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닮았는가 SF 소설 김보영 작가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 인간세계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 소설가 문목하는 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수식어의 주인인 김보영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중 한 명으로, 2000년대 이후 신진 SF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그가 최근 10년간 쓴 여러 단편을 묶어 소설집을 발간했다. <얼마나 닮았는가>는 혐오와 조롱의 시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여성과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현실의 모순에 대해 따끔히 꼬집는다. 매일을 치고받으며 살아가지만 ‘타인이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 할 때 결국 우리는 조금씩 변화할 것이라 말한다. “인간은 존재하기에 아름답고, 존재하기에 가치 있죠. 인간이 단지 존재만으로 존엄한 세상을 꿈꿔요. 아주 이상적이죠. 그래서 SF를 쓰나 봐요.” 서글픈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하게 되는 인간과 우주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가 꿈꾸는 세계에 대하여.

 

10년간 쓴 글을 묶어 소설집 <얼마나 닮았는가>를 출간했다. 오래전에 쓴 이야기도 있지만 여전히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사실 단편집을 서둘러 낼 생각이 없었다. 몇몇 작품이 실린 앤솔러지에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겠지 싶었다.(웃음) ‘ 0과 1 사이’는 2009년작이라 가장 오래된 작품인데, 독자들이 갈수록 더욱 현재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아마도 사회가 여전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얼핏 보면 SF는 아주 먼 상상 속 미래를 다룰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에 없는 이들이 현실의 모순에 대해 말하는 장르다. 현실을 떠난 작품을 만들기가 훨씬 더 어렵다. 실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작가도 현재 에 살고 있고 독자도 현재에 살고 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나 조지 오웰의 <1984>가 상상 속 미래를 그린 작품처럼 보이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당대의 암울한 현실을 말하기 위해 가져온 공간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져온 공간일 테고.

소설집에 담긴 단편들은 각각 세밀히 짜인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한 가지만 바꾼 다. 그래야 소설의 주제도 명확해진다. 깊이 생각하면 그 한 가지가 거의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인터넷이 생겼을 때,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 사회 구조에서부터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변화했다. 만약 세상에 초인이 많이 존재한다면, 교육제도와 입시제도도 달라질 것이고, 직장에 초인 특별 전형이 있거나 차별이 생길 것이고, 초인에게 의지하는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가치관까지 변하겠지.

SF 속 세계관은 전문 과학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번 소설집에는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 합성 신체, 인공지능 등이 등장한다.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을 소재로 쓴 ‘엄마는 초능력이 있어’는 그 기술을 보유한 연구소에서 의뢰한 것이라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그 외에는 모두 SF에서 흔한 소재다. 만약 소재에 대해 모르는 점이 있으면 중고 서점에서 이를 키워드로 검색한다. 그리고 검색되는 책을 가리지 않고 다 산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무엇을 찾거나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맞는 책을 사서 볼 수 있다. 전혀 모르는 분야인 경우에는 아동 서적을 보는데,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으면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한 것을 소설에 직접적으로 쓸 일은 많지 않다. 단지 틀린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공부하는 것뿐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빨간 두건 아가씨’와 ‘얼마나 닮았는가’였다.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최근 여성 작가가 쓴 SF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은 태초부터 여성의 이야기를 했다. 남자 이야기만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쓴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말하기를, 여성은 늘 남성보다 예술을 사랑했고 재능도 있지만 예술이 금지되었기에, 그들은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고 아무도 보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노래했다고 한다. 어느 시기에는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폄하당하고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여성이 쓴 소설이나 만화를 하나도 보지 않는 평론가가 ‘여자들이 쓴 소설이나 만화는 사랑 이야기만 하고…’ 같은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건 안 그러네요’ 하면서. ‘그런데 안 그런 작품’이 그렇게 많으면 좀 안 그런 줄 알았으면 좋겠다.(웃음) 지금은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고 칭찬해주고, 좋아해주고, 언론에서 의미 있게 다뤄주기도 한다. 그게 변화일 테지.

