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애 재킷 블러썸(Blossom). 예수정 재킷 렉토(Recto), 이어링 일레 란느(Ille lan).

코트 렉토(Recto).

재킷 와이씨에이치(YCH), 이너 웨어 카이(KYE).

69세의 ‘효정’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 후 증거를 챙겨 경찰에 신고하지만, 모두가 효정을 치매 환자로 의심할 뿐이다. 법원 역시 노인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여기고 젊은 남자가 그런 일을 저지를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하지만 영화 <69세>는 단순히 노인 여성의 성폭력 사건에만 무게를 두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노년의 삶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더 나아가 노년 세대에 갖는 사회의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바로 서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에서 구원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효정은 어둠뿐인 현실에서도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고발문을 손에 쥔 채 부당함에 맞서 싸운다. 계단을 모두 오른 뒤에 그곳에 빛이 있을지 다시 어둠이 내려앉을지 모르지만 주저하지 않고 그저 나아갈 뿐이다. 이러한 주체적인 여성 효정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배우 예수정이 연기했다. 그의 담담하고 힘 있는 연기와 오랜 시간 동안 스토리보드 작가로 활동하며 장편영화를 준비해온 임선애 감독의 열정이 만나 영화 <69세>가 완성됐다. 이들이 빚어낸 시너지가 없다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영화 <69세>가 8월 말 개봉했습니다. 임선애 감독님은 첫 장편 데뷔작에서 ‘노인’과 ‘여성’, 성폭력’이라는 소재를 다루게 된 계기가 있나요? 임선애 감독(이하 임) 2013년에 우연히 노인 성폭력 칼럼을 읽은 뒤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쭉 써온 건 아니고,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게 됐죠. 가장 중점에 둔 것은 하나의 개별적 사건을 재현하는 사건 중심의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한 사람의 불행을 영화로 만든다는 건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이건 나와 별개의 먼 이야기인가?’ 하는 점을 고민해봤는데 그건 또 아니었어요. 주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모두가 크고 작게 성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다들 여전히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어쩌면 모두가 ‘예비 피해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내가 만약 69세에 효정과 같은 일을 당한다면? 지금의 제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이 느낄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나와 가까운 이야기가 아닐까 해서 용기를 냈죠.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어요. 유럽에는 장년층 여성 배우가 포스터에 나오는 작품이 많잖아요. 이자벨 위페르, 샬롯 램플링,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런 작품이 많이 없을까 아쉬웠어요.

<69세>는 단단함에서 비롯되는 예수정 배우님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른 배우가 효정을 연기하는 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요. 선생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아무래도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어요.(웃음) 그건 너무 겸손한 말씀이고요. 사실 비슷한 선생님 연배의 배우들을 보면 작품에서 메인 인물인 것 같지만 서브 역할로 그려지거나,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 역할로 등장해 모성애만 강조되는 일이 많잖아요. 아, 당연히 그건 배우님들 잘못은 아니고요.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여성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녀들의 방>이나 <행복의 나라> 같은 영화나 여러 드라마에서도 신스틸러 역할을 하셨고요. 분명히 선생님의 스펙트럼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69세>는 60대 여성이 주인공이고, 지금까지 한 적 없던 이야기이니 뭔가 막연히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실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예수정 배우(이하 예) 역시 예상대로 움직였군.(웃음) 하하. ‘69세’를 제목으로 쓴 얘는 누구야?’ 하면서 궁금해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을 뵙기로 하고 마냥 좋아서 신나게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 컨펌을 당했죠.(웃음) 그런데 그게 너무 좋고 다행이었어요. 처음부터 예수정 선생님과 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뤄진 셈이에요. 아주 순조롭게 기주봉 선생님까지 함께했고.(웃음) 그러니까요. 저는 운이 아주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님과 대화하며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변했나요? 40대인 감독님이 바라본 효정과 배우님이 생각한 효정은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효정이 취하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은 같았어요. 대신 결말과 60대 여성을 그리는 디테일한 표현들이 달라졌죠. 영화 안의 효정은 다림질을 하는 등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그런 일을 당해도 일상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죠. 19세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당장 세상이 무너진 듯 누워만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69세인 효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 몸으로 체험한 사람으로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다못해 마늘이라도 까고 있어야지.

