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무늬 그레이 수트, 셔츠와 타이, 레이스업 슈즈 모두 구찌(Gucci).

시간에도 속도 제한이 있다면 김수현의 초침은 분명 백 번쯤 속도위반 딱지를 떼었을 것이다. 이동 거리의 제한이 있다면 그것 또한 예외일 수 없을 만큼 김수현은 지난 몇 달간 시간을 쪼개고 쪼개 아시아 곳곳에 발 도장을 찍고 다녔다. 급류처럼 빠르고 폭풍처럼 거센 시간이 김수현의 시간을 집어삼킨 것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끝난 뒤 온전한 자유 시간을 보낸 날이 있었을까 싶은 스케줄. 누군가는 살인적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전쟁 같다 말할 이 타임 스케줄의 맨 윗자리에는 분명 그의 이름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아직 정식으로 방송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상으로만 6억 건이 넘는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김수현 스타덤의 제2막을 열어주었다. 2년 전,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끝나고 모든 연령대가 공감하는 국민적인 스타 반열에 오른 이후 영화 <도둑들>과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연타석 홈런으로 김수현의 이름값이 갖는 무게는 제법 묵직해졌다. TV와 스크린, 시청률과 관객 수를 동시에 어느 선 이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배우가 그리 넉넉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보통 이런 일에는 또래의 비슷한 배우들이 등장해야 하지만, 현재로선 김수현의 경쟁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연기력과 외모와 스타성의 삼위일체를 이루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단숨에 사람들의 뇌리에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해를 품은 달>은 퓨전 사극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김수현의 ‘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하나의 현상을 낳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수현의 이름은 하나의 아이콘에 가까운 이미지가 되었고, 지금 곤룡포를 벗고 정갈한 수트를 차려입은 외계인 도민준 교수님은 2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국은 물론 아시아의 관심을 받는 한류 스타가 되었다.

블랙 터틀넥 톱, 코듀로이 재킷, 그레이 팬츠 모두 구찌(Gucci).

벨벳 턱시도 재킷, 오렌지 팬츠, 화이트 셔츠와 보타이, 블랙 슈즈 모두 구찌(Gucci).

버건디 컬러 터틀넥 톱, 스트라이프 저지 소프트 수트 모두 구찌(Gucci).

데님 셔츠와 크루넥 블루 니트 스웨터, 네이비 더블 버튼 재킷, 베이지 라이딩 팬츠, 트위드 소재 모자 모두 구찌(Gucci).

그레이 터틀넥 톱, 블랙 팬츠, 선글라스 모두 구찌(Gucci).

셔츠와 타이, 퍼플 라운드넥 니트 톱, 그레이 팬츠, 화이트 레이스업 스니커즈 모두 구찌(Gucci).

블랙 터틀넥 톱, 체크 수트, 블랙 레이스업 슈즈 모두 구찌(Gucci).

블랙 가죽 바이커 재킷, 그레이 터틀넥 톱, 블랙 팬츠, 블랙 앵클 부츠 모두 구찌(Gucci).

그레이 라운드넥 니트 톱, 셔츠, 캐시미어 체크 재킷, 팬츠, 블랙 슈즈 모두 구찌(Gucci).

베이지 더블브레스트 코트, 레드 터틀넥 톱, 블랙 팬츠, 블랙 앵클 부츠, 선글라스 모두 구찌(Gucci).

그레이 더블 버튼 재킷, 레드 터틀넥 톱, 슈퍼 스키니 팬츠 모두 구찌(Gucci).

호피 무늬 셔츠, 그레이 라운드넥 니트 톱, 재킷과 체크 팬츠, 블랙 레이스업 슈즈 모두 구찌(Gucci).

그레이 터틀넥 톱, 아웃 포켓 장식 밀리터리 재킷, 스트링 팬츠, 선글라스 모두 구찌(Gucci).

레드 피코트, 그레이 터틀넥 톱, 블랙 팬츠, 블랙 슈즈 모두 구찌(Gucci).

모직 블루종, 머스터드 컬러 터틀넥 톱, 블랙 레더 팬츠, 블랙 앵클 부츠 모두 구찌(Gucci).

 

애초에 국민 여배우와 외계인의 러브 스토리라는 시놉시스 자체가 흥미의 시발점이었지만, 초반 관심사는 허당기에 헛발질을 일삼는 천송이 캐릭터에 쏠려 있었다. 도민준은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이었으며 뻔한 ‘차도남’ 캐릭터의 외계인 버전 정도였다. 김수현이라는 배우에게 기댔던 마음이 약간 어긋난 게 아니었나 싶을 만큼. 지르는 연기로 시선을 끈 상대 배우에 비해, 가라앉히고 삼켜서 내뱉는 그의 연기는 단숨에 단맛과 쓴맛을 가려내는 변덕스러운 시청자에게 조금 더디게 다가갔다. 김수현이라는 배우의 연기 폭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지나치리만큼 절제하는 그의 연기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를 거듭할수록 그가 전하려던 감정이, 보여주려던 연기가 그의 눈과 입을 통해 조금씩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힘을 빼고, 전체의 흐름을 계산에 넣은 그의 명민함이 이야기가 풀리면 풀릴수록 몰입도를 높인 것이다. “도민준은 외계인이지만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아야 했고,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것에서조차 인간과 차별되어야 했어요.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지만, 글로 적힌 몇 줄의 캐릭터 설명으로는 입체화하기 어려운 인물이죠. 어떻게 연기하느냐, 어떤 방법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계산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연기하면서 도민준에게 체화되는 게 중요했어요.” 연기라는 게 몸과 감정을 사용해 사람들을 속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이번 드라마만큼은 김수현의 진심이 도민준의 초현실을 입은 셈이다. 진지한 자기 세계를 품고 있는 도민준의 절제력에 사랑이라는 온도가 입혀지면서 드디어 김수현 연기의 판도라가 열린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착륙하지 못하는 도민준의 감정을 정리하는 게 어려웠어요. 사랑하는데 표현할 수 없고, 다가서고 싶은데 곁에 설 수 없는 감정. 다른 작품에 비해 <별에서 온 그대>를 하면서 짧은 시간 가장 많은 종류의 감정을 끌어안고 살았던 것 같아요.” 감정이라는 게 마모되거나 소멸되는 유형의 물질이 아닌지라, 작품을 끝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다. 김수현은 몰입도가 높은 배우이고, 그만큼 작품이 끝난 뒤 힘들 것이다. “아직 도민준의 감정이 혼재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 작품의 후유증이 심각하지 않은 건 타이트한 스케줄 덕을 본 것 같아요. 드라마가 끝나고 곧장 아시아 투어에 돌입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의 반응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매일매일이 정신없었거든요.” 카메라가 일제히 그를 향해 섬광을 뿜는 순간에도 자신만의 공간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겠지만, 그래도 대장정이 거의 마무리에 접어들어 이제 일본 팬과의 만남만 남겨둔 상태다. “한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어요. 같은 시간에 좀 더 많은 팬과 눈을 맞추고 인사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죠. 아직 팬들의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소통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기는 해요. 행복한 만큼, 딱 그만큼 부담감이 차오르지만 그것 또한 감내해야겠죠. 천천히요, 뭐든 급하면 체하니까요. 저도, 팬들도,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충전한 배터리처럼 부풀어오르는 모습 같은 건 없다. 그는 언제나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한다.

