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도시이자 불가리가 태동한 로마에서의 삶은, 저의 가장 근원적 열정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어요.” 2023년 불가리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 하우스에 입성한 지슬랭 오크레망(Gislain Aucremanne). 그는 1백40여 년에 걸쳐 축적된 불가리의 찬란한 유산 속에서 아직 조명되지 않은 또 다른 서사를 발굴하고 채집하며 과거와 현재를 유려하게 연결하고 있다. 풍요로운 아카이브를 누구보다 깊이 탐구하며 탁월한 미감과 통찰을 공유하는 그가 바라보는 불가리의 유산, 그리고 헤리티지가 지닌 힘과 의미에 대하여.

에메랄드와 자수정, 튀르쿠아즈, 다이아몬드의 조화로 불가리의 환상적 색채 미학을 전하는 ‘비브’ 네크리스.

Gislain Aucremanne

BVLGARI Heritage Curator Director

MC 당신은 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문화 기관과 주얼리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쌓았어요. 이후 2023년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 불가리 하우스에 합류했죠. 이곳에 합류하기 전과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불가리의 심장이자 영원의 도시인 로마에서 보내는 일상은 어떤 풍경으로 다가오나요?

Gislain Aucremanne 로마에서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저의 가장 근원적 열정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는 대학에서 고대 미술사를 전공했고, 그중에서도 로마 고대 문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죠.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한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고대 유적과 매혹적인 바로크 건축물, 수많은 걸작을 품은 박물관들 속에서 일상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로마에는 도시 전체를 감싸는 특별한 빛이 존재해요. 이 빛은 매 순간 저를 흥분시키고, 로마만의 독보적 아우라는 수시로 감탄하게 하죠. 로마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저에게 메종 불가리로의 회귀를 의미했어요. 2010년부터 약 1년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불가리의 첫 대규모 국제 회고전에 함께했죠. 이때부터 이미 로만 하이 주얼러 불가리의 역사와 미학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어요. 그래서 불가리라는 커리어의 새 장을 매우 큰 열정과 기대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MC 메종의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 임명된 직후, 가장 먼저 마주한 과제는 무엇이었나요? 새로운 역할을 맡아 특히 공을 들인 지점, 그리고 가장 먼저 정립하고자 한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GA 이곳에 온 후 제가 처음 맡은 업무 중 하나는 불가리의 방대한 역사 속에서 아직 조명되지 않은 또 다른 서사를 발굴하는 일이었어요. 마치 미술사학자처럼 메종의 스타일을 연구하듯 접근했죠. 고유한 특징과 시간에 따른 진화,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걸작들을 새롭게 해석했어요. 예를 들어 카보숑 컷이나 투보가스 공법(Tubogas, 1940년대 후반부터 불가리 워치와 주얼리 메이킹에 사용한 대표적인 기술로, 손목이나 손가락을 따라 유연하게 휘감기며 탁월한 착용감과 관능미를 완성함)이 어떻게 불가리만의 스타일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는지 심층 연구하는 과정은 특히 인상적이었죠. 최초의 아카이브 자료를 파헤치고, 헤리티지에 녹아든 메종의 결정적 순간들을 추적하기도 했어요. 한편, 코로나19 이후 메종은 대규모 회고전을 위해 새로운 전시 일정을 마련하길 원했어요. 그 첫 단계는 로마 콘도티 거리 10번지에 자리한 역사적인 부티크 내부에 헤리티지 갤러리 ‘도무스(DOMVS)’를 개관하는 일이었어요. 이 공간은 누구나 둘러볼 수 있는 친밀한 뮤지엄 형태로 2024년 불가리 창립 140주년을 기념해 오픈했어요. 이곳에서 매년 두 차례 정도 헤리티지 피스를 중심으로 한 전시를 선보이죠. 두 번째 단계는 도쿄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불가리 칼레이도스: 색, 문화 그리고 공예>였어요. 이 전시는 컬러를 주제로, 서로 다른 시대의 주얼리와 현대미술 작품을 나란히 선보이며 하나의 색채 언어로 연결된 매혹적인 여정을 제안했죠.

MC 1백40여 년에 걸쳐 쌓은 불가리의 풍부한 유산을 내밀히 들여다보며 수많은 영감과 감동을 마주할 것 같아요. 메종의 헤리티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이로서 불가리가 이토록 오랜 시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나요?