‘빨간 두건 아가씨’는 ‘합성 신체’를 소재로 한다. 인류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몸을 갈아탄 세상에서 빨간 두건 아가씨는 용기를 내 거리로 나선다. 그러면 ‘집 안에 숨어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서로를 보면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그렇게 거리가 여자로 넘쳐나면 나는 자연스러울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여성 연대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메시지는 생겨난 것이다. 사실 ‘빨간 두건 아가씨’는 이틀 만에 완성한 소설이라 그리 깊이 생각하고 쓴 건 아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떻게 해도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화장을 하면 이상한 여자가 되고, 화장을 안 하면 이상한 여자가 되고, 뭘 못하면 이상한 여자가 되고 잘하면 이상한 여자가 된다. 무엇을 해서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단지 타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상함을 부여받는 것인데, 늘 ‘무엇인가를 하면’ 그 타자성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는 거짓말을 듣고 평생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상상할 수 없지만, 내가 처음 SF를 쓸 때엔 ‘여자가?’ 하는 반응을 종종 들었다. 그때마다 참 웃겼다. ‘SF를 쓰는 사람이 지금 한국에 없는데 내가 여자인 게 이상해? 인간의 반이 여자인데 여자인 게 이상해?’ 하고 생각하면서. 당선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가 ‘보통 남자가 SF를 쓰는데, 어쩌다 여자가…’라는 말을 하길래 ‘아는 한국 남자 SF 작가 있으세요?’ 하고 물은 적도 있다. 아니, SF 작가 없다는 말을 그렇게 오래 해왔으면서, 내가 쓰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온 세상 남자들이 SF를 쓰기라도 한다는 걸까?

 

얼마나 닮았는가 SF 소설 김보영 작가

 

소설집에는 그런 차별과 편견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많이 보인다. 어떤 문제에 대해 ‘그렇다’ 혹은 ’아니다’ 대신 ‘확률’과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모든 것은 스펙트럼이고 만물이 이쪽과 저쪽으로 명확히 나뉜다고 착각하는 건 인간의 언어가 한정되어 있고 인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흑과 백이라는 단어 사이에 아무리 많은 색깔의 언어를 넣어도 그 안에 있는 무수한 색깔을 다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아는 단어 숫자에 맞추어 세상을 재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과연 무엇이 ‘정상’의 기준이 될까? ‘로그스 갤러리, 종로’에 등장하는 초인은 정상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테러범으로 몰리고, ‘같은 무게’의 ‘나’ 역시 사회의 기준에 따르면 정상인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과 사회의 자원이 지원해주는 것이 정상성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정상성’이 표준 분포의 한가운데보다도 한참 앞에 있는 것 같다. 홈텍스 사이트에 들어가 세금을 낼 때마다 생각한다. ‘세금은 전 국민이 내야 하는 것일 텐데, 세금을 내는 시스템은 컴퓨터를 잘 다루고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지능도 높은 소수에게 맞춰져 있구나’ 하고. 그리고 사회가 그 소수만을 정상인이라고 여긴다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과 ‘로그스 갤러리, 종로’는 일종의 히어로물이다. 차별과 편견이 가져온 집단의 광기에 희생되는 초인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닮았는가’가 ‘AI가 무엇을 보지 못할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 것처럼, 이 글은 ‘현대 한국에 히어로라고 불릴만한 착한 초능력자가 많이 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나라나 기업이 그 사람들에게 일을 떠맡기고 갈아 넣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차별하고 무시하는 데다가 일한 대가도 제대로 안 주겠지. 초능력 없는 인간도 갈아 넣는 나라인데 안 그러겠나. 소설을 쓸 때는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한 명의 인간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하는지에 대해 쓴다. 메시지는 그 과정에서 나오기도 하고, 나오지 않기도 한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김보영 작가가 좋아하는 히어로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드라마 <스몰빌>을 본 이후로 슈퍼맨을 좋아한다. 강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슈퍼맨은 DC 코믹스 최초의 캐릭터라서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량하고 윤리적이다. 현대에 그런 캐릭터는 서사를 만들기 어려워서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DC 코믹스의 세계에는 그런 캐릭터의 이야기가 많은 데다 연재가 영원히 끝나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좋아한다.(웃음)

