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몰종로상회 가락몰 유통인 영화마케팅 프로그래밍

영화인에서 유통인이 됐다고요. 15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몇 달 전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종로상회’에서 어머니를 사장으로 모시고 일하고 있어요. 거기서는 상인들을 총칭해서 유통인이라고 불러요.

이전의 커리어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요? 대학교 졸업 직후 웹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자연스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기획자가 됐고, 기획을 하다 보니 PM(마케팅부터 각종 프로그램 집행까지 제품 관련 모든 사항을 컨트롤하는 직책)이 됐어요. 그러다 아는 선배의 권유로 롯데제과 온라인 담당자로 들어갔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마케팅 일을 하게 된 거네요. 그때부터 온라인 마케팅을 했죠. 거기서 2년 반 정도 일했는데 늘 마감에 시달리며 힘들게 일하다가 정시 출퇴근하는 곳으로 오니까 자유 시간도 많고 나름 내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어요. 동시에 ‘슬슬 다른 것을 해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심심해서 뭘 할까 하다, 마케팅을 전공한 게 아니다 보니 제대로 배워봤으면 싶더군요. 학교는 학비가 비싸서 다른 곳을 찾아보다 ‘한겨레 문화학교’라는 곳을 알게 됐어요. 듣고 싶던 마케팅 분야는 이미 마감돼서 다른 것을 둘러보니 ‘영화 마케팅’이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온라인 마케팅이나 영화 마케팅이나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에 노느니 그걸 들어보기로 했죠. 수업이 끝나니까 배운 것을 써먹고 싶은 거예요. 그러다 극장 씨네큐브를 위탁 운영하는 ‘백두대간’이라는 회사에서 영화 온라인 마케팅 담당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어요. 주위에서 다들 말렸죠. 영화계는 박봉인데 연봉 깎여서 갈 거냐고요. 하지만 서른 초반이 넘은 당시의 삶이 좀 무료하기도 했고, 앞으로 쭉 무난하게 살게 되리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이때 아니면 언제 해봐?’라는 마음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연봉을 깎아서 백두대간으로 옮겼어요. 당시 대표님이 영화계에도 온라인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도입해보고 싶다며 제게 거는 기대가 컸어요. 홈페이지부터 정리하고, 배너도 달고 회원 가입을 적극 유치하니 효과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곧 영화 마케팅뿐 아니라 극장 마케팅도 하게 됐고, 그때부터 프로그래밍도 시작했죠.

어떤 걸 프로그래밍하는 거죠? 어떤 영화를 상영할지, 그 영화를 1관에 넣을지, 상영 회차는 몇 회로, 언제 넣을 것인지,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알릴 것인지. 이걸 혼자 다 했어요. 하다 보니 또 재밌더라고요. 잘되든 안 되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피드백이 바로 오니까요. 잘되면 ‘더 해야겠다’, 안 되면 ‘이게 안 됐으니 다른 걸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잘됐을 때는 성취감도 큰 직종이에요. 온라인 프로 모션을 많이 하다 보니 회원 수도 늘고 그만큼 관객 수도 늘었어요. 18만 명에 머물던 수가 21만 명까지 됐죠. 당시 임원과 직원 가리지 않고 모두 재밌게 일했어요. 그러다 아트하우스 모모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극심해 원형탈모가 왔어요. 더 하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아트하우스 모모 개관해놓고 그만뒀어요.

힘들었지만 재밌기에 최선을 다한 시간으로 읽히네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관객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서 제가 잘못했을 때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이미 씨네큐브는 개인의 소유물을 넘어 공공화된 장소예요.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통해 예술 영화를 알게 되고 추억도 쌓았죠. 씨네큐브가 지닌 가치를 잘 알고 있으니 대충 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최선을 다했어요. 내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죠. 그만두고 3~4개월을 편하게 놀다가 영화 배급회사에서 잠깐 일하던 와중에 씨네큐브를 새로운 회사인 티캐스트가 운영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백두대간에서 하던 일을 급하게 인수인계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 일이 제게까지 왔어요. 그래서 다시 가게 됐죠. 그렇게 씨네큐브에서 2009년부터 작년까지 일했으니 9년 동안 몸담았네요. 영화인으로서는 12년을 보냈고요.

