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미술관 옆 ‘미술관옆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페트라 콜린스
페트라 콜린스의 작품 ‘리틀 프린스’, 사촌을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페트라 콜린스의 10대 시절 초기 작품들을 전시한 공간
세트 디자이너 니콜라 데 자르왱과 작업한 그의 대표작 ‘마스크’ 시리즈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 좋아하게 된 한국 음식이나 장소가 있나? LA에 대규모 한인 커뮤니티가 있어서 한국 음식을 늘 먹는 편이다. 본토에서 먹는 한국 음식은 또 다르다. 그래서 한국에 오면 마치 먹방 여행을 온 기분이 든다.(웃음) 가장 좋아하는 건 삼계탕이다. 비행 후에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집에서는 아플 때나 여행을 앞두고 먹곤 한다. 최근에는 냉면을 먹었다. 무더운 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가 차가운 국수를 먹으니 매우 만족스러웠다. 빙수는 아직 못 먹어봐서 꼭 먹어보고 싶다. 아, 소금빵도 좋아한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LA에서도 늘 다니는 한국 카페가 있을 정도다.(웃음)
이번에는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페트라 콜린스: fangirl>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전시 제목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나? ‘팬걸(fangirl)’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수집하는 이들이다.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나 자신이 바로 팬걸이다. 나는 10대 때부터 늘 무언가에 집착했다. 내 작업이 침실 벽이나 휴대폰 뒷면, 컴퓨터 화면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미술관의 하얀 벽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더 가까이 느끼고 흡수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전시장에 있는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과 그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면? 미술관 2층에 내가 10대 시절에 찍은 초기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렇게 전시된 건 처음인데, 진지하게 걸려 있는 걸 보니 재미있다.(웃음) 내 목소리를 찾아가던 시기라 모든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 공간을 꾸밀 때도 차가 지나가거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포함해 마치 교외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이 말이다. 특히 기억나는 건 사촌을 찍은 ‘리틀 프린스(Little Prince)’다. 해가 지는 헝가리 시골에서 태양을 배경으로 왕자처럼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여섯 살 무렵인데, 어린 나이에도 포즈가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었다. 촬영할 때 어떤 사람은 내가 만든 세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안다. 사촌은 무척 어렸는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최근 감명받은 전시나 아티스트가 있나? 폴 매카시(Paul McCarthy)의 작품이다. LA에서 그의 스튜디오에 들어갈 수 있는 전시가 열렸는데, 주제는 ‘백설공주(Snow White)’였다. 그는 158㎡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냈고, 실제로 그 안을 걸어 다니며 작품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스튜디오 안에 숲까지 재현한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한국에서 이름을 알린 건 블랙핑크, 뉴진스 같은 K-팝 아티스트와 협업한 덕분이다. 원래 K-팝에 관심이 있었나? 토론토에서 다닌 초등학교에는 한국인 이민자가 많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를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문구류나 스티커 같은 걸 좋아했다. K-팝을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인데, 20대 초반이 돼서야 K-팝이 얼마나 규모가 방대한지 제대로 이해했다. 나는 한국 문화가 헝가리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특히 글쓰기 방식이 그렇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 비슷한 정서를 느꼈다. 세계와 정치, 공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글쓰기 방식이 흥미로웠다. 언어는 다른 나라 말로 완벽히 번역할 수 없다. 헝가리어나 한국어처럼 한 단어에 민속적 색채와 의미가 겹겹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식주의자>를 읽고 나서 어떤 언어는 절대 다른 언어로 다 옮길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웃음)
