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로마테라피가 효능을 인정받으며 유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약용으로든, 식용으로든 허브를 사용하고 연구한 문화와 역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익숙한 라벤더, 로즈메리, 민트 같은 허브들 역시 구체적인 향과 효능보다는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몇몇 잘 알려진 종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허브는 어떤 향을 띠는지조차 상상이 되지 않는다. 파촐리 역시 이런 식물 중 하나.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 열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파촐리는 다년생 허브로 잎을 말려 수증기 증류법으로 향과 오일을 추출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음식에도 널리 애용하며 아로마테라피에 활용하면 항염, 항균, 특히 통증 완화 효능이 뛰어나고 해충을 쫓는 데도 도움이 된다. 파촐리 향은 한 가지만 맡으면 전체적으로 묵직하면서 흙냄새가 느껴지는데, 축축한 이끼에서 날 법한 향이 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약간 탄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후각만큼 예민한 감각은 없다. 사람마다 느끼는 향이 천차만별이고, 이를 표현하는 것 또한 제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앞서 묘사한 파촐리 향의 특성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파촐리 향을 맡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비 온 뒤에 나는 냄새라고 한다. 비 오는 날이면 느껴지는 자연의 향기가 있지 않은가! 향수 전문가들이 ‘모시하다(mossy)’고 표현하곤 하는데, 파촐리는 허브 중에서도 이런 느낌이 강하다. 이런 강렬한 향의 매력 때문에 파촐리는 수세기 동안 향수의 원료로 사랑받고 있다. 콕 집어 뭐라 말할 순 없지만 풋풋한 풀 냄새와 축축한 흙냄새를 담은 이 향은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조향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특히 파촐리 고유의 ‘흙 비린내’에 매료된 과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이 향을 연구해 동물이나 식물이 바위 틈에 묻혀 있다가 비를 만나면서 나오는 향을 화합물로 만들어 ‘페트리코(petrichor)’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파촐리는 이 페트리코 향보다는 허브 특유의 풍성하고 싸한 느낌이 더 강렬하다. 단일 향으로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고 다른 향을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에 단독으로 사용할 때보다는 우디, 플로럴, 프루티 계열 꽃과 과일의 향조와 어우러질 때 진가를 발휘한다. 달콤하고 가벼운 향보다 여운이 오래 남는 향을 좋아한다면 파촐리를 베이스 노트나 미들 노트에 사용한 향수가 알맞다. 마치 비 온 뒤 숲속이나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바람이 살랑 불어오면서 코끝을 스치는 장미 혹은 라일락 꽃 향기. 딱 이런 향기가 바로 파촐리 플로럴 계열 향수의 향이라고 할 수 있다. 파촐리를 담은 향수로는 파촐리에 각각 로즈, 재스민, 우드, 앰버를 더한 조합이 인상적이다. 특히 구딸 파리의 떼뉴 드 스와레 오드퍼퓸은 파촐리를 베이스 노트에 사용하면서 미들 노트에 아이리스, 로즈, 재스민 등 다양한 꽃을 더하고 톱 노트로는 블랙 커런트와 베르가모트를 사용해 처음 뿌리면 싱그러운 향이 난다. 마치 코스 요리의 애피타이저를 먹었을 때처럼 입 안에 군침이 돌면서 어쩐지 식욕이 도는 느낌이다. 하지만 매력적인 이브닝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은 깃털을 풍성하게 장식한 보랏빛 보틀에서 상상할 수 있듯 시간이 갈수록 관능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특히 아이리스의 파우더리하면서 짙은 플로럴 향을 지나 파촐리, 캐러멜, 머스크, 가죽 향의 베이스 노트에 이르는 잔향에서는 매우 관능적이면서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개인적으로 처음 떼뉴 드 스와레 오드퍼퓸의 향을 맡는 순간 수년 전 다녀온 출장지가 떠올랐다. 좀처럼 비가 오지 않던 파리의 여름날, 오전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파리 외곽으로 나가는 길이 차들로 몹시 막혔다. 어렵게 찾아간 파리 외곽의 한 샤토(고성).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향기가 떼뉴 드 스와레 오드퍼퓸의 향과 비슷했다. 이브닝드레스는 아니지만, 다리를 감싸는 롱 실크 스커트에 제법 높은 하이힐을 신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날은 샴페인을 마시지 않아도 꽤 많은 양을 마신 듯 달뜬 느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프랑스 출장은커녕 어떤 외유도 없었지만, 연말을 파티 없이 보내는 대신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새해맞이 홈 파티에 갈 때는 떼뉴 드 스와레 오드퍼퓸을 뿌려야겠다. 적당히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과 실키한 드레스 차림으로 스파클 퐁퐁 터지는 샴페인과 달콤한 크렘브륄레로 시작하는 코스를 마주하면 더욱 좋을 테지. ”

구딸 파리 떼뉴 드 스와레 오 드 퍼퓸. 50ml, 19만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