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식의 정원

니트 풀오버 메종 키츠네 바이 비이커(Maison Kitsune by BEAKER), 스트라이프 셔츠와 체크 팬츠 모두 엠엔지유(MNGU), 핑크색 스니커즈 프레드 페리(Fred Perry).
핑크 셔츠와 하운드투스 체크 재킷 모두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
니트 칼라 데님 트러커 재킷 엠에스지엠 바이 비이커(MSGM by BEAKER), 하운드투스 체크 팬츠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
박시한 브라운 재킷과 오버사이즈 팬츠 모두 노앙(Nohant), 스트라이프 럭비 셔츠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블루 스웨이드 스니커즈 오니츠카타이거(Onitsuka Tiger).
일러스트가 그려진 블랙 터틀넥 디올 옴므(Dior Homme), 그레이 재킷과 팬츠 모두 엠엔지유(MNGU).

생각보다 훤칠한 키, 짙은 속눈썹, 아기 같은 피부, 거침없는 말투.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귀여움이 뚝뚝 떨어지는 최우식은 그런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듯 보였지만 그가 서른을 앞두고 있고, 많은 감독의 러브콜을 받는 뛰어난 배우라는 점을 상기하면 새삼스럽다. 올 한 해만 해도 최우식은 영화 <옥자>, 웹 드라마 <썸남>,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곧 방영할 jtbc 드라마 <더 패키지>에서 7년째 연애중인 한 남자를 연기할 예정이다. 게다가 <물괴> <그대 이름은 장미> <궁합> <마녀> 등의 영화가 내년 중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최우식이 아주 바쁜 배우 중 하나라는 건 증명된 셈이다.

최우식은 자신의 말마따나 그간 누군가를 서포트하는 역할을 많이 해왔는데, 그걸 ‘조연’이라고 단정하기 아쉬운 건 화면 안에서 반드시 시선을 뺏고 마는 최우식의 독보적인 존재감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역할을 하든 자신의 호흡으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재능이 모든 배우에게 공평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천부적이라는 표현도 틀리진 않다. 곧 크랭크업 하는 박훈정 감독의 <마녀>에서 오랜만에 주인공을 맡은 최우식은 ‘남자1로서 좋은 그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남자1이 아닐 때도 최우식은 항상 최우식이었고 그게 주인공을 맡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 최우식은 뭐라고 대답할까?

 

올 한 해 많은 일을 했다. 관객에게 선보이지 않은 작품도 아직 많지만. 2017년은 비중이 높은 작품보다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았다. <쌈, 마이웨이>도 (박)서준이 형과의 우정으로 특별 출연했지만 그 작품을 통해 얻은 게 많다. 캐릭터 자체에 반전이 있었지. 현장에서 (김)지원 씨와 감독님과 계속 얘기했다. ‘무빈’이가 더 못되게 나와야 하는데 찍다 보니 사랑스러운 모습이 보이는 거다. ‘얘를 어떻게 더 보여줘야 할까?’ 그걸 조절했다. 출연자들과 호흡이 좋아 짧지만 깊게 몰입한 것 같고, 내가 알기론 무빈이가 원래 감독님이 생각하고 있던 다른 작품의 주인공이었다. 그걸 맛보기로 보여준 거라 감독님이나 작가님도 무빈이에 애정이 많았고 시청자들도 사랑해주셨다. 그 덕분에 원래 1회부터 4회까지만 출연하기로 했는데 10회까지 갔다. 촬영 일정 때문에 8회로 줄이기는 했지만 새로운 경험이었고 재밌었다.

