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의 시대

 

밴드는 돈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도 과히 돈 벌기 쉽진 않았다.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 한국 밴드는 영국, 미국, 일본의 밴드 시장에 비정상적으로 많은 돈이 돌던 시기(그만큼 음악적으로 폭발적인 신이 존재하던 시기)에 음악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밴드를 배제하면 그 많은 이벤트, 라이브, 페스티벌 라인업을 채울 수 없던 예전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도 있었다. 이제 더 값싸고 편리한 대안이 차고 넘친다. 마치 지금의 종이 매체가 게임 회사를 콘텐츠 기업으로 보고 벤치마킹하듯, 이름부터 ‘가상 악기(VSTi)’인 저세상 경쟁자도 있다. 경제 효율성을 우선하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는 데 밴드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 변화가 세상을 그늘지게 만든 것도 아니다.

밴드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른 창의적인 음악적 방법이 나왔다. 이를테면 샘플러, 오토튠 등 과거의 음악가들이 비웃던 도구들이 보다 크고 많은 가능성과 연결됐다. ‘그들만의 리그’였던 힙합과 아이돌 음악의 변화한 위상도 위상이지만, 밴드보다 배고팠던 예컨대 전자음악 뮤지션들에게도 이전보다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갔다. 그 세대 영민한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밴드들이 사라지자, 각자도생의 길에서 더 많은 숨겨진 음악들이 그늘을 벗어났다. 유튜브에 다 있으니 접근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중 앰비언트로 말하자면, 편안한 배경음악으로서의 기능성이라도 있었으며 적어도 밴드보다 ‘쿨’했다.

망한 데다 잊히는 상황도 충분히 절망적인데 밴드라는 형식의 태생적 한계가 밴드 시대의 종말을 가속화했다. 그들을 보면 마치 동시대를 살지 않는 듯이, 극단적으로 자신들만의 세계에 사는 듯이 보인다. 밴드는 음악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형태라기보다 그냥 니치(niche)시장이 됐다. ‘전 세계가 열광할 글로벌 K-밴드’ 결성을 목표로 시작한 JTBC의 경연 프로그램 <슈퍼밴드 2>가 뛰어든 시장이다.

<슈퍼밴드 2>의 프로듀서 심사(예선)를 보면서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선 첫 번째로 방송된 김한겸의 순서가 끝난 뒤 베이시스트 변정호는 말했다. “이렇게 어린 친구가 밀도 있는 소울을 가지고 있구나. 그리고 이내 좀 불안해졌어요.” 구어로도 문어로도 쓰기 민망한 표현들인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뿐 아니라 너무 자연스럽게 들려서 더 굉장해 보였다. 대중의 사회운동이 정치만큼이나 중요해진 21세기에는 구문이 된 것 같긴 하지만, 예술가가 생활인의 감각과 동떨어지는 것은 문맥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음악은 그 명명부터 사람이 들어가 있다. 춤추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을 예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음악,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들과 무관한 예술로부터 끌어내린 음악 사이에 대중음악이 있을 것이다.

예선 참가자가 선보이는 무대 대부분도 퇴행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잔뜩 허세를 부리거나 서커스에 어울리는 기술을 펼쳐 보였다. 지금의 세대가 그나마 가깝게느끼는 1990년대 브릿팝,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경멸하던 방식이다. 다른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멋 부리며 발음을 뭉개는 보컬을 그렇게 지적하던 윤종신이 왜 여기에서는 가만히 있을까? 밴드는 다른 리그라는 걸까? 다른 리그라는 성역화가 그들을 퇴행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경연 프로그램의 한계, 예선 무대의 특성, 실용음악과를 통해 만들어진 한국적인 밴드 문화를 감안하고 싶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슈퍼밴드 2> 이외의 대안이 아주 많다.

밴드 시대의 종말을 가속화한 것이 ‘태생적 한계’에서 나왔다고 했다. 밴드의 고립적인 실존 이면에는 그들이 가진 꿈의 크기가 있다. 압도적으로 고유한 자신의 소리를, 그루브를, 노래를 원하는 것이다. 그 머나먼 길까지 악기를 익히고, 연주자를 만나고, 합주하고, 장비 챙겨 공연을 다니고, 생계를 해결하는 과정을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돌잡이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음악 하나 외에는 다 부차적일 수밖에 없고, 자신도 건사 못 하는 사람이 무려 밴드의 비전을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나에 골똘하다 못해 이방인에 가까운 친구들이 이 사회에, 타인들에 건강해 보일 리 만무하다. 하지만 바이닐 레코드의 사례를 보면,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야말로 일어나곤 한다.

2020년 미국 내 바이닐 레코드의 판매량이 35년 만에 CD 판매량을 앞질렀다. 미국음반산업협회(RIAA)의 2020년 중간 보고서에 따른 결과다. 2007년 ‘레코드 스토어 데이’가 시작된 이래 바이닐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했고, 현재 가장 잘 팔리는 음악 상품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과거의 바이닐 애호가도 지금의 밴드와 겹쳐볼 수 있을 만큼 가장자리에 있었다. 물론 그들은 창작자도 플레이어도 아니라는 점에서 구분해야 할 점이 있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비슷했다.

바이닐은 사람들의 비논리적인 기호를 보여준다. 바이닐의 호황 이전에 사람들이 비경제적이고 불편하고 변수로 가득한 매체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한 전문가가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난감처럼 돼버린 음악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사운드가 아니라 더 실제적인 것, 더 충만한 것, 더 유일한 것을 갈구했고, 바이닐은 그 대표적인 상품 중 하나가 됐다. 밴드에 대한 이야기로 바꿔도 기대해볼 만한 전개 아닌가.