헝가리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자랐으며 현재는 LA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당신 작업에는 종종 아시아적 감각이 스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와 정치가 문화를 형성한 과정에 관심이 많다. 어린 시절에는 소련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헝가리 애니메이션만 볼 수 있었다. 검열이 심한 환경에서도 특정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나온다는 점이 늘 인상 깊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화적 한계 안에서 무엇을 창조해내는지가 나에겐 큰 관심사다. 원래 역사를 좋아해서 어디에 가든 책을 읽고 탐구한다. 한국도 헝가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게 내가 느끼는 연결점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끌린다. 내 작업은 겉으로 보기엔 정치적이지 않지만, 사실 밑바탕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한국 문화에서 특히 흥미롭게 느끼는 부분이 있나? 영화다. 한국 영화만큼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 장르는 없는 것 같다. 슬픔을 밀도 높게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유머가 담겨 있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참 좋아한다. 스토리가 굉장히 진보적인데, 두 여성의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 놀라웠다. 미국에서는 그런 영화가 나오기 힘들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가 뭔지 궁금하다. 대답하기 무척 곤란하다! <아가씨>도 좋지만 좀 대중적인 영화이지 않나.(웃음) 영화는 아니지만 최근에는 <솔로지옥>이라는 리얼리티 쇼를 재밌게 봤다. 지금 떠오르는 건 <친절한 금자씨>인데, 더 색다른 답을 하고 싶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앱에 기록해두는 편인데 찾으면 알려주겠다.(웃음)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충분히 느껴진다.(웃음) 지난 3월, 당신의 브랜드 ‘아임 쏘리(I’m sorry)’가 한국에서 팝업 이벤트를 열었을 때 팬들의 반응을 직접 마주한 소감이 어땠나? 내 작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게 신기했다. 한국인이 예술을 사랑하고 수집한다는 점이 느껴져서 더 좋았다. 나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브랜드명에 유머와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평상시에 자주 하는 사과는 무엇인가? 캐나다에서 자랄 때는 입버릇처럼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물건을 내려놓을 때처럼 전혀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지금은 의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려고 한다.(웃음)
한국 사람들도 비슷하다.(웃음) 협업 디자이너와 캡슐 컬렉션을 선보이는 형태로 브랜드 운영 방식을 바꾸었다. 협업할 디자이너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언가? 내가 진짜 ‘팬’인 사람들과 협업하고 있다. 제니 팩스(Jenny Fax)나 미미 웨이드(Mimi Wade)를 예로 들면 오랫동안 그들의 작업을 동경했는데, 운 좋게도 내 세계로 불러들여 함께 무언가를 만들 수 있었다. 사실 협업은 내가 특히 즐기는 과정 중 하나지만, 자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브랜드를 통해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직접 초대해 협업하는 방식이 내겐 특별한 즐거움이다.
옷을 잘 버리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중 ‘절대 못 버린다’ 싶은 건 무엇인가? 사무실로 쓰려던 공간을 결국 옷장으로 바꿔버렸을 정도로 미친 듯이 옷을 모은다.(웃음) 맨 먼저 기억나는 건 2019년 멧 갈라 때 입었던, 내 몸에 맞춰 제작한 구찌의 라텍스 보디수트다. 파티장에서 팔을 움직였는데 갑자기 물을 뒤집어쓴 느낌이 들어서 ‘내가 술을 흘렸나?’ 했는데 땀이었다.(웃음) 하루 종일 라텍스를 입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몰랐던 거다. 같이 입은 드레스는 구찌 아카이브로 들어가서 아쉽게도 소장하지 못했다. 당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내 이름을 새겨서 만들어준 가방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작품은 동화적이면서도 기괴함이 스며 있다. 평소에 즐겨 보는 영화나 책은 어떤 장르인가? 영화를 많이 본다. 최근 1940~1950년대 누아르 영화를 매일 밤 봤다. 미장센이 정말 놀랍다. 모두 특수 효과가 아니라 손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나는 늘 색채에 집중해왔는데, 흑백영화의 빛 활용이 인상 깊었다.
작품에서 ‘공간’이 큰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공간을 만들 때 어느 선까지 관여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웃음) 나는 세트 디자이너와 아주 긴밀하게 일한다. 니콜라 데 자르댕(Nicholas Des Jardins)이라는 아티스트와 오래 함께 일했는데, 처음 같이 한 작업은 ‘마스크’ 시리즈였다. 그는 내가 모호한 아이디어와 레퍼런스를 보내도 완벽하게 내 마음을 읽고 방을 만들어냈다. 단순하면서도 기묘한 교외의 방이었는데 매우 놀라웠다. 이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단계가 됐다.