무빈이 대놓고 나쁜 남자가 아니라 연애 따로, 결혼 따로 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인물이라는 점이 신선했다. 맞다. 그걸 가리키는 단어가 있는데… 자기가 모르고 하는 행동이 싸가지 없는 거. 모X남인가?(일동 폭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역할의 경중은 분명 아닌 것 같다. 영화 <거인> 으로 신인상을 받고 부담감이 컸다. ‘다음 작품은 뭘 해야 하지? 어떤 캐릭터를 해야 하지?’ 많이 고민했고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비중이 높은 역할이나 주인공을 맡고 싶었다. 그러다가 점차 내가 자신 있고 즐길 수 있는 역할을 찾았다. 비중의 경중을 떠나 ‘이거 하면 재밌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그냥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연기가 다시 재미있어지고 나도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 때문인지 선택하는 장르도 다양하다. 얼마 전 끝난 <썸남>은 웹 드라마였지. 극의 형식이 다르니 촬영 과정도 신선했을 것 같다. 하하하. 옛날에 <닥치고 패밀리>라는 시트콤을 한 적이 있는데 그 후 처음으로 현장에서 그렇게 놀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감독님도 나도 대본의 선을 깨지 않는 한 그냥 진짜 막 했다. 워낙 요즘 유행하는 ‘병맛’ 코드랑 잘 맞아서 그냥 소리 지르고 싶을 때 소리 지르는 식으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연기했다. 인터뷰할 때 가끔 어떤 장르를 해보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괜히 있어 보이려고 ‘이러이러한 장르요’ 대답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장르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장르보다 캐릭터에 더 신경 쓴다.

그게 행보에서 보인다. 물론 장르에 따라 캐릭터의 톤이 바뀌긴 하겠지만 장르를 크게 고려하진 않는다.

수줍고 귀여우면서도 지질한 게 매력인 남자 캐릭터의 아이콘이 된 것 같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다가 이 이미지가 굳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확고한 이미지가 있는 건 장점인 것 같다. 원래 내가 지질하고 눈치 보는 면이 있는데 그게 연기에 잘 스며들어서 좋다.

얼마 전에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의 배역으로 최우식을 추천하는 댓글들이 정말 많았다. 모태 솔로에 짝사랑만 하는 순수남 캐릭터였다. 정말? 딱이다. 완전 잘할 수 있다. <호구의 사랑>에서 맡은 캐릭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떠올리는 것 같다.

누군가의 취향을 저격하는 캐릭터이자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연기하면서 좋은 점이 그런 캐릭터는 항상 끝에 발전한다는 거다. 꼭 나중에 더 멋있어진다. 그런 면이 있어서 좋다.

반면에 <옥자>에서 맡은 캐릭터는 인상 깊다. 지질하기는커녕 과격하고 기름기라곤 1도 없는 담백함이 아주 좋았다. 흐흐. 봉준호 감독님이 대단하다고 느낀 게 나는 특별 출연에 가까울 만큼 비중이 많지 않아서 대본에도 뭐가 없었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내 이미지를 만들어줬다. 정확한 디렉션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고 몇 가지 디테일만 잡아주셨다. 그 디테일만 생각하고 연기했는데 캐릭터가 완성됐다. 되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할리우드 배우와 함께하는 현장은 처음이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나? 촬영장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게 할리우드처럼 배우들이 쉴 수 있는 컨테이너가 늘어선 모습이었다. 나도 트레일러를 사용했는데 로케이션만 서울이지 환경은 완전 외국이었다. 전형적인 한국 영화 현장과 모든 방식이 달랐다. 예전에 <호텔룸>이라는 싱가포르 영화를 해외에서 찍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배우로서 스탠바이 할 때 긴장감의 결이 달라지더라. 스태프들도 다 외국인이라 영어로 일을 했는데 영어는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크게 없지 않나. 모든 사람한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도 좋았다.

그러고 보면 크고 작은 여러 작업 환경을 거쳤을 텐데, 최우식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어떨지 문득 궁금하다. 흔히들 사회생활이라고 말하는 것. 편하게 하려고 일부러 더 과장해서 허리를 굽힐 때가 많은 것 같다. 다른 배우도 그렇지만 현장에서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메이크업도, 헤어도, 의상도 전부 누군가가 해줘야 하고 매니저 형도 나를 계속 케어해줘야 한다. 갓난아기가 된 기분으로 일을 하는데, 매 순간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을 하는 거라 관계가 조금만 불편해도 연기까지 불편해진다.

얼마 전 <물괴> 촬영이 끝났다. 어땠나? (내가 경험한) <부산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영화다. 그냥 사극 영화가 아니라 사극 플러스 SF라 CG를 위한 연기를 해야 했는데 재밌었다. 초록색 옷 입은 분이랑 같이 연기하고 뒤에 다 초록색 배경인데 우리끼리 으어~ 하는 현장이 많았다. 그걸 찍고 나서 <혹성탈출>을 다시 봤는데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물론 연기가 하는 척하는 것이긴 하지만 <물괴> 같은 현장에서는 말 그대로 정말 ‘척’을 해야 했다. 터널에 들어가는 척, 떨어지는 척. 대사를 외워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현장에서 없는 걸 보면서 연기를 하는 게 좋은 경험이었다.

