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 나혜석, <꽃의 파리행> 중에서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않으면,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 있다 하면우리는 안심이오.” – 나혜석

 

구딸 파리의 창립자 아닉 구딸은 장미를 지극히 사랑했다. 완벽한 장미향수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향수 하나를 개발하는데 15년이나 열정을 쏟아붓기도 했고, 고급스러운 향을 내기 위해 동서양의 고귀한 장미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아침 이슬에 흠뻑 젖은 장미 정원의 신비함,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야생장미의 강인함까지 구딸 파리의 대표 향수들에는 다채로운 장미의 면면이 담겨 있다. 5월, 성년의 날이 되면 세상의 많은 스무살이 장미와 향수를 선물 받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과 장미.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오래 전 이스라엘에 빛나는 여성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자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흠뻑 사랑 받았다. 헴엘이라는 남자가 자이라를 흠모하여 거듭 구애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정합니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당히 말하는 자이라에게 햄엘은 분노했다.

머지않은 날 마을에 역병이 돌았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꾸 죽어나갔다. 거절 당해 자존심이 상했던 햄엘이 비열한 방식으로 복수를 시도했다. 자이라가 마녀라고 나쁜 소문을 냈다.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도 마을에 마녀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햄엘을 믿지 않았다. 자이라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전염병이 계속되는 것이 문제였다. 지쳐버린 사람들은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묻고 싶었다. 햄엘은 계속해서 자이라가 죽어야 전염병이 멈출 거라 외쳤다. 사람들은 흔들렸고 결국 마녀사랑이 결정됐다. 내가 죽어서 전염병이 멈춘다면 그 역시 좋은 일이라고 자이라는 생각했으므로 화형대에서도 평온할 수 있었다. 장작을 쌓고 불을 붙였지만 자이라에게는 불이 붙지 않았다. 불길은 이내 잦아 들었고 장작더미에 푸른 싹이 오르더니 꽃봉우리까지 맺혔다. 자이라를 둘러싸고 온통 장미였다. 사람들은 장미가 결백의 증거라 믿었다. 자이라는 자유를 찾았고, 나쁜 햄엘은 쫓겨났다. 사람들은 화형대에 핀 희고 빨간 장미를 자이라의 꽃이라 불렀다.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 리트커스 광장. 여성 노동자 1만 4천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다가 화재로 숨진 여성 동료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We want bread, but roses, too)’였다. 빵은 생존권, 장미는 참정권을 뜻한다. 당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월등히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 또한 갖지 못했다. 선거권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20년부터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온 사람들이 있다. 글 쓰고 그림 그리던 나혜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에는 유난히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많이 나왔다. 많은 서점에 여성학 코너가 확장되거나 신설되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페미니즘 특설 코너에 여성은 물론 남성들이 오래 머물렀다. 저녁 무렵 한 대학생 커플이 케이크와 장미를 들고 들어왔다.
“빵과 장미네요.”
“남자친구가 선물해줬어요. 페미니즘 책 좀 추천해주세요. 남자친구에게 줄 거예요.”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마침 서점에 우리 뿐이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스물 세 살이라던 여학생은 여성학에 대해 해박했다.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하게 됐어요?”
“저도 흥미가 있고요, 어머니가 이쪽에 관심이 많으세요. 만날 토론해요.“
“멋진 어머니다. 남학생은 어때요? 서점에 있다 보니 페미니즘 코너 앞에서 화내는 남성분들도 많던데. 남자친구랑도 자주 페미니즘에 대해서 얘기해요?”

남학생이 수줍게 대답했다.

“눈만 마주치면 얘기해요. 사실 처음엔 어려웠는데 지금은 저도 관심 많아요.”

두 사람은 책을 한 권씩 골라 서로에게 선물했다. 빵과 장미에 책을 보태야 여성의 날 선물이 완성된다했다. 신여성 관련 책이 주목 받던 시기였다. 나혜석의 책을 권했다.

<조선여성 첫 세계일주기>. 90년도 더 전에 한 여성이 부산에서 출발하여 파리까지 가서 닿았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미국까지 갔다. 20개월에 걸쳐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었지만 21세기 여성들은 나혜석의 여행기를 2년 전에야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 세계일주기가 나올 무렵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또다른 책이 나왔다. 최초의 근대 여성 문학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경희>라는 단편소설로 시작한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문장이 소설이 발표되던 1918년에는 전복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훌륭한 그림을 남겼고 부지런히 글도 썼지만 나혜석은 인정 받기는커녕 오히려 미움을 받았다. 기폭제가 된 것은 기성의 결혼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 <이혼 고백장>이었다. 이혼 이후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그림과 글을 놓지 않았지만 결국 무연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다. 단지 ‘여성도 사람이고,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찾아온 불행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70년이 되는 2018년이 되어서야 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신여성 도착하다>를 통해 나혜석의 그림을 주목했다. 70년이 지나서야 잊혀졌던 그녀의 글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쓰고 말하고 소리 내는 여성들에 대한 마녀사냥 속에서도 그녀의 글은, 그림은, 무엇보다도 그녀는 불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1년 뒤인 2019년. 나혜석의 여행기가 또다른 책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은 <꽃의 파리행>. 나혜석이 연재하던 여행기의 원제목을 가져다 썼다. 표지 역시 나혜석의 그림으로 채워졌다. 그녀가 떠난 자리, 그녀가 남긴 것들은 그렇게 꽃이 되었다.

나혜석이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정치적 참여도 활발히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나혜석은 여성참여단체를 조직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신문에도 부지런히 칼럼을 기고하여 여성이 사람으로서, 자신으로서 살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유럽여행 중에도 나혜석의 시선은 여성의 권리, 생존권,참정권을 향해 있었다. 사회 구조가 갖춰지지 않으면 여성이,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날 우리가 주고 받는 장미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