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이갑철은 40여 년 동안 한국의 땅을 횡단하며 시대를 기록해왔다.
격변기의 거리, 굿과 의례의 숨결, 변화하는 사계 풍경 속에서 그는
형상 아래에 고요히 흐르는 기운을 붙잡아 프레임에 담았다.
긴 시간 한곳만을 응시해온 사진가의 곧은 시선에 자연히 스며 있는,
우리 땅의 고유한 정서에 대하여.
사진가
이갑철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사진가 이갑철이 포착한 한국의 풍경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를 머리로 이해하기 이전에 몸으로 먼저 느끼게 된다. 초기작 <제주-천구백팔십>(1979~1984)을 시작으로, 그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의 땅과 자연, 그리고 그 위에 선 사람들을 기록해왔다. 경남 진주에서 갓 상경한 한 청년이 거리를 배회하며 느낀 생경함과 소외감을 담은 <타인의 땅>(1985~1990)은 1980년대 후반 격변기의 한국 사회를 작가의 시선으로 응시한 기록이다. 현실의 장면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 위에 서 있던 한 개인의 흔들리는 감정을 여과 없이 담아낸 사진은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겹쳐지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이후 <충돌과 반동>(1990~2000)에 이르러 작가의 시선은 무속의 현장으로 옮겨간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다니며 굿과 의례의 현장을 찾은 그는 이 땅의 기저에 흐르는 정신세계, 우리의 뿌리를 이루는 정서와 마주한다. 논리 대신 직관을,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따라 셔터를 눌러온 그의 시선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형상이나 풍경을 빗겨나 더 깊은 차원에 머문다. 형형한 기운이 그의 흑백사진 주위를 감싼다. 보이는 풍경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 그는 여전히 카메라 뒤에 선다.

지난달 더 레퍼런스에서 개인전 <이갑철 다른 풍경론: 1979-2000>이 뜨거운 성원 속에 막을 내렸습니다. 40여 년간 이어온 작업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다시 마주하니 어떠셨나요?
감회가 새로웠어요. 전시를 제안한 더 레퍼런스의 김정은 대표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부분 <충돌과 반동>으로 이갑철을 기억하지만, 그 전후 맥락은 잘 모르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작업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흐름을 한 차례 정리하는 전시를 기획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작업을 쭉 모아보니 20대부터 60대까지 사진 하나는 올곧게 찍어왔구나 싶더군요. 이번 전시는 제 작가 인생의 전반기를 정리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후반기를 시작할 테니 기대해도 좋습니다.(웃음)
이태원과 동두천의 군사화된 거리 풍경을 포착한 <거리의 양키들>(1984), 1980년대 후반 격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기록한 <타인의 땅>에는 변화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당대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처음 한국의 땅을 사진에 담아보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신구대학 사진학과에 입학해 육명심 선생님 밑에서 배운 영향이 컸어요. 선생님은 고유한 우리 문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 분이고, 당시에도 <백민> <장승> <예술가의 초상> 등 우리나라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작업을 이어오셨어요.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80년대 무렵이 서구에서 현대사진이 한국에 막 유입되기 시작한 때였는데, 육명심 선생님은 번역서가 없던 그 시절에도 해외 서적을 탐독하며 현대사진의 흐름을 누구보다 발 빠르게 짚어내던 분이에요. 그 무렵에 제 사진 인생의 오랜 멘토라 할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의 작업을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로버트 프랭크 사진의 어떤 점에 유독 감응하셨나요?
로버트 프랭크는 1950년대에 미국 전역을 횡단하며 사회를 바라보는 시정(詩情)을 사진에 담아낸 작가예요. 그의 사진집 <미국인들(The Americans)>의 서문에 잭 케루악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 사진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시(詩)를 모르는 사람이야, 알겠나?” 이 문장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느꼈어요. 그가 당대 미국 사회를 바라보며 느낀 시적 정서를 표현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밟고 선 이 땅을 나의 주관적 시선으로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 무렵 제 또래 동료들은 열에 아홉이 독일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혼자 한국에 남아 작업을 이어가면서 이 땅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돌아보면 그 역시 나라는 존재의 운명 같아요. 그런 마음으로 전국을 다니며 거리 위에서 어색하게나마 우리 땅을 기록한 게 <타인의 땅>이었습니다.


<타인의 땅>을 찍던 당시 작가님이 우리 땅을 보며 느낀 정서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고향 경남 진주를 떠나 서울로 막 상경했을 때였는데, 말 그대로 늘 타인의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누구나 보편적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땅이 아니라 멀게만 느껴지는 남의 나라 같았죠. <타인의 땅>을 찍던 1980년대 후반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같은 시기였어요.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죠. 그런 격변기의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내가 느낀 감정을 사진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시위나 선거 현장을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기록한 사진은 많았지만, 나는 그 시대를 나의 주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던 거죠. 형식적으로 <충돌과 반동>만큼 완결성을 지닌 작업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이 작업이 한국 사진사에서 주관적 다큐멘터리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땅>이 거리의 풍경을 통해 시대를 바라본 작업이라면, 이후 <충돌과 반동>부터 굿과 의례 현장으로 시선을 옮겨 보다 정신적인 차원에 집중해오신 듯합니다. 그 변화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그때까지는 사회적 관점에서 우리 땅을 담으려 했다면, <충돌과 반동>부터는 우리 풍토에 흐르는 정신세계를 본격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결정적 계기가 된 게 <충돌과 반동>의 표지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은 <타인의 땅>을 찍으러 다니던 시절, 경북 영덕에서 열린 풍어제 굿판에서 찍었습니다. 어느 날 암실에서 찍어온 필름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데, 그 사진 한 장을 마주한 순간 그동안 찍어온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을 찍었다면, 비로소 속을 들여다보게 된 기분이 들었죠. <충돌과 반동>은 내 의지로 포착한 장면들이 아니에요. 무의식적으로 찍은 겁니다. 어쩌면 그 장면이 운명처럼 나를 찾아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부터 논리나 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직관을 따라 찍기 시작했어요.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전에, 투명한 정신으로 그 순간과 만나는 방식으로 말이죠.
아버지와 어머니, 더 먼 조상들,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내 안에 흐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그 감각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이토록 가슴 시린 대상이 아니었다면, 사진가로서
눈에 보이는 풍경 너머의 것을 보기 힘들었을 거예요.