그렇게 연기할 때는 상대를 두고 연기할 때랑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그렇다. 옛날에 한 기사에서 읽었는데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가 혼자 CG통 안에서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생각한 연기는 이런게 아닌데 참 슬프다’라고 했다더라. 간달프는 극중에서 아주 크기 때문에 난쟁이들과 연기할 일이 없고 혼자 해야 했던 거다. 그렇다고 내가 혼자 연기를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의 환경이 이런 식으로 계속 바뀌니까 나도 빨리 여기에 적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박훈정 감독의 신작 <마녀>에서 주인공을 맡아 곧 촬영에 들어간다. 시나리오에서 강렬하게 끌린 건 어떤 부분인가? <마녀>는 한국에서 그간 보지 못한 액션물이 될 것 같다. 여주인공 역할이 너무 좋아서 끌렸다. 내가 그간 서포트하는 연기를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쪽으로 서포트한다. 그 여배우와 함께 만들어가는 그림이 있어서 부담감 없이 ‘남자1’로서 ‘여자1’을 서포트하면 될 것 같다. 최우식을 오랫동안 봐왔고 기대가 큰 분들은 이 영화를 보고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거다.

크랭크인이 몇 주 안 남았다. 일 안 할 땐 주로 뭐 하나? 집에서 게임하고 영화나 미드를 본다. 강아지 ‘초코’와 함께.

영화, 음악, 책 중에 평생 하나만 갖고 놀아야 한다면? 영화. 사실 노래도 되게 좋아해서 노래 없이는 못 살 것 같긴 하다. 난 샤워할 때도 노래를 들어야 하거든. 근데 평생 함께할 하나를 택하라면 영화가 아닐까.

최근에 본 영화 중에는 뭐가 좋았나. <잇(It)>. 우아, 공포영화를 보러 갔다가 아이들 연기에 빠져서 나왔다. 거기 나오는 애들이 연기를 신기할 정도로 잘하고 특히 ‘베벌리’ 역을 맡은 여자애는 나이가 어린데 너무 예쁘고 아주 멋있게 나온다. 와, 진짜 감독이 배우 하나 제대로 찾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장면이 딱 생각난다. 여자애가 약국에서 나오는 장면과 폭포 위로 다이빙 하는 장면. 너무 잘 찍었다. 혹시 넷플릭스에서 <기묘한 이야기> 봤나? 그 드라마에 나온 캐릭터가 <잇>에도 나온다. <잇>은 <혹성탈출> 이후 아주 오랜만에 시리즈물이라는 사실에 안도한 첫 영화다. 아쉬운 건 다음 시리즈에 꼬마 애들은 안 나온다.

영화만큼이나 여행도 좋아한다고 들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인데 인천공항만 가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캐나다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공항 가면 기분이 참 좋다. 친구들이랑 할 거 모여서 없으면 인천공항에 갈 정도다. 커피 마시다가 카트 한번 쓱 끌어보고 놀다가 집에 온다.

최근엔 어느 나라에 다녀왔나? 도쿄. 쇼핑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왔다. 술도 많이 마시고. 술 되게 좋아한다.

술 좋아하는데 집에만 있기가 쉽지 않을 텐데? 집에서 주로 마신다. 평상시에 제일 많이 하는 게 뭐냐 하면 맥주 캔 따고 노트북 스페이스 바 누르는 거. 그때가 제일 좋다. 항상 누워 있는데 으~~(찡그리며 일어나는 시늉을 하며) 하고 앉아서 스페이스 바 누르고 다시 눕는 거 제일 좋아한다.

