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을 여는 문장이다. 여러 차례 폭풍이 지나가도 백일홍은 붉은 꽃을 매달았다. 그 여름, 시인은 폭풍 한가운데 있었다. 절망은 붉은 꽃이 되어 피어 올랐고 폭풍이 불고 다시 불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넘어지기도 했지만 타고 오르고 매달리며 피어났다. 시인은 불을 뿜듯 나무와 꽃이 자란다고 적었다. 작은 마당이 핏빛 꽃 으로 가득 찰 때 시인의 절망은 비로소 끝이 났다.
<그 여름의 끝>. 여름이 시작될 때 한 번, 끝날 때 한 번 꺼내 읽는 시집이다. 처음은 대학 1학년 여름이었다. 빈 강의실에 앉아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동기 하나가 들어와 내 뒷자리에 앉았다. 강의실은 2층이었고 창밖에는 나무가 울창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수십 년을 그 자리에서 컸다는 플라타너스는 잎이 크고 무성했다. 잎이 무성해 창을 열어도 비가 들이치지 않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할 땐 흙냄새가 나더니 나중엔 초록 냄새가 났다. 비에 젖은 나무는 눈이 시큰할 만큼 초록색을 띠었다. 빗소리, 초록 냄새에 젖어 창을 바라보고 있는데 뒷자리 동기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달려 나갔다. 곧 수업이 시작될 텐데 걱정하며 돌아보았다. 달려 나간 그는 달려 들어왔다. 손에 시집 한 권이 들려 있었다. 1층 구내 서점에서 사 왔다고 했다. 뒷자리에 앉아 내게 시를 읽어주었다. 그 여름의 끝. 해마다 여름이면 읽는다고 했다.
백일홍. 6월쯤 피어 10월쯤 지는 꽃. 100일간 붉다고 해서 백일홍이라 한다. 여름 내내 피는 꽃이다. 꽃향기는 희미해 오히려 비 냄새가 떠오른다. 여름이 시작될 때 한 번, 끝날 때 한 번 시집을 꺼내 읽으며 기억 저편의 이 장면을 떠오른다. 비 냄새 나는 플라타너스의 초록. 해마다 보고 킁킁대는 여름의 향기, 여름의 장면.
최근 소설집을 읽다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 여름의 끝>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 여름의 끝>을 처음 만나던 날이 기억났다.
강화길의 소설 <화이트 호스>는 여성 서사를 담고있다. 여성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앓는 세상의 이야기. 2020 젊은 작가상 대상작인 <음복>은 제삿날을 배경으로 한다. 가족이 모인자리. 많은 것은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되었다. 망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 정우. 여자 주인공이 결혼하고 지내는 첫 제사였다. 제상 위에 뜬금없이 베트남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시부모님은 돌아가신 분이 좋아해서 올렸다고 했지만 제상을 물리고 보니 의문의 음식을 신나서 먹어 치우는 것은 남편 정우뿐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참석한 사람의 안부를 나누고 참석하지 않은 자의 안부를 묻는다. 정우가 평소 ‘좋은 사람’이라 말하던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여주인공은 알게 된다. 정우의 ‘좋은 사람’들에게 정우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자신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오지 않았다는 걸 정우는 몰랐다. 혼자만 좋아하는 베트남 음식이 난데없이 제상에 올라가도, 실은 자신을 먹이기 위해 준비했다는 걸 정우는 몰랐다. 자신만 먹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몰라도 되었다. 가부장제 아래 태어난 오직 하나의 아들이라면. 수많은 남성들의 ‘눈치없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다. 눈치 볼 필요가 그들에겐 없었다. 기색을 살필 줄 모르니 배려나 공감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태어났더니 많은 것이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심지어는 독점할 권리를 가진 자로 그들은 살아왔다.