이야기의 결말은 처음과 어떻게 달라졌나요? 선생님을 만나기 이전에 이 이야기의 중심은 가해자가 감옥에서 5년을 살든, 10년을 살든 어떤 처벌을 받아도 피해자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여기에 방점을 둔 훨씬 우울한 결말을 그렸죠. 그런데 저 역시 이 이야기 자체가 성폭력 문제로만 비쳐지길 원치 않았어요. 오히려 지양했죠. 그리고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효정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느꼈을 감정이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69세의 효정은 당장 어딘가에 숨고 싶고 수치심이 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을 거예요. 약하다고 함부로 대하는 세상의 무례함에 대해서요. 이 말씀을 듣고 제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성폭력도 결국 폭력의 범주 안에 들고 ‘이중호’(김준경)는 약한 노인 여성을 무력으로 제압한 거잖아요. 성폭력이라는 이슈로 이야기의 문을 열긴 했지만, 여기에서 더 확장해 꼭 여성뿐 아니라 이 사회가 노년 세대에 갖는 사회적 편견이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결말을 수정해 보여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어유, 되게 느낌 있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 덕에 이야기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영화는 새카만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보통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는 자극적이고 불필요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반면 <69세>에서는 오직 절제된 어둠과 소리로만 표현되죠. 저 역시 비슷하게 느껴왔어요. 우리는 기사로 사건을 접하고 실제 그 상황은 알 수 없는데 굳이 ‘이랬을 것이다’ 하고 재연할 필요가 있을까? 왜 영화마다 그 불편한 과정을 답습하는 걸까? 하고요. 그래서 완전히 새카만 화면을 넣었는데 ‘보여주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어요. 저도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성폭력의 공포를 느낀 적이 있어요. 그게 갑자기 어디서 날아온 돌 같은 게 아니라 그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밑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불안감이었죠. 그런 순간에는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고립된 느낌, 마치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걸 관객들도 체험해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상상력이 풍부해지니까 연출적인 도전이기도 했어요. 관객이 2분 30초가량의 검은 화면을 견디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영화를 보기 전 눈물을 쏟아낼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히려 담담히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어둠으로 시작해 빛으로 끝나는 영화’라 말하더군요. 냉소적이고 담담한 영화를 좋아해서 자연스레 저도 그런 영화를 만들게 된 것 같아요. 선생님을 만나서 조금 더 깔끔히 조각된 느낌이 있죠.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69년을 살아왔으니 이미 삶의 웅덩이가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고난을 당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안에서 효정의 과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 인물이 평생 지고 온 사연이 있을 거라는 걸 염두에 뒀죠. ‘성폭력을 당하고도 효정은 왜 이렇게 덤덤해 보일까’ 하는 의문은 그런 지점에서 풀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담담하다고 해서 분노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사회에 대한 불편, 그리고 피곤을 느꼈을 거예요. 그러다 결정적으로 이런 일까지 당하게 됐고 지금까지 참아온 관성 때문에 시원스레 반응하지는 않지만, 신고 이후 주변 사람들이 효정에게 보이는 무례함에 대응하기 시작해요. “조심하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주변사람에게 “뭘 어떻게 조심하냐”고 매섭게 말하죠. 감독님이 참 잘 넣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는데, 수영장에서 어떤 어린이가 물속에서 효정의 다리를 치고 가잖아요. 그때 감정을 참고 누르기도 전에 본능처럼 소리를 작게 내질러요. 반응하기 시작한 거예요.

코트 렉토(Recto), 앵클부츠 아쉬(Ash), 이어링 일레 란느(Ille lan).

임선애 코트 제인송(Jain Song), 슈즈 아쉬(Ash),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예수정 코트 렉토(Recto), 원피스 자라(ZARA), 슈즈 아쉬(Ash).