그레이 스웨트셔츠 해프닝(Happening), 안에 입은 블루 터틀넥 엠에스지엠 바이 비이커(MSGM by BE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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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구의 세계

니트 스웨터와 팬츠 모두 사카이(Sacai),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셔츠 몽클레르 감므 블루(Moncler Gamme Bleu), 니트 스웨터 소윙바운더리스(Sewingboundaries).
니트와 팬츠 모두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니트와 팬츠 모두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배우 여진구와의 대화는 호흡이 빠르다. 거의 모든 질문에 빠른 속도로 답한다. 지나간 캐릭터에 대한 소회, 선배들과 함께한 현장에서 느낀 심경,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 삶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나면 하고 싶고 가고 싶은 곳들. 주제를 막론하고 주저 없이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씩씩하고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는 점에서 연기도 예술의 영역이라는 그는 현장에서 부딪히며 연기를 배웠으니 이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잘 표현하고 싶어 대학에서  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간 여진구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괴물 같은 아빠들을 자양분 삼아 더 큰 괴물이 되어버린 화이를 연기했고, <서부전선>과 <대립군>까지 설경구, 이정재 등의 선배들과 함께하며 현장에서 제 몫을 거뜬히 해냈다. 그리고 12월 개봉을 앞둔 장준환 감독의 차기작 <1987>(가제) 속 이야기의 시작인 박종철을 연기하며 자신이 살지 않은 시대, 경험하지 않은 역사 한가운데에 선다. 인터뷰가 있던 당일 새벽까지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 촬영을 했다지만 마지막 회차 촬영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는 스물한 살의 이 배우는 지금 연기에 대한 열정과 취향에 대한 발견으로 자신의 세계를 건강하고 현명하게 빚어가는 중이다.

 

올 상반기에 <대립군>이 개봉했다. 많은 배우가 연기한 바 있는 ‘광해’ 역을 맡았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캐릭터를 만들어가기 어려웠을 것 같다. ‘광해군’이기 때문에 어려웠다기보다는 <대립군>의 광해가 내가 알던 왕의 모습이 아니어서 어려웠다. 위엄 있거나 권위적인 왕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 리더십을 갖추게 되리라 짐작은 하지만 당장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힘든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약한 소년이자 어린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몇 편의 사극을 해오면서 왕을 맡기도 했는데 그때 캐릭터와 많이 달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감독님과 의견을 많이 주고받았다. 감독님은 광해의 감정이 격정적이지 않고 잔잔한 시냇물이나 촛불처럼 흔들리기를 바랐다.

배우에게 캐릭터는 숙제다. 숙제를 풀 때 어떤 식으로 푸는가? 혼자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힘들다. 선배들이나 감독님과 영화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시간들이 모여 차츰차츰 선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아무래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많다. 그런 식으로 틀을 다지고 현장에서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는 게 편하다. 지금껏 선배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았는데 내가 애써 역할에 힘을 주지 않아도 선배들과 함께 연기하면 감정이 잘 흘러간다.

선배들로부터 들은 조언 중에 마음에 유독 와 닿았던 조언이 있다면? 작품에 몰입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러다 자칫 역할에 집착하게 되면 스스로를 틀에 가둬버릴 수도 있다는 말. 작품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오히려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연기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도 중요하다. 독백하듯이 연기할 수 없지 않나. 지금보다 더 진한 감정을 연기하게 되면 그런 조언이 마음에 더 크게 와 닿을 것 같다.

영화 속 광해처럼 흔들리거나 위태로웠던 순간이 있었나? 어려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많은 응원을 받아서인지 그런 순간은 없었다. 사춘기도 별다를 게 없었다.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하고 힘들어할 때도 나는 운 좋게 안정적이었다. 가끔 뒤늦은 사춘기가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불안하진 않다.

늘 칭찬받는 배우였다. 그런 칭찬이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연기만큼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줄다리기 같은 긴장감은 필요한 것 같다. ‘잘해서 칭찬받고 싶다’라기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작품을 앞두고 목표는 늘 ‘살아보자’다. 그 역할로 후회 없이 잘 살아보자.

대학생 여진구의 모습이 궁금하다. 학교 다니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많이 기대했던 건 또래와 함께 하는 작업이었다. 또래끼리 아이디어도 내보고 거침없이 표현하며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 덕분에 연기에 대한 생각이 조금 변했다. 전에는 ‘이 역할은 이런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렇게 할 것 같아. 이 친구처럼 해볼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좀 더 부딪혀보고 싶어졌다. 물론 친구들과 연기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학교생활부터 다른 관심거리까지 친구들과 있으면 얘기할 게 많다.

