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강가의 잔디밭 근처에 벤치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이 벤치를 무대로 누군가의 일상이 펼쳐진다. 소꿉친구인 남녀, 이별이라는 화두를 꺼낸 커플과 그 사이에 끼어든 아저씨, 가출한 언니와 그의 동생, 벤치 철거를 계획하는 관청 직원들까지. 답답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하고,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그린 영화 <엣 더 벤치>는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의 산책길에 있던 낡은 벤치에서 비롯되었다. 사진가로 활동하며 일찍이 주목받기 시작한 감독이 자신의 재능을 믿어준 배우와 각본가 등 소규모의 동료들과 함께 완성한 첫 장편 영화. 촬영 방식과 연출에 대한 접근이 서로 다른 다섯 편의 에피소드를 하나의 작품으로 엮어내며, 감독은 ‘이별의 슬픔이 일깨우는 소중함’을 전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오늘날에 대해 사유할 시간을 선사하며 영화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감독이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 함께하며 전해온 말들.

첫 장편 영화 <엣 더 벤치>가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개봉했고, 4월 말 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MCFF)에서 상영했다. 사진 등 기존에 활약해오던 형태를 벗어난 작품을 만들고, 극장에서 선보이며 뜻깊은 경험을 했을 것 같다.
스태프와 출연진들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해준 덕분이다.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큰 행운처럼 느껴진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목적을 투명한 물처럼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영화 제작 방식과 조금 다른, 소규모의 ‘자가 제작’ 방식을 따랐는데도 그 과정을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해준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산책길에 발견한 벤치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벤치의 어떤 점에서 영감을 얻었나?
그 벤치는 후타코타마가와 강변에 있고, 내 본가와 현재 집, 작업실 모두 가까이에 있어 어릴 때부터 주변을 자주 거닐었다. 잔디밭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벤치였는데, 주변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그 풍경이 마치 무대처럼 느껴졌다. 독특한 자리에 설치되어 왠지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낡은 벤치가 단순한 시설이 아닌 인격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2~3년 전 벤치 인근에 대교 공사가 시작되자, 언제 철거될지 모를 이 벤치를 작품으로 남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바뀌는 도쿄의 풍경 속에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자리한 벤치를 배경으로, 어느 날의 누군가가 나누는 대화를 담아내며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 시간을 엮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영화 <엣 더 벤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벤치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옴니버스 형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제작 초반부터 옴니버스 형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같은 장소이지만, 전혀 다른 장소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의 집합체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벤치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벤치를 다면적으로 바라보려 한 거다. 모든 사물은 누가, 언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지 않나. 이 사실이 세계의 다면성을 알려준다고 생각하고, 이는 내가 창작자로서 근본적으로 다루고 싶은 지점이다.


1편 ‘남은 자들’과 5편 ‘외로움은 계속된다’에 출연한 히로세 스즈를 비롯한 배우 라인업이 화려하다. 어떤 기준으로 이번 영화에 함께할 배우들을 택했나?
우선 영화의 출발점인 1편을 준비할 땐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해 ‘내가 가장 함께하고 싶은 배우’에게 먼저 연락하려고 했다. 그때 바로 떠오른 이들이 히로세 스즈와 나카노 타이가였다. 둘 다 이전 작업을 통해 강한 신뢰를 쌓은 배우들인 만큼, 내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며 성실히 임해줄 거라 믿었다. 인물들이 벤치에 앉아 사적인 생각들을 주고받는다는 컨셉트에 이들보다 적합한 배우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외에도 관객의 몰입도, 감정 표현의 강도 등을 고려하며 각 에피소드에 어울릴 만한 배우들과 협업했다.
히로세 스즈가 이 영화의 촬영 방식이 굉장히 독특했다며 “카메라가 뒤쪽에 있고,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앞을 보고 있기 때문에 연기한다는 감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에피소드마다 벤치 주변의 모습을 다양한 시점으로 담아낸 점이 인상 깊은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연출 방식을 만들어갔나?
각 에피소드의 각본가들에게 연출 방식을 미리 공유하고, 서로 논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예를 들어 1편의 각본가에게는 ‘카메라가 벤치의 선보다 앞에 나오지 않도록’ 집필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실제로 소꿉친구인 두 남녀가 오랜만의 재회를 앞두고 통화하는 장면을 제외한 모든 장면을 벤치 뒤에서 촬영했다. 서로 마음을 전하려 하지만 미묘하게 어긋나는 인물들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담아내면서 이들이 처한 안타까움이 사랑스럽게 보이기를 바랐다. 반면, 연인의 이별을 그린 2편 ‘돌아가지 않는’은 벤치에 앉아 초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의 대립적인 구도를 반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벤치의 정면에 뒀다. 이어지는 3편 ‘지키는 역할’에서는 관객들이 벤치 주변을 넓은 시야로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광각 렌즈를 사용해 한층 동적인 장면을 촬영했다. 보다 개방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가출한 언니와 그를 찾으러 온 동생이 말다툼을 벌이면서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자유롭게 담아냈다.



직접 각본을 쓴 4편 ‘라스트 신’은 외계인을 SF의 요소를 활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비현실적 소재를 활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엣 더 벤치>는 ‘리얼리티’의 변화를 단계적으로 그려낸다. 1편부터 이야기에 약간의 허구성을 더해가는 거다. 그러다 4편에 다다르면, 벤치 철거를 계획하는 관공서 직원들의 대화에서 시작해 SF로 발전한다. 벤치, UFO 등의 시점을 빌리며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던 이야기는 갑자기 영화 촬영 현장을 담은 메이킹 영상으로 전환된다. 그 장면이 리얼리티를 가장 강렬하게 감각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를 기점으로 영화 속 리얼리티의 기준이 새롭게 설정된다. 그 기준선이 1편에서 1년이 시간이 흐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5편 ‘외로움은 계속된다’ 속 인물들의 대화를 더욱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초속 5센티미터> 실사화 등의 작업이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다. 영화 감독, 나아가 창작자로서 어떤 작업을 이어가고 싶나?
내 창작의 주제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 그 모순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고, 창과 방패처럼 대립하는 것들이 공존하지 않나. 그 사이에는 모호한 경계가 있다. 그 경계에서 인간을 그린 작품들이 지금의 내게 큰 영향을 줬고, 나 스스로도 눈앞의 현실과 내 상상 속 비현실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상상이 현실보다 더 농밀하고,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여겨질 때도 있다. 이처럼 상상과 현실이 혼재된 듯한 감각이 내가 비로소 ‘리얼리티’를 느끼게 한다. 이 지점들을 파고들 수 있는 작업들을 선보이고 싶다. 정보가 넘치고, 모든 것이 빠르게 분류되는 오늘날 내 작품들이 저마다 깊이 사유할 기회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