물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퇴사를 마음먹은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퇴사 3년 전부터 스트레스가 극심했어요. 항상 좋은 관계에서만 일을 해왔는데 처음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온 거죠. 나름 꽤 긴 인생을 살아왔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스트레스였어요. 조금씩 퇴사를 생각하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쓰러지셨죠. 일을 치르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아버지는 건강하셨거든요. 나도 언젠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고 뭘 하는 게 삶에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보게 됐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찾으면서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 거죠. 그래서 퇴사했어요.

직장 생활 15년 차. 이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연차에 회사를 나오면 보통 무언가를 차리거나 만들죠. 전혀 관계가 없는 유통인의 삶을 떠올린 계기는 무엇인가요. 부모님이 30년 동안 같이 하시던 일이에요. 저도 어릴 때 바쁘면가게에 나가서 도와드리곤 했죠. 물건 나르고 상품을 예쁘게 진열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혼자는 하기 힘든데 오랫동안 해온 걸 쉽게 접을 수도 없었죠. 그래서 같이 하기로 했어요. 업으로 삼겠다는 큰 결심보다 한번 해보자는 느낌. 제 커리어의 모든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앞서 경험한 모든 것은 다음 업종으로 전환했을 때 큰 토대나 바탕이 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업무에 보탬이 된다는 거예요. 해당 분야의 베테랑은 가지고 있지 않은 저만의 장점이기도 하죠. 여기서 나는 초보지만 숙련 단계에 이르러 잘됐을 때 이전에 경험한 것들을 여기에 첨가하거나 그때의 시각을 활용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어요.

경험을 통해 습득한 믿음인 거죠. 극장에서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다들 어려워해요. 저는 이미 경험해봤기 때문에 프로그램이나 전산 하는 사람들의 언어로 문제를 볼 수 있고 훨씬 빨리 해결할 수 있었죠. 내 경험이 바탕이 된다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으로 퇴근 일기를 포스팅하고 있어요. ‘다르게 살아보려고요’라는 해시태그가 마음에 와닿더군요. 학교 다닐 때 모범생으로 항상 그 기준에 맞춰 살아왔어요. ‘나는 자유분방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공부만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이제까지 그렇게 살았으니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그렇게 살다가 나랑 안 맞으면 또 다르게 살아가도 좋고요. 처음엔 물론 ‘과연 내가 후회하지 않고 이걸 잘할 수 있을까?’ 했는데 3개월 동안 해보니 괜찮은 것 같아요. 지금은 수습 기간이거든요.(웃음)

가락몰에 청년들이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생각보다 많아요. 회사 그만두고 가업처럼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하는 자제분도 많고요. 물건 양이 많고 배달을 해야 하니까 젊은 친구들이 새벽부터 근면 성실하게 일하고 있어요. 열심히 해서 돈 벌면 가게를 사고 또 집을 사는 식이죠. 정말 땀의 현장이에요. 자기가 열심히 일한 만큼 받거든요. 회사에서는 내가 노력한 것보다 적게 받거나 조금 일하고도 많이 받을 때가 있는데 여기는 입력한 만큼 출력돼요. 팔면 와요. 되게 정직한 거죠. 부지런히 움직여서 같은 물건을 더 싸게 사오면 이익이 되는 거고. 명확하고 확실한 선이 있어요.

일과는 어때요? 저녁 7시에 출근해요. 채소마다 경매 시간이 다른데 파 경매는 7시에 시작해요. 산지에서 물건이 올라오면 경매를 해서 그 물건을 사는 거죠. 7시 30분에 가게에 물건이 들어오고 진열을 해요. 8시부터 파를 까기 시작해서 10시에 나가는 손님에게 보내고 10시부터 또 까요. 다음 날 깐 대파가 나가야 하거든요. 겨울이라 요즘엔 쪽파도 많고요. 12시부터 3시까지 손님이 제일 많아요. 한바탕 바쁜 게 끝나면 새벽 3시부터 4시 사이에 점심을 먹어요. 어머니는 오후까지 계시기 때문에 잠깐 눈 붙이고 그동안 제가 물건을 팔아요. 아침 7시쯤 마무리하고 가면 어머니가 정리를 하죠. 들어와서 일어나면 보통 오후 1시나 2시예요.