배우 말고 인간 여진구가 꽂혔던 게 있나? 궁금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에 흠뻑 빠진다. 최근에 꽂힌 건 와인. 인터넷이나 책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마셔보기도 하며 공부했다. 요즘은 스페인 와인이 좋더라. 고기를 좋아해서 묵직한 느낌의 와인을 좋아한다. 고전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한다. 지인으로부터 유명 감독의 대표 작품을 하나씩 모아놓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책에 소개된 영화를 하나씩 찾아 보는 중이다. 책에 등장한 영화를 찾아 보고 나면 해당 페이지를 접는다. 모든 페이지를 접게 될 날을 기대하며.(웃음) 한동안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빠져 있기도 했다.

예정대로라면 올 하반기에 <1987>이 개봉한다. 이야기의 시발점인 ‘박종철 열사’를 연기했는데 사극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와는 또 달랐겠다. 기술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박종철 열사와 최대한 비슷해 보이도록 분장한 것이다. 가발부터 안경, 옷까지 고증하듯이 맞췄다. 특별 출연이긴 하지만 많이 조심스러웠다. 실존 인물이라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내가 그분의 삶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신 나이가 딱 지금 내 나이다. 촬영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이번에도 역시 선배들에게 많이 물었다.

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팬츠 발렌티노 바이 무이(Valentino by MUI).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가늠이 되는가? 대답하기가 조심스럽다. 어렵기도 하고.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거리로 나선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데 직접 살아본 시대가 아니어서 명쾌한 답을 내놓기 쉽지 않다.

<화이>에 이어 장준환 감독과는 두 번째 작업이다. 이번에도 기라성 같 은 선배들과 함께한 작업이기도 했고. 감독님과의 현장은 경험한 적이 있어서 편안했다. 선배들은 늘 나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열정을 잘 다룰 줄 안다. 나는 뜨거운 불을 만들어내기만 할 뿐 그 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데기도 하고 막막하다. 선배들처럼 자신의 열정을 냉철하게 조절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열정에 데는 건 뭔가? 내 열정과 작품의 타협점을 못 찾을 때가 있다. 작품 전체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연기를 하다 보면 시야가 점점 좁아질 때가 있거든. 열정에 데어 힘들 때도 선배나 감독님을 찾아가는데 내가 찾기 전에 먼저 물어봐주실 때도 많다. 아마도 옆에서 내 감정 상태가 다 보이는 모양이다.

주변의 많은 선배들처럼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어떤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나? 내가 지금 바라보는 선배의 바로 그 모습. 후배가 필요할 때 편하게 맞아주고 후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선배가 되고 싶다. 아직은 먼 미래 얘기겠지. 그런데 요즘 <다시 만난 세계> 촬영장에 가면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스태프들도 있다. 느낌이 색다르더라.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았다. 언젠가 다른 좋아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성격이 원래 뭐 하나를 오랫동안 못한다. 그런데 연기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변수도 워낙 많고 선배들도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말씀하신다. 나에겐 무궁무진한 세계다. 연기에 질릴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좋아하는 것들이 더 생길 것 같기는 하다. 전에는 오로지 연기 하나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해보고 싶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연기를 안 하면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들을 함께 좋아하면 되겠다 싶다.

하반기 <1987>이 개봉하기까지 쉬어가는 시간이 있겠다. 올해는 정말 마음껏 연기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고 쉴 생각에 또 기분이 좋다.(웃음) 몇 작품을 이어 하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삶을 대하는 방식도 그렇고. 온전한 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만난 세계> 촬영이 끝나면 여행을 많이 가려고 한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데 지구 정반대편인 남미나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남반구에 가서 완전히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 별다른 계획 없이, 여행 책 한 권만 있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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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송중기

버건디 벨벳 재킷, 버건디 캐시미어 터틀넥, 버건디 벨벳 팬츠 모두 에르메스(Hermes).
다크 그레이 체크 롱 코트, 브라운 니트 스웨터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화이트 러플 셔츠, 블랙 조거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블랙 캐시미어 롱 코트, 화이트 셔츠, 베이지 핸드 드로잉 팬츠, 네이비와 브라운 배색의 프린지 장식 슈즈 모두 버버리(Burberry).
블랙 브이넥 니트 스웨터, 그레이 체크 팬츠, 블랙 퍼 장식 로퍼 모두 프라다(Prada), 화이트 오버사이즈 셔츠 와이씨에이치(YCH).