<충돌과 반동>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동양적 사유에 대한 기록으로 주목받으며 관객과 직접 만났습니다. 현지 관객은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충돌과 반동>을 미국과 프랑스에서 선보이면서 이토록 한국적인 작업이 그들에게도 과연 가닿을까 염려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들도 사진 속 기운을 느끼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한국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차용해 뭔가를 만들어내기보다, 나라는 존재가 품은 고유한 에너지를 그저 뱉어내놓으면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 진정성이 전해진다는 것을요. 사진뿐 아니라 어떤 예술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에너지를 믿고 계속해나가는 게 중요하죠.
작가님의 작업을 두고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표현이 자주 언급됩니다. 그 감각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그 표현이 처음 등장한 건 <충돌과 반동> 전시 서문이에요. 육명심 선생님이 서문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 사진의 기저에는 작가 개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공유하는 정서와 기억이 흐른다고요. 처음에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어요. 내 사진에 담긴 한국적 정신이란 게 뭘까, 오래 고민했지만 깨달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골의 한 촌락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던 감각,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자아내던 흥취가 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어떤 아스라함으로, 가슴 시려움으로 말이죠. 그 감각이 의식하지 않아도 사진에 배어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가슴 시려움’의 감각, 그것이 한국 고유의 정서라 볼 수 있을까요?
그렇죠. 나는 우리 땅만 보면 가슴이 시려요. 슬프도록 아름다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恨)’의 정서란 게, 내게는 어떤 원한의 감정이 아니라 가슴 시린 감각에 가까워요. 해외를 많이 다녀봤지만 우리 땅을 볼 때처럼 가슴이 움직이질 않아요. 아버지와 어머니, 더 먼 조상들,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내 안에 흐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그 감각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이토록 가슴 시린 대상이 아니었다면, 사진가로서 눈에 보이는 풍경 너머의 것을 보기 힘들었을 거예요.

아직도 우리 땅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주 많아요.
그게 내가 사는 의미인 것 같아요.
우리 땅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된다 보십니까?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봐요. 자연을 거스르지 않음, 즉 무위자연의 태도가 곧 한국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동서양의 정원을 보면 우리의 자연관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죠. 서구의 정원은 기하학적 대칭을 이루는 형태가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겨집니다. 자연을 통제해 질서를 만드는 거죠. 중국은 정원을 가능한 크게 가꾸고, 인공적으로 산과 호수를 만들어 세계를 축소해 재현해요. 섬세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일본은 자연을 극도로 절제해 표현합니다. 반면 한국은 자연을 흐트려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죠. 자연이 주인이고, 인간은 그 안에 잠시 머무는 존재라는 자각이 있어요. 자연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내 사진에도 자연스럽게 배어 있습니다.
최근에 새로운 연작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작가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크게 두 갈래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하나는 도시를 바라보는 ‘여흑(餘黑)’, 다른 하나는 한국의 사계를 다시 마주하는 ‘적막강산’입니다. ‘여흑’은 여백에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느껴지는 여백의 미가 있죠. 이때 여백이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작가의 고유한 에너지가 머무는 자리예요. 형상화하지 않은 자신의 정신을 빈 공간에 흩뿌려둔 셈이죠. 불빛이 꺼진 도시의 어둠에도 그와 비슷한 에너지가 숨어 있다고 느낍니다. 도시 풍경을 기록해온 작가는 많지만, 나는 눈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흐르는 기운을 담고 싶어요. 우리가 본 것 너머에 감동하면 본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이 작업에서도 그런 장면을 만나길 원합니다. ‘적막강산’에서는 우리 땅의 사계가 자아내는 고요한 정서에 주목합니다. 매년 태백산 천제단에 오르고, 봄에는 섬진강에 가 매화 향기를 맡으면서 깨끗한 에너지로 내 안을 채웠다 다시 비우는 과정을 20년간 반복해왔어요. 여전히 생각이 앞서지만, 언젠가 적막강산의 에너지를 만나기 위해 쉬지 않고 나아가는 중입니다. 쉽지 않지만,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어요.
무엇이 작가님을 이토록 오랜 시간 카메라 뒤에 머물게 하나요?
나는 아직도 우리 땅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주 많아요. 그게 내가 사는 의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쯤 와 보니, 단순히 혼자 좋아서라기보다는 작가로서 우리의 것을 제대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언젠가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겠지만, 잠시 머물렀던 이 시대에 어떤 자긍심으로 남을 수 있는 작업을 남기길 바라요. ‘그래도 한국에는 이런 게 있었지’ 할 수 있는, 그런 사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