GA 불가리의 역사를 통해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메종의 창의성이 진정성과 대담성이라는 가치에서 시작했다는 거예요. 특히 로마에서 탄생한 불가리가 프랑스 주얼리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매우 진정성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프랑스 주얼리는 플래티넘에 화이트 다이아몬드를 조합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어요. 하지만 로만 하이 주얼러 불가리는 로마 하늘의 따뜻하고 찬란한 태양 같은 빛을 주얼리로 구현했죠. 옐로 골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아름다운 컬러 조합을 찾아내는 데 열정을 쏟았어요. 이는 로마 곳곳에 자리한 팔라초의 파사드, 다채로운 대리석 장식, 그리고 메종이 사용하는 젬스톤의 무한한 색채 스펙트럼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요. 대담성 역시 불가리를 정의하는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해요. 불가리는 관습적인 길을 따르기보다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섰고, 기존 기술의 한계를 거부했어요. 예를 들어 산업계에서 기원한 투보가스 공법은 일상적 요소를 매혹적 주얼리로 변모시킨 대표적인 사례죠. 개인적으로 큰 애착을 느끼는 모네떼(Monete) 주얼리 컬렉션 역시, 더하기보다 뺌으로써 혁신을 이룬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젬스톤 대신 고대 동전을 사용함으로써 1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담아냈으니까요.

헤리티지를 비전적으로서 재해석하는 불가리 이터널 컬렉션. 그 첫 챕터로 1942년 아카이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2026년에 선보인 비미니 브레이슬릿.

MC 메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가교로서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확대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일 것 같아요. 2026년 현재,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서 직면한 도전 과제는 무엇인가요?

GA 헤리티지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유산이에요. 이는 난해한 연구 대상으로 남을 것이 아니라, 감정과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활성화되어야 하죠. 헤리티지 컬렉션에 속한 피스들은 그 시대를 증언하는 동시에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되어야 하고, 또 미래의 창작을 위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야 하니까요. 최근의 사례로 ‘불가리 이터널(Bvlgari Eternal)’ 컬렉션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프로젝트에서 헤리티지 팀은 주얼리 부서와 긴밀히 협업하며, 과거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아카이브를 관통하는 라인을 재해석했어요. 이 새로운 창작 여정의 첫 번째 챕터, ‘비미니(Vimini)’는 1942년에 제작한 수수께끼 같은 브레이슬릿에서 출발했어요.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의 이 주얼리는 역사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현재에 단단히 발을 디딘 결과물이죠. 이 협업을 통해 우리는 메종의 아카이브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잊혔던 보석 같은 작품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어요. 올해도 이런 부분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에요. 과거와 현재는 결코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끊임없이 풍요롭게 만드니까요.

MC 방대한 헤리티지를 다루는 자리인 만큼 분명한 기준이 필요할 듯해요. 당신이 일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가치 혹은 흔들림 없이 지켜온 원칙은 무언가요?

GA 불가리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서 저는 아카이브, 컬렉션, 전시, 교육 이 네 가지 영역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카이브는 메종의 근원으로서 모든 작업의 기준점이 되죠. 오늘날 1천 점이 넘는 주얼리, 워치, 프레셔스 오브제로 구성된 헤리티지 컬렉션은 불가리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어요. 또한 새로운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죠. 전시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와 공유의 장이에요. 문화 기관이나 일부 부티크에서 여는 전시는 불가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지식은 전해지고 공유되어야 해요. 내부적으로는 팀과 함께, 외부적으로는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강연과 콘퍼런스를 통해 이런 부분을 대중과 공유하고 있죠.

MC 지난해 10월, 도쿄 국립신미술관에서 열린 <불가리 칼레이도스: 색, 문화 그리고 공예> 전시를 마주하며 당신이 언급한 “불가리는 진정한 색의 예술가”라는 정의에 깊이 공감했어요. 저 역시 직접 전시를 살피며 메종의 찬란한 색과 헤리티지에 다시 한번 감탄한 기억이 생생해요. 성황리에 마친 이 전시의 피드백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GA 전시 기간 동안 도쿄 국립신미술관 퍼블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강연을 진행하면서 관람객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전시의 주제로 색을 선택한 점이 연령이나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깊이 공명했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 점이 매우 인상 깊었어요. 주얼리에서 색은 가장 보편적인 주제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거든요. 이 점이 관람객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번 전시가 거둔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또한 이번 전시에는 이탈리아 현대 작가 1명과 일본 작가 2명이 함께 참여해 양국을 잇는 의미 있는 문화적 다리를 놓았어요. 특히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카야마 아키코(Nakayama Akiko) 작가와 나눈 교류는 매우 감명 깊었어요. 그의 설치 작품은 전시의 마지막 마스터피스인 네크리스와 직접적인 대화를 이루며 관람객을 색채 우주로 이끌었죠. 이 공간에서 여러 관람객이 ‘진정한 색의 예술’이라는 개념을 체험했다고 전해주었을 때 큰 감동을 받았죠.