효정은 그동안 대중매체에서 다뤄온 노년 세대와 다르게 비칩니다. ‘노년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에요. 효정은 오래 우울증을 앓았지만 약에 의존하지 않고 운동을 하며 극복하려고 해요. 지금도 꾸준히 수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당연하게 “신고해야겠어요” 하고 말하죠. 효정은 어쩌면 애초부터 주체적으로 자기 정돈을 잘하는 사람일 거예요. 그런 유전인자를 가진 인물이요. 그런데 영화 속 어떤 사건들로 인해 선생님 말씀대로 반응하기 시작하는 거죠. ‘69세의 효정이 현실에도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것, 노년의 여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타자화해버리는 것, 주체적인 인격체임에도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영화적으로 느껴진다는 반응 자체가 오히려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해요.

함께 사는 효정과 동인의 관계도 새롭습니다. 각방을 쓰고 각자 자신이 쓸 물건을 구입하죠. 따뜻하면서도 독립적인 관계입니다. 인물을 설정할 때 특별히 고려한 점이 있나요? 막연히 다른 인생을 살다가 같은 집에 살게 되면 마치 그게 정상인 것처럼 사실혼 관계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효정과 동인은 기존 남녀 관계의 궤도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결혼한 지 6년 넘었는데 남편과 화장실을 따로 쓰거든요. 좋아하는 취향도 다르고요. 그런데 69년을 따로 산 사람들이 한 공간에 살면 어떨까요? 이런 부분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세상이 바뀌고 삶의 방식도 달라지고 있잖아요.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이 특정 연령층, 즉 노년층을 비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에게 작용하는 것이죠.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하니 그 다양한 삶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어요. 여태껏 있던 삶을 선택하면 나중에 결론을 낼 때도 뭔가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다른 방향을 보여주면 결과도 무궁무진하게 열릴 거라고 생각했죠.

막연히 효정을 돕는 건 ‘여성 조력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더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의외의 조력자, 동인이 등장하죠. 그게 세대가 바뀌었다는 증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세대는 남성, 여성을 나누지 않았어요. 언제부턴가 성별이 양극화되고 마치 격전지처럼 다툼이 일어났죠. 제게는 여성의 일은 여성이 도울 거란 전제가 빠져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가진이라면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성별에 상관없이 도움을 주겠죠. 질문하신 것처럼 조력자에 대한 주위의 의견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노년 세대의 동거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어떤 결과를 내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동인이 조력자로서 비현실적인 남성이 아니냐, 너무 로맨티시스트다, 이런 반응도 있었는데, 저는 그의 다른 면모들이 영화에 녹아져 있다고 생각해요. 겉으로 보기엔 따뜻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분명 실수와 오류를 범해요. 효정보다 먼저 이중호를 만나거나, 친아들 ‘현수’(김태훈)의 말에 따르면 이전 가정에서는 가부장적인 남성의 면모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고요. 어쩌면 스스로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효정의 사건을 통해 자신이 쓸모없고, 무가치한 인물이었다고 한 번쯤은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효정에게,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죠. 저는 그 순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품의 주제와 맞닿아 있고요.

촬영 현장에서는 두 분이 어떤 말을 가장 많이 나누셨어요? 주로 “쳐내죠”라고 말했죠. “감독님, 이 대사 다 해야 돼요?”라든가.(웃음) 임 “60대는 그렇게 말 길게 안 해요.” 이러시면서.(웃음) 선생님 대본이 늘 너덜너덜했어요. 촬영을 하면서 대사를 줄이고 바꾸셨거든요. 그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고요. 우리 감독님이 워낙 따뜻한 사람이라 남이 잘 알아듣게 설명해주려고 해요. 저는 “못 알아들어도 되니까 이 말만 하고 지나가자” 하고요. 예수정이라는 배우가 고치는 게 아니라 ‘효정이라는 사람이 이럴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예를 들어, ‘간호조무사’가 정확한 명칭인데 69세의 효정은 그냥 ‘병원조무사’라고 할 것 같다든지 하는 디테일에서요. 저희는 어떤 부분에서 정확성에 대한 강박이 있을 때가 있잖아요.(웃음) 선생님은 각자 쓰는 언어의 색에 대해서도 고민하신 거죠.