독자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다. 내 소설을 좋아해주는 분들은 진심으로 많이 좋아해줬다. 데뷔 초기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교류하는 분들도 여럿 있다. 어떤 편견에 대해 ‘이 사람이 SF를 쓰는데 다른 게 뭐가 중요해?’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늘 내 소설을 사랑해줬다. 읽는 사람에겐 편견이 없다. 안 읽는 사람들이 갖고 있지. 늘 ‘이런 글을 쓰는데 다른 게 뭐가 중요해?’ 하는 기분이 드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소설이 마지막 소설이고 다음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쓴다. 그래서 잃은 것도 있겠지만 얻은 것도 있으려니 한다.

김보영 작가의 다음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 너무나 많지만 하나만 꼽는다면 한 명이 수백 개의 댓글을 다는 문제? ‘한 명에게 하나의 표를’이라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고 우리가 지켜온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이상적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 한 명이 1천 명도, 1만 명도 될 수 있는 공간이다. 거기서 불균형이 온다. 이름을 바꿔가며 나쁜 글을 수백 개씩 올리는 한 명이 있다면, 민주주의의 가치가 공론장에서 사라진다. 이 의견들을 모두 개별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인간 혐오가 심해지고, 거꾸로 모두 ‘봇’이나 ‘알바’로 생각한다면 자기와 다른 의견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이 맹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아이들은 이미 그 안에서 사회화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직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이 나오면 쓸 수 있겠지.

SF 재난영화보다 더 픽션 같은 팬데믹의 시대다. 이것은 김보영 작가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순간에 세상이 뒤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리고 바이러스 재난을 다루는 작품들은 대부분 치사율이 90~100퍼센트로 높게 그려진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인류를 위협할 수 있을 거라는 가정하의 설정인데, 현재 세계적으로 코로나19의 치사율은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전 지구를 위협한다. 1명이 죽으나, 1만 명이 죽으나 심각성이 다르지 않기도 하고. SF 작가로서 그 개념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다음 이야기를 만나기 전에 곧 SF 거장의 작품을 펴내는 미국과 영국의 하퍼콜린스에서 김보영 작가의 책을 만날 수 있다. 한국 SF 작가로는 최초의 일이다. 데뷔 초기에 독자들이 ‘한국에서 태어난 게 단점이다. 외국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말을 많이 해주셨다. 그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점점 믿게 됐다.(웃음) 이 소식이 알려졌을 때 SF계에 있는 많은 분이 함께 기뻐해주셨다. 무엇보다 그 후로 글만 써도 생활이 가능하게 됐다. 더 일찍 이랬다면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글을 써나가면서 작가 김보영이 궁극적으로 닿고자 하는 세계는 어디일까? 인간이 단지 존재만으로 존엄한 세상? 그야말로 이상적이다.(웃음) 그래서 SF를 쓰나보다. 그런 세상이 온 적 없으니까. 앞으로도 올까 싶다. 사실 소설에서 그런 신념을 갖고 사는 사람을 만들려고 해도 현대사회를 배경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다른 시공간으로 가거나 기계 생명을 쓰거나 불사신이나 초인을 상상하곤 한다. 에이브러햄 H. 매슬로가 <존재의 심리학>에서 한 말이 있다. 인간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냥 거기 있으므로 존엄해야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순간은 많지 않은데, 좋은 창작품을 접하고 몰입할 때는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여기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구나’ 하고. 그런 의미에서도 창작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