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더욱 핫해진 북촌을 거닐다 보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나무 문 앞에 세련된 브라운 컬러의 유리문을 더한 한옥을 만날 수 있다. ‘정규태, 정뽀리’라고 적힌 문패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북적이고 어수선한 외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빽빽한 대나무와 푸른 이끼, 그리고 통창 너머 보이는 깔끔하고 세련된 내부까지. 치유재의 모든 것은 정규태 실장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space_art_tae
정규태

미술을 전공한 뒤 작가로 활동하다
공간 솔루션 기업 글로우서울에서 미술팀
아트 디렉터로 근무하며 청수당과 온천집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년의 휴식 끝에, 이제 다시 재미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시작점에 섰다.


 

“침대 앞에 앉아 통창 너머로 푸른 정원과 하늘을 보고 있으면 참 행복한 기분이 들어요.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저와 뽀리의 이름을 낭송해주는 소리도 종종 들리죠. 그럴 때마다 기분이 묘해요.”
그의 이름과 함께 문패 한편을 당당하게 차지한 정뽀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반려견.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1년 전에 이사할 집을 구할 때부터 ‘어쩌면 열 네 살인 뽀리와 함께 머물 마지막 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뽀리와 함께 지내기에 부족함 없게 만들어졌지만, 사실 이 집이 처음부터 이렇게 아늑했던 것은 아니다. 한옥 지붕 사이로 보이는 사각형 하늘에 매료되어 이 집을 선택했는데, 중정 한쪽에 베란다 같은 실내 공간이 설치되어 있었고, 천장은 대부분 막혀 있었으며, 화장실은 외부에 있었다. 살면서 하나씩 고치자는 생각으로 한 달 뒤 바로 입주했지만 업무량이 급격히 늘며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넉 달 가량 인테리어는 손도 못 댄 채 지내다 더 이상 공사를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에 철거를 했는데, 이번엔 장기 출장을 떠나게 됐다. 고되고 불편한 일상이었지만 한편 집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겨울과 봄을 보내며 이 집과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지 몸소 체험했기에 더 만족스러운 공간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뽀리가 심장병을 앓고 있어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바로 일을 그만둔 그는 집을 채우고 뽀리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완성된 치유재는 뽀리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모든 생명체와 함께 정원을 공유하며, 안과 밖을 연결해 어디에서도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났다.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아요. 뽀리도, 저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최대한 편안한 곳, 무엇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게을러도 괜찮은 곳, 자연을 보며 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의도가 잘 구현되었는지, 저는 물론이고 햇볕 쬐기를 좋아하던 뽀리도 편안히 지낸 것 같아요. 친구들도 여기 오면 한없이 늘어진다고 말하더라고요.”

 

치유재가 유난히 아늑해 보이는 데에는 딱히 구분되지 않은 넓은 공간이 한몫한다. 거실, 침실, 서재 등 실용적인 이유로 공간을 구분하는 여느 집과 달리, 이곳은 최소한의 것만으로 채워 공간 활용이 자유롭다. 빈 곳에 큰 식탁을 두면 사람들이 왔을 때 편하게 식사할 수 있지만, 손님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니니 그 자리를 식탁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뽀리가 어디든 볼 수 있게,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 공간을 나누지 않고 최소한의 문만 남겨 모든 공간이 연결되도록 디자인했다. 그래서인지 대지 면적 30평, 전용면적 16평가량으로 결코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답답하거나 좁아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야외 정원과 그옆에 놓인 자쿠지다. 원래 이 집의 중정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지금은 정원이 된 곳 대부분을 장독대가 차지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걸 다 부수고 정원을 만든다고 주변 사람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모두가 실내 공간을 넓히지 못해 안달인데 왜 있는 실내 면적을 줄이는 거냐고. 반대쪽에 있던 베란다 역시 마찬가지. 그 공간을 통로로 활용하면 방이 하나 더 생길 수 있으니 없애지 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넓어진 야외 한쪽에 자쿠지를 놓는다는 말에는 몇 번이나 쓰겠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지금은 그 자쿠지 덕분에 더 낭만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즐기는 야외 목욕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보기엔 너무 예쁘지만, 사실 한옥살이가 녹록지는 않을 터. 불편한 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지내기 너무 좋다고 말한다. 단열 공사에 신경을 많이 쓴 만큼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생활할 수 있을 정도고,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해 습기에 취약하긴 하지만 제습기와 가습기를 적절히 활용하며 쾌적함을 유지하고 있다.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집을 돌보게 되어 애정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엔 힘들기만 하던 정원 가꾸기도 이제 익숙해져 낙엽을 줍고 이끼를 돌보며 행복을 느낀다. 이끼 관리 비법을 묻는 이들에겐 “매일 이끼와 인사를 나누세요”라고 답한다. 새와 나비가 놀러 오는 정원을 보며 그는 자연과 더욱 가까워진 기분을 느낀다.

 

“한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이사를 자주 다니느라 집에 추억을 쌓을 수 없었어요. 일정 기간 머무는 곳에 나를 맞춰 적응시키는 게 썩 내키지도 않았고요. 그러다 언젠가, 미니멀하게 살고 싶은 생각을 공간에 반영했는데, 실제로 삶이 간결해지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이제 공간에 맞춰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을 반영해 공간을 만들게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새로운 환경과 상황을 마주할 때, 그때의 나를 공간에 담아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갖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에 맞춰 집을 변화시킨다는 그는, 자신이 살게 될 집을 고르는 기준도 사뭇 남다르다. 인테리어, 공간 배치, 벽과 바닥의 소재 등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요소는 배제하고 특정한 뷰, 집의 위치,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긴 벽 하나 등 자신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 포인트를 최대한 부각하는 방향으로 공간을 꾸민다. 계속 변화하는 것이 즐거운 데다 직접 공간을 꾸밀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인테리어에 날개를 단 셈이다. 조만간 또 이사할 예정이라는 정규태 실장. 다가올 계절에, 그는 또 어떤 삶과 공간으로 자신을 채울지 사뭇 궁금해진다.

 

TIP

정규태 실장이 말하는, 한옥을 개조할 때 유념해야 할 점

1. 기둥과 서까래 상태 확인
목재가 주재료이다 보니 기둥과 서까래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당히 휘거나 기운 건 매력적인 요소가 될 수 있지만, 나무가 썩거나 많이 휘었다면 보수나 교체가 필요하다.

2. 침실 천장 공사
서까래는 한옥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지만 서까래에서 흙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침실 천장은 막기를 권한다.

3. 빛의 흐름 체크
한옥은 나무로 지은 만큼 빛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빛이 너무 많이 들면 집이 뒤틀리고, 너무 적게 들면 습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빛이 어떻게 움직이고 얼마나 들어오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