어미를 잃은 강아지처럼 소녀의 손짓을 따르고 인간성 대신 야성을 몸에 걸친 늑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얼굴과는 어울리지만 야생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송중기는 지저분한 얼굴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눈빛으로 관객 앞에 섰다. 그리고 2017년 우리에게 어느새 익숙해진 군복을 입고 상처 가득한 얼굴로 총과 칼 혹은 촛불을 들고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사람들을 지키고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영’으로 돌아왔다. 제작 전부터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받아온 영화 <군함도>는 예상치 못한 논란과 비판의 한가운데에 들어섰지만, 실제 군함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춘천의 세트장에서 동고동락 한 감독과 배우들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를 넘나들며 꿋꿋이 관객을 만났다. 어쩌면 상업 영화로 만들기에 다소 예민한 소재의 영화를 차기작으로 고른 순간부터 논란 혹은 그로 인한 갖가지 위험 요소가 예상된 건지도 모른다. 흥행과 비평의 결과에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해 아쉬움도 크며 결국 모든 책임은 자신을 비롯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속상한 마음의 근원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함도>를 위해 보낸 모든 시간은 대견한 성장의 시간이었음은 확신한다. “인생의 큰 일을 앞두고 있어 더 진지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영화를 촬영했죠. 광화문 촛불집회가 있던 날 영화 속 촛불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고요. 좋은 선배들을 만나 영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주제로 토론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선배들과 교감하면서 제 더듬이가 넓어진 듯해요. 서른두 살에 이 영화를 찍었고 서른세 살이 됐는데 이제 시선을 좀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중심에 류승완 감독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있죠.”

브라운 롱 코트, 다크 그레이 브이넥 니트 스웨터, 네이비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화이트 셔츠 버버리(Burberry).
그레이 오버사이즈 재킷, 화이트 러플 셔츠, 다크 그린 벨벳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브라운 트렌치코트, 베이지 알파카와 실크 소재 싱글브레스트 수트, 러스트 색상의 알파카 캡, 오프화이트 하이킹 부츠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Ermenegildo Zegna Couture), 베이지 모헤어 니트 스웨터 올세인츠(All Saints).
그레이 무통 롱코트, 다크 그레이 화이트 라이닝 팬츠 모두 닐 바렛(Neil Barrett), 오프화이트 니트 스웨터 타임 옴므(Time Homme), 화이트 스니커즈 루이 비통(Louis Vuitton), 러스트 색상의 캡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Ermenegildo Zegna Couture).

<군함도>와 관련한 해외 프로모션까지 모두 마쳤겠다. 2주 전에 아시아지역 영화 프로모션이 끝났다. 요즘은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다.(웃음) 실은 개인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기억이 좋다. <늑대소년>의 첫 상영을 부산국제영화제 때 야외의 전당에서 했거든. 박보영, 유연석 배우와 함께 그곳에서 <늑대소년>을 처음으로 봤다. 좌석 수보다 두 배 정도 많은 관객이 찾아준 바람에 자리가 모자라 계단까지 꽉 찼다. 나도 계단에 앉아 봤다. 첫 상영이어서 엄청 떨리는 자리였는데 관객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상영이 끝나고 횟집에 가서 정말 기분 좋게 뒤풀이를 했다. 아쉽게도 공식 초청작이 아닌 데다 당시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어서 시간이 여의치 않아 레드카펫을 밟지는 못했다. 마리끌레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쉽지 않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무사히 잘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고, 영화배우 중에는 그래도 막내에 속하는 나라도 이렇게 나서면 더 많은 어른들이 동참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러고 보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배우들의 기억이 다들 좋다. 왜 영화제에 정치적인 이슈가 얽혀 문제가 됐는지 아쉽다. 어쨌거나 이 시기를 잘 지나 더 멋지게 나아가면 좋겠다.
<태양의 후예> 방영이 끝날 즈음 인터뷰를 했을 때 <군함도>를 위해 몸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크랭크인 전이었는데 배우들과 촬영장에서 함께 만들어갈 에너지가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며칠 전이었나? 어떤 분이 <군함도> 출연 배우들과 류승완 감독님의 사이가 틀어졌느냐고 물었다. 아마 개봉 후 많은 논란이 있었던 터라 그런 소문이 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개봉하고 더 친해졌다. 사흘 전에도 황정민 선배와 한잔했다. 풍파를 겪어서 그런지 진짜 끈끈해졌다. 무대인사를 다니며 더 진솔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촬영장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나눴다. 어쩌면 서로 좋은 ‘오지랖’을 펼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이니까. 혹시 영화에 대한 논란이 상처가 될까 봐 서로에게 더 애틋해진 것 같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촌스러움이 좋다는 말을 했다. 감독님이 제작발표회 때 나를 일컬어 ‘촌스럽다’고 평하셨다.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아니까 좋았다. 촬영장에서는 감독님이 나에게 우직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며 더 영악해져도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도 감독님이 촌스러워서 좋다. 감독님은 나보다 더 촌스럽다.(웃음) 인간적으로는 쓸데없는 감정의 허세가 없고 영화를 보면 앵글의 허세도 없으며 일부러 멋 부리지도 않는다.

