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렌시아가 2023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레진으로 제 작한 갑옷 모티프 볼가운 드레스와 앙리 2세의 갑옷 사이 에는 어떤 연결 지점이 있을까? 정답은 파리 루브르 박물 관에서 2025년 7월 21일까지 열리는 전시 <루브르 쿠튀 르: 예술품, 패션 오브제> 속에 있다. 마리끌레르가 파트너 로 참여한 이번 전시의 핵심은 하나다. 루브르 박물관의 장 식미술 컬렉션과 2010년대 이후 하이패션을 나란히 놓고, 새로운 방식의 시각적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 “많은 디자이 너가 예술사와 장식미술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소 재와 장인 기술, 미학적 영감, 나아가 컬렉션 구성 방식까 지, 패션과 예술의 연결 고리는 매우 많죠.” 이번 전시를 기 획한 루브르 박물관 총괄 큐레이터이자 장식미술 부문 디 렉터 올리비에 가베 (Olivier Gabet)의 설명이다.
오랫동안 주요 미술관에서 외면당하거나 심지어 폄하되기 도 했던 패션은 이제 예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 중 하 나로 자리 잡았다. 2025년은 그 흐름이 절정에 이르는 해 다. 지난 1월에는 돌체앤가바나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 전시 가 그랑 팔레에서 화려하게 개막했고, 케브랑리 미술관 또 한 황금의 역사와 의복 문화를 조명한 전시 <태양의 핏줄, 태양의 뤼방에서 오리엔트를 수놓은 예술(Au fil de l’or, l’art de se vêtir de l’Orient au Soleil-Levant)>을 통해 황금 텍 스타일 유산을 탐구하는 중이며, 오는 6월 28일에는 팔레 갈리에라에서 릭 오웬스의 회고전 <사랑의 사원(Temple of Love)>이 열릴 예정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하나의 변화 에서 비롯됐습니다. 예전과 달리 패션이 문화의 일부이며,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죠.” 프랑스 파리정치대학(IEP) 교수이자 프랑스 오트 쿠튀르 패션 연합의 신진 브랜드 디렉터 세르주 카레이라(Serge Carreira)는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패션 은 오랫동안 예술의 하위 영역으로 여겨졌고, 거대 럭셔리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탓에 미술계의 경계 대상이었 다. 이런 통념을 바꾼 것은 198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 관에서 열린 이브 생 로랑 회고전 <이브 생 로랑: 25년의 디 자인(Yves Saint Laurent: 25 Years of Design)>이다. 이 는 살아 있는 디자이너에게 헌정한 최초의 전시였고, 장식 미술관(MAD) 내에 패션 예술관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그 이후 패션 전시는 대중의 열렬한 관심을 받고 있다. 2018 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천상의 몸: 패션과 가톨 릭적 상상력(Heavenly Bodies: Fashion and the Catholic Imagination)>은 그 대표적인 예다. 패션과 가톨릭 사이의 관계를 다룬 이 전시는 1백60만 명 이상이 다녀가며 관람객 수 기준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피카소나 투탕카멘을 다 루는 전시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세르주 카레이라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패션 전시는 사람들 의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대중이 거 리감을 느끼지 않아요. 그것이 패션 전시의 힘이죠.”
전문 미술관뿐만 아니라 패션 하우스들도 아카이브 보존 과 전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생 로랑의 박물관을 필두로 피 렌체의 구찌 가든, 파리의 갤러리 디올처럼 하우스의 역사 를 보여주는 공간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브랜드의 단 독 전시는 강력한 소통 수단으로서, 이제는 글로벌 투어 전 시로까지 규모를 넓혀가고 있다. 예컨대 2023~2024년 에 걸쳐 열린 <가브리엘 샤넬: 패션 매니페스토 (Gabrielle Chanel: Manifeste de mode)> 전시는 파리 팔레 갈리에 라에서 출발해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을 거쳐 상 하이 파워 스테이션 오브 아트까지 이어졌다. 최근에는 종 합 미술관에서도 패션 디자이너들을 전시에 직접 초청하 기 시작했다. 2023년에는 영국 디자이너 그레이스 웨일 스 보너(Grace Wales Bonner)가 뉴욕 MoMA에서 소장 품 50점을 선별해 전시를 구성했다. 이러한 협업은 미술 관에 젊고 새로운 관객층을 끌어들이고, 예술 표현의 경계 를 허물며 동시대적 창작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 퐁피두 센터의 저널리스트 로랑스 베나임(Laurence Benaim)이 기획한 강의 ‘경계를 넘는 패션(La traversée de rences. Quand la mode s’invite au Musée)’은 마르지엘라, 장 폴 고티에, 케빈 제르마니에의 패션과 더불어 현대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빌헬름 디에(Wilhelm Die), 울리케 오팅거(Ulrike Ottinger) 등의 미술 작품을 나란히 제시하며 두 분야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루브르 쿠튀르 전시 역시 이러한 양상을 띤다. “사진가, 안무가, 영화감독이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과의 관계를 표현하듯 이제 패션도 그처럼 자연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패션은 시대를 반영하는 가장 동시대적 창작 영역 중 하나니까요.” 올리비에 가베의 이 말이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늘 예술에서 영감을 수집했다. 자크 두세, 이브 생 로랑, 위베르 드 지방시는 모두 열정적인 예술 작품 애호가였다. 이들의 예술적 감식안은 옷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2019년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한 재킷을 예로 들면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를 통해 18세기 가구 장인 마티외 크리아르(Mathieu Criaerd)의 서랍장 무늬를 수공예 자수로 재현했다. 프랑스 디자이너 마린 세르는 “저는 미술관을 살아 있는 자원으로 여겨요.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며 창작 에너지를 얻는 공간이죠” 라고 전했다. 그는 중세 시대의 상징주의적 이미지와 실루엣을 차용해 유니콘 벽화 ‘귀부인과 일각수(La Dame à la licorne)’를 모티프로 한 업사이클 코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장식 예술에서, 아이리스 반 헤르펜은 고딕 건축에서, 알렉산더 맥퀸은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의 도자기에서, 존 갈리아노, 니콜라 제스키에르, 크리스찬 루부탱은 18세기 예술사에서 자신만의 미학적 아이디어를 얻는다.
예술사에 대한 감수성은 세대를 초월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올리비에 가베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티유 블라지, 피터 뮐리에, 조나단 앤더슨 등 오늘날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간접적으로 예술을 해석하죠.” 이들은 예술 안에서 도상학 자체보다는 스타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지 탐구하며,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시각 언어를 통해 이야기한다. 샤넬의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는 루브르 전시 카탈로그에서 “예술과 패션 사이에는 깊은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아이디어가 형태가 되고, 손과 도구, 기계를 통해 실체가 되는 과정 그 자체죠”라고 말한다. 그가 창작의 영감을 얻는 대상은 르네상스 성당의 천장부터 고대 유적, 네덜란드 정물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예술과 패션의 교류는 오늘날의 패션에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루브르에서는 패션을 단지 디자이너의 자아나 브랜드 중심의 서사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영역인 역사와 맞닿게 하고 싶었죠.” 그리고 그는 럭셔리 산업의 후원이 미술관 운영에 필수적이지만, 미술관은 결국 누구에게나 열린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하며, 도시의 삶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확실한 것은 바야흐로 2025년, 패션 예술의 가장 화려한 무대 위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