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표현법

 

“둘이 언제부터 만났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지만, 제대로 대답해본 적이 없다. 그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그는 같은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어이없다며 웃기도 했다. 그 순간 옆에 있는 내 존재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과연 우리는 연인일까? 한 주에 두세 번 만나 밥을 먹고, 만나지 않는 날에는 거의 모든 일상을 공유하며, 틈나면 입을 맞추기도, 마땅한 시간과 장소와 감정이 확보되면 섹스도 한다. 연인이 할 법한 거의 모든 걸 하지만,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순간은 드물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이 낯간지럽다는 핑계가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랑 사귈래요?”라는 말로 도장을 찍어야 관계에 확신이 설까? 글쎄, 적어도 나는 친구와 키스나 섹스를 할 만큼 강심장이 아니다.

애정이란 아슬아슬하게 쌓이다 어느 순간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도미노 같아서, 내 마음 또한 그와 주고받은 몇 가지 말과 상황으로부터 팽창했을 것이다. 그의 학창 시절 추억이 묻은 노래를 플레이리스트 상단에 올리거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기자기한 가구와 인테리어로 SNS를 도배한 건 분명 그의 근사한 취향이 내 안에서 폭발했다는 증거다. 잘 모르거나 관심 없던 게 새로워 보인다는 건 애정 전선의 청신호라 배웠다. 이런 변화가 마음에 든다면 앞으로도 커지도록 두는 게 옳다고도 배웠다. 나의 지난 모든 연애와 직감이 그러도록 시킨다. 그에게 전하고 싶은 느끼한 문장이 자주 떠오른다. 웃고 볼 일이다.

마음이 커질수록 표현이 늘었고, 안 하던 행동도 하게 됐다. 지난여름에는 수차례 해변에 데려갔고, 꽃집이 보이면 들어가 그가 좋아하는 색의 꽃을 사서 선물했다. 원래 연애란 사회적으로 무용한 짓을 웃으며 즐기는 일이잖나. 자연스럽게 거의 모든 여가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렇게, 어쩌면 자연스럽게 나는 그를 애인으로 대했다. 그래도 되나?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았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이게 범죄라면 범인은 나 혼자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한 배에 탔으니 우리는 공범이다.

 

감정 표현법 관계 커플

 

나는 어느 순간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됐다. “OO 씨는 저와 함께 살게 될 거예요” 같은 호기로운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앞날은 모르는 일이죠”라며 도망쳤다. 그는 점차 잦아지는 나의 애정 표현에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말을 참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가 나처럼 애정 표현을 쉽게 하길 원한 건 아니다. 내 마음이 가는 길이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을 뿐이다. 그때까지는 그가 내 축축한 감정 표현 방식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게 낯을 가리는 건지, 그런 순간을 못 견딜 만큼 건조한 사람인지 몰랐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의 취향이나 일에 대한 소명은 나란히 두면 완전히 다른 빛을 낼 정도로 강렬한 시너지가 생기지만, 감정 표현의 정도는 지구 반대편에서 자란 사람처럼 달랐다. 그는 “쉬워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해요”라는 말을 일할 때는 물론 연애에도 대입했고, “그건 자연스럽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에겐 혹평이다. 때때로 나와 다투면 기분이 땅끝까지 내려앉는다며 다시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며칠씩 걸렸다. 연락이 뜸해지고 문자는 시큰둥해진다. 나의 모든 말을 해체해 반드시 불쾌한 단어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예민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안절부절하다 납작 엎드려 손을 내민다. 그는 불리하거나 원치 않는 상황으로부터 타인의 호의를 얻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우아한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은 나와 다툰 상황에서도 유용했다. 이 순간에는 나의 표현 방식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는 점차 잦아지는 나의 애정 표현에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말을 참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가 나처럼 애정 표현을 쉽게 하길 원한 건
아니다. 내 마음이 가는 길이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고 싶을 뿐이다.”

 

 

그는 말로 하는 애정 표현처럼 부담스러운 일은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이지만, 행동만큼은 명확했다. 먼저 만나자거나 무언가를 함께 하자는 등 제안을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먼저 입을 맞추는 것도 늘 나였지만, 그 순간을 함께 즐겼다. “키스는 제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요?”라는 귀여운 말도 할 줄 알았다. 한참을 대화하다 끝내 불을 끄고 뒤엉키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탓일까? 나만 알고 싶은 은밀한 소리를 냈다. 이토록 뜨거운 순간에 눈은 감아도 귀는 막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촉감이야말로 가장 관계에 가까운 감각일 터. 꽉 움켜쥘 때도, 쓱 쓰다듬을 때도, 서로의 온몸으로 몸짓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나를 밀치고 위로 오르면 내 몸을 완벽하게 이해한 전문가 같았다. 그렇게 침대가 축축해질 때까지 뒹굴며 나눈 말과 표현은 우리의 관계에 없던 것이었다. 일상에서는 손만 잡아도 어쩔 줄 모르던 것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마치 동전의 뒷면처럼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을 아침에 다시 봤다. 맑다. 그는 아침과 저녁 외모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며 민망해했지만, 나는 그 순간과 그의 깨끗한 얼굴이 백 마디 말이나 표현보다 좋았다. 그날이 어떤 요일인지와 별개로, 우리만의 사적인 일요일을 맞은 것처럼 풍성했다. “이런 아침을 매일 마주하면 좋겠는데, 함께 살아야겠어요.”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자, 그는 다시 상한 음식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런 말은 학원에서 배운 건가요? 웃겨.” 나는 말없이 웃으며 입을 맞췄고 그의 몸 위로 올라 어젯밤의 몸짓을 되새긴다. 삶의 변화를 즐겁게 맞이한 건 나뿐이 아니구나,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이런 웃음이 나는 상황과 별개로 그가 나의 말과 표현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그로부터 알게 된 건, 그대로 두면 그대로일 것 같아서 나온 애정 표현이 오히려 브레이크를 거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있고, 그대로 두고 다만 행동해야 감흥이 커지는 관계도 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만난 건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궁금하지 않다. 표현이 쉽고 축축한 나와 지구 반대편에서 온 것처럼 건조한 그는 한 배에 탔고, 우리는 이 항해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즐겁게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