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K. 롤링
1965년 7월 31일 영국 잉글랜드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글로스터셔주 예이트 출생, 영국의 아동문학 작가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시리즈인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집필자이며, 이 외에도 위저딩 월드 등의 다양한 작품을 저술하였다. 롤링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억만장자가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서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J.K. 롤링 필명
현재 필명인 J. K. 롤링은 작품의 대상이 되는 소년이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한 출판사가 롤링에게 이니셜을 사용하도록 요청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롤링은 중간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 이름인 캐슬린에서 따와, 필명을 J. K, 롤링으로 하기 시작했다.
J.K. 롤링 어린시절
잉글랜드 브리스틀 근처 북동쪽에서 10 마일(16.1km) 떨어진 예이트에서 롤스로이스 항공기 엔지니어인 피터 제임스 롤링과 과학 기술자인 앤 롤링(옛 성씨 : 볼란트)의 장녀로 태어났다.
롤링이 만 4살이 되던 해 롤링 가족은 글로스터셔 주의 윈터본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만 9세 때에는 텃실로 이동했다. 롤링은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고딕 풍의 교회 건물과 정원,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풍부한 숲 등 아름다운 경관들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롤링은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 쓰는 것을 좋아했고, 여동생을 위해서 이야기를 쓰는 것을 즐겼다. 그녀가 처음으로 쓴 이야기 〈토끼〉는 홍역에 걸린 토끼에 대한 이야기였다.
롤링은 세인트 마이클스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영국의 정치인이자 노예 폐지 운동가 윌리엄 윌버포스와 교육 개혁가 해나 모어가 설립한 학교로 교장 앨프리드 던은 《해리 포터》에서 등장하는 알버스 덤블도어의 영감이 되었다.
이후 롤링은 어머니가 과학 교사로 일했던 와이딘 중학교에 입학했다. 롤링은 고급 독일어·프랑스어·영어를 공부했고, 학교의 여학생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롤링은 그녀의 10대 시절이 어머니의 질병과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불행했다고 회고했다.
1982년 롤링은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지만, 낙제하였다. 잉글랜드 서남부의 엑서터 대학교에서 불문학과 고전학을 전공했고, 파리 유학을 다녀왔다. 롤링은 대학생 시절 많은 소설을 썼지만 완성까지는 하지 않았고, 제인 오스틴 등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롤링은 졸업 후 국제 사면 위원회에 임시 직원으로 들어가 비서 일을 했지만, 이는 롤링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J.K. 롤링 해리포터 집필
1990년 여름,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던 롤링은 4시간 동안 지연된 열차 안에서 마법학교에 다니는 소년 “해리 포터”와 “론”, “헤르미온느” 3명의 착상을 떠올렸고, 집으로 돌아가 그날 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영감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일어난 경험으로, 이후 인터뷰에서 롤링은 어디에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91년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영어 교사로 취직을 한 롤링은 매일 밤마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18개월이 지난 후에 포르투의 바에서 텔레비전 저널리스트 조지 아란테스와 만났고, 1992년 결혼했다. 다음 해 1993년에는 딸 제시카 이사벨 롤링 아란테스를 출산했지만, 남편과의 불화로 1993년 이혼 소송을 시작하였고, 생후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무일푼의 몸으로 영국으로 귀국해 여동생이 사는 에든버러에 정착했다. 그녀는 고등학교의 불어 교사가 되는 길도 있었지만,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없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에 소설을 쓰는 것에 집중한다. 소설가로 명성을 얻기 이전의 에든버러에서의 생활은 이혼 후 생활고와 가난했던 시절 우울증으로 “자살도 생각했었다” 라고 에든버러 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이 때의 경험이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디멘터의 근원이 되었다.
롤링은 1994년 이혼 소송 정리를 위해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1995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교사 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소중한 딸의 존재에 의지하면서 그녀는 몇 달에 걸쳐 우울증을 완치하였고, 가난한 미혼모로 생활 보조금으로 연명한 그녀는 자신의 첫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 제1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J.K. 롤링 해리 포터 출간
1995년 롤링은 완성 된 원고를 에이전트를 통해 12개의 출판사에 제출했지만, 너무 내용이 길다는 이유로 어느 출판사도 간행을 맡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롤링은 저작권 대행업체 크리스토퍼 리틀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롤링의 책을 영국의 블룸즈버리 출판사에 팔아주었다. 블룸즈버리 출판사가 이를 간행하게 된 것은 원고를 편집자가 직접 읽기 전에 8세 아이 “앨리스 뉴턴”의 반응을 보고 난 후로, 1시간 후에 방에서 나온 앨리스는 “오마이갓 이 책은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멋지다!”고 말을 하였기 때문에 블룸즈버리 출판사는 해리포터를 출판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책의 이름은 《해리 포터와 현자의 돌》(Harry Potter and the Philosopher’s Stone)이었는데, 나중에 미국에 출판되었을 때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로 변경되었다. 영국 블룸즈버리 출판사 에서 출판된 이 책은 네슬레 스마티스 상과 영국 도서상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신인 작가의 작품으로서는 파격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또한 아동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성인 독자까지 매료시키면서,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속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은 1998년 7월에 발표되었고, 롤링은 네슬레 스마티스 상을 또다시 받았다.
