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학생이던 시절, 아빠는 해외 세미나 출장이 잦았고, 돌아올 때면 항상 가족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건넸다. 나는 아빠의 출장을, 더 정확히 말하면 출장의 기념품을 사랑했다. 그중 가장 반긴 선물은 뷰티 제품이었다.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는 사춘기가 찾아왔고, 그런 아들이 신경 쓰였는지 아빠는 공항 면세점에서 파는 화장품을 사다 주기 시작했다. 뷰티에 무지하던 아빠는 면세점 직원에게 ‘남자아이가 쓸 만한 로션’을 물었고, 랩시리즈의 데일리 레스큐 워터로션을 사 오셨다. 신기하게도 제품을 다 쓸 때쯤이면 아빠는 또 출장을 다녀왔고, 그 덕분에 학창 시절 내내 데일리 레스큐 워터는 내 스킨케어 루틴에서 빠지지 않았다. 미니멀한 케이스에 담긴 무색무취 텍스처가 맨 뷰티 제품은 독하고 느끼하다는 선입견을 단번에 없애주었고, 누구보다 쿨하게 스킨케어를 향유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빠는 엄마가 수십년째 쓰는 샤넬의 N°5 오 드 빠르펭도 늘 잊지 않고 선물했다. 은퇴를 앞둔 아빠는 더 이상 출장을 가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 종종 해외 출장을 간다. 정신없는 출장 기간에 누군가를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도 매번 빠짐없이 선물을 챙겨 온 아빠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자식에게 유난히 엄격했던 아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단 한 번도 응원해주지 않던 아빠. 하지만 말보다 행동으로, 늘 조용히 마음을 전하던 분. 아, 이 마음이 사랑이었구나.
<마리끌레르> 현정환 뷰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