효정을 연기를 하면서 가슴에 남은 대사가 있으신가요?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이건 이중호라는 젊은이에게 분노에 차 건네는 말이지만, 인생이 쉽게 끝나지 않다는 걸 잘 안다는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이 한마디에 과거와 연결된 많은 아픔과 회한이 담겨 있죠.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효정의 ‘강함’을 보여주는 대사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효정을 연기한 배우님이 생각하는 여성의 ‘강함’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여성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존재예요. 설사 앞으로 아이를 낳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몸에 대해 다들 생각해봤을 거예요. 자기 존재 자체의 신비함을 믿는 힘이 있는 거죠. ‘나는 개처럼 살 거야’(극에서 효정은 이중호에게 “너 진짜 개구나”라고 말하
며 분노한다)라는 마음이 쉽게 들지 않아요. 생명을 낳다는 것 자체가 우주의 기본에 가까이 닿아 있고, 그런점에서 오는 단단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69세>라는 작품을 통과하면서 실제 삶에 변화한 지점이 있을까요? 무언가 갑자기 변화하진 않겠죠. 다만 외면하는 게 아니라 죄책감을 갖고 뉘우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예 개선은 없어요.(웃음) 그런데 가끔 <69세>의 그 장면이 떠올라요. 어두운 층계를 한 발한 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이요. 문을 열고 나가면 빛이 있을지 어둠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내가 진짜 원하는 행동을 한 후에 숨이 잘 쉬어질지, 아니면 더 답답해질지 모르는 상태의 어둠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효정의 단단한 삶의 태도. 그걸 마음에 담아뒀죠.

배우님께서는 어떤 캐릭터에 끌리시나요? 작품을 선택하는 신념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좀 더 큰 범위에서 예를 들어볼게요. 나는 사람이 자신답게 살아온 것처럼 죽을 때도 그렇게 죽기 위해서 안락사를 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거죠. 그런데 내가 할 작품에서 안락사를 종교적 혹은 윤리적으로 사악한 짓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이건 열어놓고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할 것 같아요. 안락사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의 관점으로 보지 말자고요. 삶의 마지막을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바보 같은 방법에 맡기지 않고 자연에 순응할 수도 있잖아요. 이렇게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작품이 나아갈 방향이 합의되면 작업하는 편이에요. 연기 자체보다는 작품에 관심이 많아요. 임 저는 그 부분에 굉장히 놀랐어요. 그냥 선생님께서 영화 제작을 하시면 안 돼요?(웃음) 좋은 이야기들을 끌어와서요.

요즘 여성 배우와 여성 감독의 시너지가 눈에 띕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그동안 하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다룬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느끼시나요? 다양한 인물을 다루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일단은 작가가 창조해야 하거든요. 비슷한 소재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건 왜 신선하지? 왜 다르지?’ 하고 느낀 작품에서 여성 배우와 감독 그리고 여성 스태프들의 시너지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저는 지금의 독립영화계가 아주 풍족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작품이니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수단이 많거든요.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양하고요. 그런데 상업 영화계는 아직도 기회가 적죠. 투자사도 따로 있고요. 우스갯 소리로 “아직도 여성 감독을 못 믿어요? 그냥 좀 갖다 써보세요. 그렇게 불안하지 않아요. 그리고 촬영감독이 현장에서 힘 쓰는 줄 아는데,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힘 안 써요”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조금 더 믿어주면 좋겠어요. 물론 이런 말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와야지 왜 성별을 나누냐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캐릭터 면에서는 다양해지고 있지만, 저는 심지어 포스터도 다 비슷해 보일 때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여성이라고 해서 다 여성 서사만 하는 건 아니니까 다양한 시도와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관객도 이미 좀 지루해하는 것 같아요. 종종 한국 영화를 폄하하기도 하잖아요.