개봉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 논란에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나 역시 진짜 속상했지만 일단 이런 상황에선 자기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더 잘했더라면 더 많은 관객이 인정해주었을 텐데.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도 사람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감독님은 요즘 계속 고전을 읽으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인데 종종 인상적인 문장을 보내주신다. 무대인사를 다니면서는 우리끼리 있을 때 농담도 더 많이 했는데 실은 다들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 내 새끼 같은 작품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드니깐. 솔직히 나는 흔들리지 않기 위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나마 찾은 방법이라면 <군함도>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 것이다. 관객 옆에서 반응을 보고 모니터링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그냥 계속 봤다. 몇 번이고 다시.

영화에 대한 논란 중에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뭘까? 그렇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겠냐마는, 모두 죽을 듯 살 듯 덤비다시피 작업한 작품이라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내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 평가를 정답과 오답으로 나눌 수도 없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뿌듯했던 순간도 있다. 마지막 무대인사를 간 곳이 춘천이었는데, 춘천은 <군함도> 촬영의 90% 이상이 이뤄진 곳으로 무대인사는 처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충분히 했어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극장을 찾아주신 관객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그렇지. 영화가 더 잘됐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군함도에 대해 많이 알릴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라는 얘기를 나눴다. 물론 상업 영화의 가치는 많은 관객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미라도 남긴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또 이런 순간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삼척에 놀러 갔는데 그때도 혼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감사하게도 내가 찾은 상영관이 꽉 차 있었다.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계속 ‘아이고, 아이고’하며 보시고 그 아주머니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에고, 나쁜 놈들’ 하며 보시더라. 신선하고 고마운 경험이었다. 영화란 게 분명한 산업이고 어떠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영화적인 여러 다양한 요소를 섞어야 하는 건데 많은 비난을 받으니까 영화라는 매체로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내년 이 맘때면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좀 더 정리가 되려나?

실은 영화의 흥행이 예상 밖으로 저조해서 이번 인터뷰에 더 나서지 않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거야 사실이니까.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끄러운 작품이 아니다. 열과 성을 다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아쉬움이 있을 뿐. 나는 이경영 선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경영 삼촌이 보내주신 문자를 캡처해뒀다. 그걸 자주 본다. 삼촌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연기를 하신 분이니까 주옥같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나는 아직 젊은 배우고 할 게 많으니 배우의 길을 길게 봐야 하지 않겠는가.

<늑대소년>의 소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보호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반면 ‘무영’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다. 결의 차이가 꽤 크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인데 이번 영화를 보시고 지금껏 내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공감한 역할이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 왜냐고 물었더니 ‘난 네가 활동하는 모습이 다 좋았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네 모습에 깊이 공감했어. 지금까지 네가 꽃미남이었다면 이제야 좀 연기를 더 하고 싶어 보였어. 그렇게 또 시작하면 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뭉클하더라. 길지 않은 영화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군함도>는 결이 많이 다르다. 앞으로 작품을 선택하는데 이번 영화가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소년’이 아니라 사람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리더’ 격이었으니 현장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을 것 같다. 뭐랄까. 선수 중의 선수들이 모인 현장이었다. 그분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끓어올랐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분들에 비해 경험이 턱없이 적은 나에게 그곳은 배움의 터였다. 그래서인지 현장에 가면 한결 진지해졌다. 촬영하러 가는 길이 학교에 가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하나 더 배우고 싶은 현장이었다.