다시 찾아온 바이닐의 전성기는 이전과 달랐다. 애호가를 위한 시장과 별개로 컬러 바이닐, 픽처 디스크 등 젊은 세대의 구미를 당기는 형식이 적극적으로 개발됐다. ‘한정판’이라는, 지금의 세대가 상품에 기대하는 욕구를 반영하는 제작과 마케팅이 이루어졌다. 이 낮고도 매력적인 문턱을 넘어온 사람들은 중고 바이닐에도, 오디오 장비에도, 심지어 레코드 바에도 돈을 쓰기 시작했다. 주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규모는 전혀 아니지만, 자생을 걱정할 정도의 니치 시장은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슈퍼밴드 2>에 대한 비판이 그친 건 3화에 해당하는 본선 1라운드부터다. 본선이 시작되고, 참가자들이 밴드로 모습을 드러내자 오직 좋은 밴드만이 만들 수 있는 순간, 잊고 있던 기적이 생각났다. 기탁 팀의 ‘Champagne Supernova’가 있었고, 크랙샷의 ‘난 괜찮아’가 있었으며, 박다울의 ‘Good Boy’가 있었다. 기탁의 노래는 뛰어난 가수이자 프런트맨이 탄탄한 밴드의 받침하에, 편곡을 자신의 호흡으로 완전히 끌어왔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움과 기품이 있었다. 크랙샷은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는 개개인이 오래 함께했을 때 그들보다 거대해지는 밴드를 증명하는 퍼포먼스였다. 박다울은 거문고가 포함된 밴드의 가능성을 DJ의 컷-업 믹스 스타일까지 밀어붙였다. 밴드의 의의는 단지 더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 동료들과 함께 과감히 새로운 영역을 찾아나가는 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제작진의 지시가 있었는지, 밴드 주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모든 밴드가 ‘매시업’을 고려한다는 점도 이채로웠다. 이제는 음악가의 영역을 넘어 엔터테이너의 영역에 진입한 방법으로서, 그들이 프로듀서의 입장으로 음악에 접근하며, 달라진 매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흔적 같았다. 억지스러운 순간도, 그럴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밴드와 오디션 프로그램에 드리운 실력, 감동, 카리스마 따위의 무거운 굴레 바깥 ‘재미’라서 좋았다.

<슈퍼밴드 2>에서 드러난 것처럼, 밴드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더 실제적인 것, 더 충만한 것, 더 유일한 것’으로 설득될 수 있다면 방법은 있어 보인다. <슈퍼밴드 2>의 본선 시작과 함께 또 하나 자각한 것은 그들이 젊다는 것이다. 이 조건을 더 영리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와서 미술가건 소설가건 간에 비평적 전략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의 밴드와 작품을 동시대 사람의 눈으로 돌아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는 길이다. 같은 세대에도 동떨어져 보이는 감각으로는 밴드에 드리운 영광의 과거를 결코 끊어낼 수 없다.

바이닐 시장이 새로운 전성시대를 다르게 이끌어간 사례를 이용할 수도 있다. 더 이상 아티스트의 마케팅은흠이 아니다. 오히려 아티스트가 기획자와 마케터의 역할을 흡수하는 중이다. 지금 밴드 이외의 다른 신에서는 당연하고 활발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하는 것’을 꾸준히 하면서, 그렇게 정체되지 않으면서 그 신을 살아 있게, 사람들이 드나들게 해야한다.

하지만 이렇게 적으면서도 멋쩍고 아쉽다. 밴드는 그저 음악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고, 세상에 자신들밖에 없는 것처럼 자유로워야 바라보는 주변인들에게 쾌감을 안기는 것 아닌가. 이단아 하나쯤은 있어야 교실 아닌가. 그런데 겨우 살아남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려니 말이다. 오래전 노이즈가든의 윤병주가 인터뷰에서 음악을 하려는 젊은 친구들에게 한 말이 맞는 걸까? “알아서들 해라. 어차피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밴드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성장의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밴드처럼 주변적이고 가난한 분야의 주체들에게 성장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까지 일임하는 것은 가혹하다. 몇몇 밴드들과 실용음악과 강사들에게 확인한 바, 요즘 밴드들은 과거처럼 미련하게 합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와 달리 실용음악과를 나온 기술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각자 먹고사는 게 바쁘기도 하고, 세션 밴드와 자기 밴드의 경계가 희미해진 채 다들 몇 개의 밴드를 동시에 해서 그렇다고. ‘더 실제적인 것, 더 충만한 것, 더 유일한 것’을 탄생시키는 비밀, 밴드의 합주가 희미해지고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의 예로 등장한, 일주일에 7일 매일 8시간 공연을 통해 탄생한 비틀스는 이제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가 된 걸까.

<쇼미더머니>에 몇 번씩 출연하는 래퍼들이 흔해졌다는 전언이다. <쇼미더머니>를 일종의 ‘미션’으로 설정하고 스스로를 더욱 몰아치다 보면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어서 하나의 큰 목표 삼아 계속 도전한다고. <슈퍼밴드> 시리즈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글로벌 K-밴드’ 같은 허망한 목표보다는 그들에게 지속적인 성장의 시간을 주는 프로그램이라는 것만으로도 <슈퍼밴드> 시리즈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그들이 그들로 머물 수 있게 해준다면, 그래서 살아남는 것 따위가 아니라 내가 밴드의 시대를 열어보겠다는 야망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게 한다면. <슈퍼밴드 2>의 황린이 입버릇처럼 한다는 말이 바이닐의 전성시대도 예측 못한 안개 속의 현대에, ‘다시 밴드의 시대가 도래할까?’라는 의문에 대한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해보기 전에 안 된다고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