두 분 모두 오랜 시간 현장에서 일해오셨어요. 롤모델로 삼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일하기 전에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만 보이네요. 찾는 자에게만 오아시스가 나타나죠. 나를 숨 쉬게 하는 무언가를 아직도 찾는 중인가 봐요. 사막 한가운데서 나와 함께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 믿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후배들이 날 편히 생각하고 친구처럼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저도 제가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어떤 분야에 오래 몸담은 분들을 보면 이제는 그 길밖에 갈 수 없어서 쭉 왔다고 하시는데, 물론 그 말도 맞지만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유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번 장편으로 데뷔했지만 그 가까이 어딘가에서 오아시스든, 햇빛이든 계속 무언가를 향해 걸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개미 걸음의 속도지만.(웃음) 지금도 시나리오를 쓸 때면 여전히 막막해요. 누가 이런 이야기를 봐줄까, 누가 투자해줄까, 하고요. <69세>는 특히 더 그랬어요.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길을 갔고, 그가 먼저 던져놓은 조약돌이 반짝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면서 완전히 막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걸어온 길이 꼭 영리한 길이 아니더라도 이걸 누군가는 조약돌처럼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오히려 선배가 후배를 상당히 의지한답니다.(웃음) <69세>를 찍을 때도 아주 잠깐 출연하는 역할 하나를 함께하려고 온 후배들을 많이 만났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동지예요, 동지. 맞아요. 이 말 인터뷰 기사에 꼭 써주세요.(웃음) 적은 돈을 받으면서도 이 영화를 돕겠다고 와준 스태프들이 있고, 이제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친구들인데도 어떻게 제 소식을 알고 응원해줬어요. 아직 현장에 살아남아 있는 동료들도 마찬가지고요.

어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박남옥상을 수상한 일 역시 일종의 응원으로 느껴졌을 것 같아요. 박남옥 감독님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시죠. 누군가 앞장서서 한 발을 내딛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인데, 그 분 덕분에 이후 많은 여성 감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감독님의 이름이 붙은 상을 받는다는 건 무척 뜻깊더라고요. 여기서 좀 더 오래 버텨야겠다, 지금은 그 생각뿐이에요. 게다가 아무도 이 시나리오에 관심이 없을 때 처음으로 도전해보라고 상금을 준 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예요. 부모님이 딸에게 서울 가서 성공하라고 종잣돈을 조금 쥐여줬는데, 그 딸이 성공해서 금의환향한 기분이었죠.(웃음)

해외 영화제의 초청 소식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런 반가운 소식을 들으면 보상받는 기분이 드시나요?(웃음) 비행기를 타고 직접 가서 선생님과 영화제도 즐기고 커피도 마시고 벼룩시장도 구경했다면 더 실감이 났을 텐데.(웃음) 그래도 효정은 어딘가에 가 있구나 생각하죠. 관객이 적을 뿐 어쨌든 극장에서 상영은 되니까요. 세계적으로도 그동안 노인 여성의 성폭력을 다룬 이야기가 없었는데, 해외에서도 같은 걸 느끼고 공감해주신다는 게 기분 좋았어요.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을 조명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루는 작품이라고요. 코로나19 때문에 공간적으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이 작품을 보고 싶어 하고 공감해준다는 게 한편으로는 굉장한 의미가 있어요. 예를 들어 과거에 어느 시인의 작품이 나오면 같은 주제의 작품이 남미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났었다고 후에 발견하곤 하잖아요. 그게 바로 ‘현상’이에요. 지금 세대의 특징이 되는 거죠. 참 신기해요. 인간이 어떤 시점에 인간의 존엄 등에 관심을 갖고 한 가지 현상을 중심으로 모인다는게.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참 괜찮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감독님의 차기작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다음 작품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일 것 같아요. 사회에서 실격당한 두 여성이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는 이야기죠. 음, 다른 이야기에도 기웃거리고 있긴 한데…. 일단은 이이야기를 빨리 털어내고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