강화길의 주인공이 특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독백때문이다.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느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거절당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솔직한 마음을 말해도 거부당할까 걱정하지 않는 사람. 한껏 보호받으며 성장하며 누군가를 미워할 필요가 없는, 억울할 것도 없는, 구김 없는 마음. 여성 서사 대부분에서 비난의대상이 되고야 말 남성상에 대해 강화길의 주인공은 ‘지금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음복>을 읽고 나면 <가원>인데, 역시나 여자 주인공은 남성을 사랑하고 있다. 이번에는 외할아버지다. 눈치 없고 자기만 아는 면에서는 음복의 남편과 닮아 있다.
<가원>은 고명한 서예가 석당의 집안 이야기다. 주인공은 치과를 개원하려고 준비 중인 연정이라는 여성이다. 석당의 아들 박윤보는 연정의 외할아버지다. 박윤보는 집안에 하나씩은 있는 문제적 존재다. 아버지 마음에도, 이름에도 어둠을 드리우는 존재로 성장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으나 현실감각은 생기지 않았다. 몽상가 곁에 생활력 강한 아내가 있었다. 연정의 외할머니는 화장품 외판원으로 살며 그악스럽게 돈을 모았다. ‘낮잠 한번 잔 적 없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아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근검은 물론 절약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고 자신에게는 물론 손녀에게도 엄격했다. 전교1등을 하고 돌아와도 기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지해’라고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없는 돈에 과외를 시키고 학원을 보내고 성적이 떨어지면 매섭게 몰아치며 성공한 여성이 되기를 강요했다.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는가. 석당은 세상을 떠나며 정원이 특히 아름다운 한옥을 한 채 남겼다. 이름을 가원이라 붙였다. 형제들은 직업이 없는 연정의 외조부에게 한옥 관리를 맡겼다. 연정은 할아버지와 가원에서 노닐었다. 할아버지가 담배 연기로 만들어주던 동그라미마저 특별하게 기억했다. 나란히 앉은 연정의 가방에서 영어 학원비를 훔쳐내는 할아버지였는데도 말이다. 할아버지는 죽기전까지 담배만 피웠다. 연정은 할아버지를 라일락 냄새로 기억했다. 라일락 담배를 그는 즐겨 피웠다. 갖은 종류의 무능과 비겁을 지닌 할아버지를 손녀 연정은 왜 좋아했을까. 생계를 책임지고, 학원비를 벌어오고 등록금을 대준 할머니는 싫어했으면서.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뒤 연정은 치과 의사가 되었다. 손녀가 자립하자 할머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펑펑 놀 거라고 하지만 휴식은 길지 않았다. 치매가 찾아왔다. 집을 나간 할머니를 찾아 연정은 도시 곳곳을 헤맸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이제는 주인이 바뀌고 폐허가 되어버린 가원이었다. 쑥대밭이 된 정원에 할머니가 서 있다. 추운 날인데 여름 원피스를 입고서. 할머니가 돌아가고 싶었던 때는 어떤 여름이었을까.
<가원>을 읽다가 <그 여름의 끝>을 떠올린 것은 오랜만에 동기를 만난 탓이다. 서점이 하나일 때는 자주 찾아와 좋은 밥을 사주더니 서점이 두 개가 되자 연락이 뜸했다. 식당 의자에 앉자마자 그는 야단치듯 말했다. “곱게 하나만 하지, 뭐 하러사서 고생을 하노?” 순간 그는 <음복>의 정우였고 나는 <가원>의 외조모가 되었다.
여름 한복판에 <그 여름의 끝>을 펼쳐 읽는다. 백일홍은 백 날을 두고 끈질기게 핀다. 개인적으로는 고되고 사회적으로도 혹독한 여름이지만 계속피겠다, 지지 않겠다 생각한다. 우리의 절망이 끝나는 날까지 꽃을 계속 피우고 가득 피워야지. 고운 꽃이라 보지 않고 끈질기게 피는 꽃이라 백일홍을 봐야지. 오가다 백일홍을 마주치면 멈춰 서야지. 희미해서 스쳤던 그 꽃의 향기를 맡아봐야지. 여름의 향기로 기억해야지. 백일홍 향기가 스칠 때마다 ‘그래도’ 피는 꽃으로 살아야지, 끄덕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