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소설 우다영 작가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한 우다영 작가가 두 번째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출간했다. 이 세계를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무수한 우연의 집합으로 묘사해온 작가는 8편의 작품을 수록한 신간을 통해 다양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세밀히 엮어낸다. 서로 다른 세계가 교차하며 삶의 미로가 만들어지고, 문득 길을 걷고 있는 인물들 앞에 ‘영원의 순간’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밤의 징조와 연인들> 이후 약 2년 만에 새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출간했다. 책을 낸 경험이 있어 크게 설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신간이 나오니 기분이 참 좋았다. 표제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포함해 그동안 열심히 쓴 소설 8편을 담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소설집에 애정이 깊어 출간 후 책과 나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어떤 방법으로 책과 시간을 보냈나?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집필할 때 ‘마음껏 자유롭게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한 권으로 엮은 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나름 이해하게 됐다. 찬찬히 살펴보며 표지 디자이너 등 함께 만들어준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하나 찾아봤다.

표지를 보니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굉장히 알쏭달쏭하다. 등을 보이며 서있는 여성 앞에 행성의 여러 형태가 펼쳐져 있어 밤과 우주를 연상시키는 반면, 그가 들고 있는 거울엔 낮의 푸른 하늘이 비친다. 표지 위아래로 땅이 그려져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요소들이 표지에 겹겹이 쌓여 있는데, 이는 내가 소설집에서 쓴 화법과 유사하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쓰며 전작과 달리 주목한 점은 무언가? 평소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는 편이다. 인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가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해 인물에게 도착하는 방식을 따른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에는 ‘서로 다른 세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생명체에 비유하자면, 하나의 생명체가 대지에서 사라질 때 주변 환경과 사회 그리고 결국 개인의 삶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여러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도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무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여러 세계의 유기성과 인간에게 벌어지는 사건의 무작위성,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이번 작품들을 썼다.

전반적으로 인과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묘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표제작 ‘앨리스 앨리스하고 부르면’은 일곱 살 화자가 꿈속에서 노인이 되어 배를 타고 여름휴가를 보낼 작은 섬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해변을 포함해 호수와 수영장 등 물의 이미지가 소설집 곳곳에 자주 등장한다. 인간은 물이 흐르고 흘러 세계를 순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물은 대류 현상을 통해 이동하거나 비가 되어 대지 위에 내리기도 하고, 눈앞에 있는 바닷물이 언젠가 북극에 닿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소재라고 느꼈다. 물의 여러 형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다룬 해변은 ‘누군가 결국 도착하게 되는 곳’을 가리킨다. 세상의 모든 해변은 각각 다르지만 아주 닮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해변의 특성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다.

제목과 달리 소설에 앨리스라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쓴 소설의 제목을 이루는 요소들이 실제론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각 작품마다 제목을 붙인 까닭을 상상하며 읽으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의 화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마지막 장면은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오마주한 것이다. 원작의 주인공인 앨리스는 언니 곁에서 꿈을 꾸며 기나긴 모험을 한다. 내 소설 속 화자도 앨리스처럼 부모님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소녀다. 그는 꿈을 통해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해 노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걸 아직 모르는 채로 살아갈 준비를 하며 오래된 마법처럼 잠에서 깨어난다’라는 문장으로 작품이 마무리된다. 잠에서 깬 화자는 꿈에서 경험한 세계에서 벗어나 소녀의 삶이 있는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꿈을 매개로 다른 세계를 오가는 이야기에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

여러 세계의 존재 가능성은 그 외의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어떤 사건을 마주하고 인식하는 과정은 선별을 거쳐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식을 이어 붙여 ‘삶’이라고 말한다. 주관과 왜곡이 담긴 과정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나는 그 세계가 오히려 현실과 괴리된다고 본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소설에서 다루고 싶었다.

인물들이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징후를 자각하는 장면들도 돋보인다.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도 이 중 하나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신이 우연히 불행을 피하게 되는 등 삶의 경이를 느끼는 순간마다 옛 친구 ‘은령’을 떠올린다. 은령은 언제나 선한 행동을 한 인물로 ‘윤리적 결정을 하는 순간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을 깨달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화자에게 남긴다. 그는 ‘선’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반면 ‘창모’의 주인공인 ‘창모’는 중학교 운동장 철봉에 한 아이를 청테이프로 묶는 등 악한 행동을 한다. 왜 아이를 철봉에 묶었느냐는 화자의 질문에 창모는 “거슬려서 그랬다”고 답한다. 그는 타인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면 무조건 보복에 나선다. 겉으로만 봤을 때 은령과 창모는 양극단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면 두 사람에게서 비슷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은령과 창모가 닮았나? 과연 은령은 훌륭한 사람, 창모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단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선택과 행동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끊임없이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은령의 선택에 따라, 은령이 창모와 같은 삶을 살았거나 ‘선’을 고민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인간은 선택을 통해 삶의 미로 위에 각자의 경로를 그려나간다. 나는 미로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기보다 선택하며 길을 계속 걸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려지는 궤적이 결국 개인이 만들어낸 하나의 ‘균형’처럼 느껴진다. 더 나아가 넓은 시야로 바라본다면 인간뿐 아니라 세계 또한 놀라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 여러 세계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도 있다. ‘해변 미로’에서는 ‘아성’이 살아 있는 세계와 죽어 있는 세계가 번갈아 묘사되고, ‘사람이 사람을 도와야죠’는 세 개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택한 이유는 무언가? 두 작품은 ‘여러 세계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소설 형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계들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전부 연결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이야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각 세계를 선형적으로 펼쳐놓기보다는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했을 때 내가 독자에게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도와야죠’는 수록작의 제목이자 ‘해변 미로’에서 아성이 선물 받은 노래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작품 간 연결 고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작품끼리 유기적으로 연결할 때 소설과 소설집, 작가, 독자가 겹쳐지며 일종의 레이어가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여러 층을 쌓아가는 과정이 내 작품들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알아차리는 것은 인물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까? 인물들에게 어떤 징조가 있기 때문에 특정 상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 다다른 후에야 이전의 상황들이 재구성되며 ‘징조’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세계를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물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살아갈 것이다. 자각이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궁금하다. ‘메조와 근사’의 마지막 부분을 좋아한다. 화자는 사촌 동생이 남미의 한 음식점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예전에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 중이다”라고 했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남미와 동남아의 중간쯤 자리한 남태평양의 호수에 수백만 마리의 해파리가 산다는 내용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는데, 해파리 떼에 둘러싸인 다이버들은 자연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광경에 경이를 느낀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어떤 순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과관계 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라도,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찰나로 우리 안에 영원히 남아 있지 않을까?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이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나? 이번 소설집이 독자에게는 눈꺼풀 한 겹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처럼 느껴질 수 있다. 책에 담긴 작품들이 독자의 마음에 들어가 내 의도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존재한다면 좋겠다. 각자 새로운 세계에 집중하며 읽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