모로코 남부, 모로코의 심장 마라케시(Marrakech)로 그를 불러낸 건 이런 거대한 생활에 일종의 인디언 서머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정신없는 시간의 통로에서 그를 빼내, 아주 잠깐이나마 현실의 김수현으로 발디딜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 정제되지 않은 이 혼란의 도시에 김수현이 들어서면, 그는 오히려 더 차분해질 것이고 군중 속의 평화로움을 누릴 것이 분명했다. 구시가지 제마 엘프나(Djemaa El Fna) 광장에 들어선 순간, 질식할 듯 한순간에 몰려든 군중 속에서 김수현은 여유롭게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마셨다. 직접 짠 오렌지 주스를 겨우 4디르함(Dirham)에 마실 수 있다며 좋아하면서도, 그보다 아무도 그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 도시의 혼란이 더 마음에 드는 듯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코브라가 춤을 추고, 마차에 실린 관광객 사이를 거닐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익명성이 그에게 꽤 만족할 만한 해방감을 안겨준 것이다.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움직이려면 팬들의 안전을 담보로 해야 하니까. 아시아 투어 내내, 행사 장소와 호텔 방 두 곳만 왕복했죠. 도시를 옮겨 다니지만, 제 눈에 담긴 풍경은 호텔 방 전경 말고는 없어요.” 마라케시에서 그는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민트 티 한 잔을 마시면서,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시간에 행복해했다. 잠깐 접어두었던 관심이 다시 카메라에 쏠려 새로운 렌즈며, 빛의 노출에 따라 피사체를 담아내는 과정에 한창 몰입하고 있다. 그는 일정 내내 카메라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창문 가까이 렌즈를 들이대고 차창 너머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담아냈다. 늘 찍히기만 하던 이가 이번엔 반대편에 서서 주도적으로 새로운 것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흙벽돌을 쌓고 회반죽을 바른 어도비(Adobe) 양식의 건물들은 도시를 온통 붉게 물들였고, 그 모습은 김수현의 카메라에 가장 많이 담긴 주인공이 되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구시가와 신시가의 모습은 그의 호기심을 부풀어오르게 했고, 북부 아프리카의 이국적이다 못해 낯선 환경에 대해서, 그는 끊임없이 묻고 궁금해했다. “모로코의 다른 도시도 궁금해요. 사람 구경하러 온 건 아닌데, 가만히 앉아서 지나는 행인의 모습만 봐도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은 풍경이에요. 마라케시는 아주 역동적인 도시 같아요.” 도착한 다음 날, 자신의 방 테라스에서 바라보이는 산이 아틀라스 산맥이라고 하자 휘파람을 불던 소년 같은 사람. 천년 세월 속의 벽을 따라 걷던 골목길에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춰 카메라 렌즈를 바짝 들이대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던 모습이나, 커피는 통 입에 댄 적 없던 그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셔대는 모습까지 모로코에서의 일주일은 김수현의 몸과 마음을 아주 살짝 위치 이동 시켜놓았다.

“낯설어요. 그래서 재미있고. 여기는 머문 시간만큼 비밀스러운 시간을 만들어 여행자에게 되돌려주는 도시 같아요. 종종 충동적이고 엉뚱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 모든 게 용서되는 묘한 곳이에요. 다시 돌아가야겠죠.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여행이 즐거운 거겠지만 이상하게 이 도시가 마음에 드네요.” 여행 말미에, 환승하기 위해 파리에 잠깐 머무른 9시간 동안, 김수현은 금세 사생활을 보호받지 못하는 스타로 돌아왔다. 연휴를 맞아 파리로 몰려든 아시아 팬들이 다시 김수현의 발을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그는 이미 모든 이의 친구가 되었고, 같이 걸어가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김수현 또한 그걸 부담스러워하거나 피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진 않는다. 다만, 그에게 내어준 일주일만큼은 이방인으로서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침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라케시에서의 일주일은 김수현의 시간을 기분 좋게 휘저어놓고 그를 살짝 들뜨게 했다.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은 건, 그가 곧 제자리를 찾아 이름값을 지켜낼 걸 알기 때문이다. 김수현이란 배우는 그런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