미우미우와 끌로에의 쇼나 캠페인에 등장하는 등 최근 모델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모델로서 카메라 앞에 설 때와 뒤에 설 때 어떤 차이를 느끼나? 완전히 다르다. 나는 빛과 사진에 대해 워낙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더 의식하게 된다.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따른다는 것, 그리고 그 피사체에게는 공감과 친절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웃음)
앞으로 더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지금도 여러 분야를 시도하고 있다. 사실 나는 원래 무용수였는데 결합조직 질환이 있어서 춤을 출 수 없게 됐다. 그때는 심지어 몸에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예술을 하고 싶은데, 몸이 도구가 되어주지 않았으니까. 결국 춤을 포기하고 사진으로 전환했다.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나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다. 아마 이런 경험 때문에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걸 즐기게 된 것 같다.
당신의 사진은 한 장만 봐도 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서사를 정지된 이미지 안에 불어넣나? 작업을 머릿속에서 구체화하는 방식이 궁금하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임마다 머릿속에 이야기가 있다. 사진은 멈춘 순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전과 후의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연작 사진은 일종의 시퀀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곧 발매할 책도 굉장히 시네마틱하다. 내가 해온 이야기 중 가장 서사적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 살짝 공개했다.
사진 속이 아닌 일상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공간은 어디인가? 침실이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안전한 공간이었고, 자연 속에 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재미있는 건 내 침실은 사진 속 공간과 달리 완전히 하얗고 단순하다는 사실이다.(웃음) 어릴 땐 벽지가 가득한 집을 꿈꿨는데 결국 깨끗한 공간이 필요하더라. 그래야 상상하고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으니까. 벽은 하얗고 바닥은 연한 파란색 카펫이 깔려 있다. 창가에는 새들이 자주 날아온다. 아주 단순하다.
작업하며 늘 동심을 잃지 않는 듯하다. 일상에서 아직도 아이처럼 즐기는 순간이 있나? 미니어처 모으는 걸 좋아한다. 내 안의 동심을 살려두는 방법이다. 박물관이나 신기한 전시를 찾아다니는 것도 즐긴다. 교토에 갔을 때는 대형 기차 박물관과 미니어처 기차 박물관을 하루에 다 돌아봤고, 실제 기차도 탔다. 대중교통은 좋다.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니까.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기차를 타고 간 적도 있다.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이 자기 전용 열차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도 언젠가 그런 열차를 갖고 싶다.(웃음)
어떤 미니어처를 모으나? 인형의 집. 가능하면 집 안에 작은 마을을 만들고 싶다. 이번 전시에도 미니어처 방들을 마련해놨다. 크기라는 개념을 비트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디지털화와 AI 이미지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에 사진가로서 ‘손으로 찍는 경험’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뭘까? 창작은 서로 소통하고 성장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연결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요즘 당신의 휴대폰 앨범에 가장 많은 사진은 뭔가? 스크린샷이다. 원숭이, 멋진 램프···. 시시콜콜한 것을 모아둔다. 재밌는 점은 휴대폰으로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웃음) 동생이 늘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는데, 찍어보면 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가 찍으면 망해”라고 말하곤 한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대중의 관심 속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무엇인가? 유명세를 얻는 건 외로운 일이다. 인터넷 등 소통의 창구가 워낙 열려 있어서 오히려 경계가 없달까. 아이돌이나 팝 스타는 특히 더 그렇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일이니 말이다. 작업할 때도 그런 고립과 외로움을 탐구하곤 한다.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페트라 콜린스는 결국 무엇으로 남고 싶은가? 그냥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싶다. 처음부터 아티스트로 시작했고 방식이 달라져도 결국 내가 하는 건 예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