송중기의 외모에서 상처투성이 ‘무영’의 얼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잘할 수 있고 잘 어울릴 것 같은 역할과 자신감에 비해 욕심을 부리고 싶은 역할 사이에서 어떤 걸 선택하는 편인가? 시나리오를 택할 때마다 늘 그 기로에 선다.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고 나에게 맞는 것을 되풀이할까, 아니면 새로운 것을 해볼까. 나는 그 선택을 색에 비교하곤 하는데 가령 내가 원래 가진 색이 파란색이면 빨간색으로 바로 가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해도 변화하고 싶은 욕심과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군함도>의 ‘무영’이 파란색이었다면 빨간색으로 가기 전에 초록색에 갔다가 노란색으로 가서 주황색, 그다음에 빨간색이 되어야 한다.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확 변해버리면 관객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빨간색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걸 해내고 싶다. 아직 그 고민의 답을 찾지는 못했다. 어떤 작품이 맞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래서 요즘 선배 배우들을 만나면 선배들 얘기를 많이 듣는다. 선배들은 어땠는지.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색으로 채우고 싶나? 빨주노초파남보보다는 후회 없는 선택으로 채우고 싶다. 작품의 흥망과 상관없이 이유가 확고하니 선택했을 것이고, 긴 세월이 지나 돌아봤을 때 ‘그래, 내 선택이 맞았어’라는 작품이 쌓여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 앞서 빨주노초파남보를 이야기했지만 그건 사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한 모습이다. 스스로의 만족도를 따진다면 선택에 후회 없는 작품을 많이 갖고 싶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을 수야 없겠지. 그래도 후회가 없다면 조금이나마 덜 아쉬울 것 같다.

지난 인터뷰에서 언젠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를 김민기의 ‘봉우리’에 빗대 말했다. 그 뒤로 나도 종종 ‘봉우리’를 듣는다. 가사를 되새기게 하는 곡이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지난번 인터뷰 내용을 캡처해 보내면서 취향이 왜 그리 나이 든 사람 같으냐고 놀렸다.(웃음) 어제도 ‘봉우리’를 들었다. 노래에 보면 ‘나는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거긴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그럼 또 다른 봉우리로’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인생의 모습과 잘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해질 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내 다음 봉우리는 무엇일까? 결혼이 될 수도 있겠다. 전에는 나는 배우니까 다음 봉우리는 당연히 어떤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봉우리가 굳이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올라가서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다. 아직은 다음 봉우리를 찾지 못했다. 내가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이 하나 먹으며 계속 걷는 중인 것은 맞다.

배우로 더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나?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해보고 싶다. 많은 선배들이 먼저 이뤄놓은 ‘한류’라는 공간 안에 나도 조금이라도 들어서게 되었으니 좀 더 확장해 다른 문화권의 현장도 경험하고 싶다. 가장 함께하고 싶은 감독님이 이안 감독님인데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많이 다르고 현장 분위기도 다를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대중은 송중기라는 배우가 정의롭고 바르길 기대한다. 그런 점이 부담도 될 테고 뭔가를 선택할 때 걸림돌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엄청. 그런 기대가 없으면 좋겠다.(웃음) 선택할 때 그런 시선이 장애가 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남들에게 보이는 직업이다 보니 당연히 신경 쓰인다. 부담도 크고. 내가 박보검에게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있다.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마라, 다 짐이 될 수 있다. 착하다는 이미지가 배우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제 보라색으로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할 수도, 주춤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뜨거웠던 20대를 지나 30대에 들어섰다.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세월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의 내가 더 기대되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다행인 건 불안보다 기대감이 더 크다는 거다. 당장 내년, 내후년보다는 30대 후반의 내가 어떤 역할로 어떤 무대 위에 서있을지 궁금하다. 어떻게 세월을 보내야 할지 찾고 있다. 요즘 문득 30대의 사춘기가 온 것 같다. 결혼하고 사춘기가 오면 안 되는데 어쩌지.(웃음)

당신의 전성기는 지났는가, 아니면 앞으로 올 것 같은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점을 찍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기준으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의 정점은 아직 찍지 못했다. 어느 시점에 정점이 왔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다만 그때가 온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 정점이란 정말 뭘까? 선배들과 술을 마시며 한번 얘기해봐야겠다.

지난 인터뷰 때와 같은 질문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지금의 송중기는 행복한가? 심하게 행복하다. 지난 작품을 생각하면 속상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 행복하고 뿌듯하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큰 결정을 한 시기이기에 행복하다. 그녀가 있어서 행복하고. 인생의 아주 행복한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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