주 5일도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주 6일이죠. 농산물은 하루만 지나도 엄청 자라요. 그럼 상품성이 떨어지니까 바로바로 뽑아줘야 해요.

라이프스타일도 많이 변했을 것 같은데요. 너무 소란스러운 곳에서 살다가 고요한 세상으로 온 것 같아요. 우선 저녁에 일하니까 사람 만나기가 여의치 않죠. 그래서 친구들은 주로 토요일 저녁에 만나요. 하고 싶은 것은 토요일에 몰아서 하고 평일 오후에는 집에 있거나 영화 보러 가요. 남들이 안 하는 걸 평일에 할 수 있으니까 그럴 땐 기분이 좋아요. 지금은 조금 정리 중인데, 11월은 힘들었어요. 친한 친구도 많고 그들을 주로 저녁에 만났는데 어느 순간 다 끊긴거예요. 친구들은 내가 잘까 봐 오후에는 연락을 못하고 주말에는 그동안 못 만난 사람을 몰아서 만나니까 생각했던 것만큼 사람을 만나는 게 원활하지 않아서요. 날씨 예보에 민감해진 것도 생활의 변화 중 하나예요. 농산물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아주 추운 날에는 농부들도 일하기 싫겠죠. 그러면 3천 단이 들어오던 파가 1천5백 단으로 줄어요. 그럼 물건값이 오르죠. 비가 와도 마찬가지고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머니를 보며 배우고 있어요. 가격은 항상 평균에 맞추고 제품을 몽땅 팔지 않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조금은 남겨놓는 식으로요.

3개월 동안 일해보니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생각과는 다른가요? 앉아서 펜대만 굴리다가 직접적인 노동을 하는 이 생활이 좋아요. 파를 너무 까서 손가락이 두꺼워졌지만요.(웃음) 직접적인 노동이 들어가지 않으면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세계예요. 물건을 사오고 봉투에 넣어서 손님에게 주는 일련의 모든 행위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거예요. 회사를 그만두면 귀농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도 몸을 움직여서 일하는 삶에 대한 동경에서였어요. 원래 돈은 먹고살 수 있을 정도만 벌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밤낮이 바뀐 것 빼고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요.

본인이 오고 나서 가게에 생긴 변화가 있나요? 다른 가게는 이미 홈텍스, 전자 세금계산서를 쓰는데 우리 가게는 종이 장부를 쓰고 있었어요. 그 방식이 불편해서 떠난 손님들도 있죠.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포스 기계를 놓는거였어요.(웃음) 그리고 온라인으로 다양하게 판매할 수 있는 방법을 공부 중이에요. ‘대파 한 뿌리’ 같은 건 이미 많은 곳에서 하고 있어 다른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어요. 어머니 없이 혼자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모색 중이고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게 할 수 있는 곳이거든요. 지금은 파만 팔지만 다른 품목들을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다른 분들을 관찰하고 있어요. 저희 가게 앞에는 나물 가게가 있고 옆에는 우엉, 연근, 마를 파는 집이 있고, 쌈잎 쪽을 파는 분들도 있는데 각자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하는지 지켜봐요. 재밌어요, 신기하고.

직장 생활 5~6년 차에게는 이 이야기가 판타지처럼 들릴 수 있어요. 퇴사해도 이직을 생각한다든지 회사 밖에서는 답을 못 찾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가요? 제가 퇴사를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 전이라면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럼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계속 그 상태였다면 지금도 괴로워하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겠죠. 그런데 여기서 이 괴로움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명확해지더군요. 그런 생각이 안 들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요. 지금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만이 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해요. 내 인생이 중요하지, 회사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자신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사는 게 훗날 인생을 돌아 봤을 때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회사로 다시 돌아갈 일은 절대 없겠죠?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인턴 3개월 차라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데,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어떤 시간이 올지는 모르겠네요. 옳다고 생각하면 가는 편이라서.(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