1999년 12월에는 3편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발표했고, 롤링은 네슬레 스마티스 상을 3회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롤링의 연속된 수상으로, 주최측에서는 다른 작가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4편 《해리 포터와 불의 잔》부터는 경쟁부문 후보에서 제외했다.
4편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2000년 7월 8일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발표되었고, 양국에서 판매기록을 새로 세웠다.
롤링은 2000년 영국 도서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또한, 아동문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롤링은 3년 후 5편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발표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공백으로 많은 추측이 난무했지만, 롤링은 그동안 집필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6편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는 2005년 7월 16일에 발표되었다. 6편은 출시 후 24시간 만에 9백만 부를 판매하는 등, 모든 판매 기록을 갈아치웠다.
2006년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는 영국 도서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책 상’ 시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시리즈의 일곱 번째 소설이자 최종편의 제목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으로, 2007년 7월 21일에 발표되었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2007년 7월(유럽 시간 기준) 가장 빠르게 판매된 책으로 이전의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고,영국과 미국에서 첫날에만 11만 부를 판매했다.
《해리 포터》는 현재 15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글로벌 브랜드가 되었고, 《해리 포터》 소설 중 마지막 네 편은 역사상 가장 빠른 판매를 기록한 책이자 연속 세트 기록을 세웠다. 총 4,195 페이지에 달하는 시리즈와 67개 언어로 번역되며 4억 5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해리 포터 영화
1998년 10월, 워너 브라더스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두 편의 소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영화 판권을 구입하였고,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을 맡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2001년 11월 개봉하였고,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은 2002년 11월 15일에 개봉되었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2004년 6월 개봉되었고, 감독은 알폰소 쿠아론이 맡았다.
네 번째 영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은 마이크 뉴얼이 감독을 맡아, 2005년 11월 개봉했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2007년 7월 개봉하였고, 감독은 데이비드 예이츠가 맡았다.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는 2009년 7월 개봉되었고, 예이츠가 다시 감독을 맡았다.
영화 시리즈의 최종장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부》는 2010년 11월에 개봉되었고,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는 2011년 7월에 개봉되었다. 예이츠는 두 편의 감독을 맡았다.
롤링은 워너 브라더스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영화 계약을 할 때 주요 규정 중 하나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는 영국인으로 캐스팅하고 모든 촬영지는 영국에서 촬영하는 것을 내걸었고, 일반적으로 준수되었다. 당초에는 영화 감독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언급 되었지만 롤링과 제작사와의 마찰로 성사되지 않았고, 워너 브라더스는 가족 중심의 친화적인 필름을 원해 《나홀로 집에》시리즈와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으로 알려진 크리스 콜럼버스를 선택했다.
롤링은 전 시리즈에서 모든 스크립트를 검토하고 영화에 대한 여러 가지 창의적인 조언을 했을 뿐 아니라, 최종장을 두 편으로 나눴고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해리 포터》 영화 시리즈는 10년동안 총 8편의 영화로 제작되며, 영화관 입장권 판매로만 64억 달러의 엄청난 수입을 거두웠다.
2013년 9월, 워너 브라더스는 롤링과 영화의 기획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확장된 창조적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2014년, 《해리 포터》시리즈의 스핀오프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을 3부작의 영화로 제작하고 롤링이 직접 각본을 쓴다고 발표하였다. 감독은 데이빗 예이츠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아 2016년 11월 개봉했으며, 2편과 3편은 각각 2018년과 2020년 개봉했다.
J.K. 롤링 성공과 재산
롤링의 연수입은 약 1억 2500 만 파운드로,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기록한 작가’라고 평가받았다. 2003년 5월 영국의 ‘부자 리스트’의 발표에 따르면 《해리 포터》 책, 영화, 기타 관련 상품으로 그녀의 손에 들어 온 금액이 한화로 약 5,570억 원이라고 추정했다. 이 금액은 엘리자베스 여왕보다도 많은 금액으로, 영국 내에서는 122번째에 해당한다.
롤링은 2004년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 목록에 첫 등장했으며, 2007년 1월, 《포브스》가 발표한 ‘엔터테인먼트계에서 활약하는 여성 중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여성 톱 20’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0년 1월 그녀의 재산은 5억 600만 파운드로 알려졌다.
2013년 2월, BBC 라디오 4의 《여자의 시간》에서는 그녀를 영국에서 가장 영향있는 여성 13위에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