꾸 들여다보면 다시 보이는 게 있거든요. 나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사람이에요. 자연을 보고 확 느끼면, 그림을 그려서 내가 감동받은 마음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게 내가 구상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같이 느끼기를 바라고 공감 받고 싶어요. 나중에는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색이 주는 감정을 향유하며 계속 색과 놀 것 같아요.

1980년 첫 개인전을 하셨고, 올해로 데뷔 46년째이십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한국 미술계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국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로 있었는데, 모든 작가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를 원하는 시대가 됐어요. 우리나라 작가들도 해외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외국 유명 작가 그림을 잘 알고 있듯이, 그렇게 우리 작가들도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우리 작가들의 그림 실력은 안 떨어지는데, 이젠 좋은 그림은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그림은 구상이지만 추상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작가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사실 자연이 어느 무엇보다 추상입니다. 가까이에서 봐도 그렇고, 깊이 들어가면 그 안에 추상이 담겨 있죠. 나무 잎사귀 하나를 보더라고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생명줄이 있어요. 모든 형태는 다 이유가 있어서 생긴 것이죠. 인간이 만드는 것은 자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뭇가지가 자라는 것에는 원리가 있고, 돌연변이도 묘미이지만 나름의 법칙이 있어요. 열매를 맺는 것도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나무마다 변화가 있는데, 형식은 구
상이지만 내용은 추상입니다. 내 마음속도 추상입니다. 어떤 작가라도 슬픔과 기쁨은 추상이지요.

그간 미술가, 교수, 그리고 한 명의 여성으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의 순간이 있었는지,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한때는 나도 ‘천경자 작가처럼 살아야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려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내 인생은 너무 평범해서 그림도 평범하지 않을까 고민했죠. 나도 천경자 작가처럼 뱀을 좋아하지 않지만, 도마뱀은 자주 그립니다. 난 1952년 중산층 부모 밑에서 맏딸로 태어났어요. 내가 넷째인데, 내 위의 삼 남매가 1·4후퇴 때 트럭이 뒤집어져서 사고로 다 잃게 되었어요. 피난시절에 태어나서 힘들었지만,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평탄하게 굴곡 없이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서 교수도 역임했죠. 교수는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은 아니니, 운도 따랐죠.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어서 감사하고,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해주니 행복합니다. 의무감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린 그림이지만 혼자만 내 작품을 좋아한다면 섭섭했을 겁니다. 물론 그림이 안 그려지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길게 생각했어요. 끝까지 작업을 붙잡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기에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가 부러웠는데, 그래도 일생 동안 터득한 한 가지는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꾸준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다음에는 어떤 전시를 예정하고 있으신가요?

지난 제주현대미술관 전시 때는 처음으로 영상과 조각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그 영상 작품을 만날 수 있어요. 인천 제1공항에서는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김영준 교수가 만들어준 새로운 영상 작품이 1층부터 2층까지 올라가는 23미터의 큰 규모로 11월 14일까지 상영 중입니다. 키아프와 프리즈를 보기 위해 서울로 입국하는 분들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볼 수 있으니 기대가 됩니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미술관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 전시할 작품을 부지런히 모아놓아야 해요. 그간 작품 세계의 변화는 생각할 겨를이 없이 전시 준비에 급급했어요. 앞으로 생각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때그때 내 마음에 솔직하게, 감정에 충실하게 작업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