MC 3백여 점의 작품 가운데 시간이 지나도 다시 조명하고 싶은 단 하나의 피스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GA 모든 작품 가운데 단 하나를 꼽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꼭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저는 1954년에 제작한 옐로 골드 뱅글을 강조하고 싶어요. 중앙에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가 놓여 있고, 이를 바게트 컷과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가 둘러싸고 있죠. 여기에 루비 카보숑이 표면 전체에 더해져 더욱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이룬 작품이이에요. 볼륨감과 대담한 컬러 대비가 돋보이는 이 주얼리는 불가리 스타일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보여줘요. 미학적 힘을 넘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완벽하게 구현한 최상의 장인정신 역시 인상적이죠. 그리고 뱅글 내부에는 착용자만이 알 수 있는 골드 스파이럴 장식이 숨어 있어요. 이 작품의 최초 소유자가 로마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라는 점도 흥미롭죠.

MC 2년 전, 서울에서 만난 불가리 부회장 라우라 부르데제(Laura Burdese)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비제로원을 선물받은 일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어요. 이처럼 당신에게도 불가리와 맞닿아 있는 사적인 추억이나 특별한 순간이 있나요?

GA 저 역시 불가리와 사적인 추억을 공유하는 타임피스가 하나 있어요. 1970년대 중반에 탄생한 불가리 불가리 워치 컬렉션은 오늘날까지도 메종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하고 있죠.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서 저는 불가리의 역사를 증언하는 빈티지 타임피스를 착용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어요. 빈티지 피스를 연구하던 중 198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한 점을 발견했는데, 마침 제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시계더군요. 그 순간, 이 시계가 나의 마흔 번째 생일을 기념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선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현재 이 시계는 거의 매일 착용하는 데일리 아이템이에요. 마치 저 자신의 이야기와 메종의 역사를 깊이 있게 연결해주는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져요.

MC 마지막으로, <마리끌레르 코리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불가리의 헤리티지 피스를 통해, 혹은 메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가운데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GA 2025년에 푸투라서울에서 열린 <세르펜티 인피니토> 전시를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어요. 제가 처음 서울을 방문하는 계기가 된 이 전시에서는 불가리의 상징인 세르펜티, 즉 뱀 모티프가 한국 작가들에 의해 회화, 옻칠, 조각, 비디오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방식으로 해석되었어요. 헤리티지 큐레이터 디렉터로서 이러한 만남과 대화의 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에요. 경계를 넘는 공유의 공간, 그리고 예술이 공통의 언어이자 열정으로 구현되는 특별한 순간이기 때문이죠. 한국은 저에게 그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어요.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1969
One of a Kind Sautoir

옐로 골드에 애미시스트, 튀르쿠아즈, 시트린,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의 대담한 조합으로 환상적인 불가리의 색채와 정신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아카이브 히어로 피스, 원 오브 어 카인드 소투아르 네크리스.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에메랄드 원석이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1961
Seven Wonders Neckless

총 7개의 장엄한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빚어낸 걸작, 전설적인 세븐 원더스 네크리스와 초기 드로잉 스케치. 이 아카이브 피스는 이탈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모니카 비티(Monica Vitti),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 등 시대의 아이콘들이 착용해 화제를 모았으며, 현재는 불가리 헤리티지 컬렉션을 대표하는 피스로 하이 주얼리의 역사에 명징하게 자리하고 있다.

1967
Serpenti Bracelet Watch

변화와 부활의 상징인 불가리의 영원한 아이콘, 뱀 모티프의 다채로운 변주를 감상할 수 있는 이미지 컷과 세르펜티 브레이슬릿 워치. 특히 옐로와 블랙의 섬세한 에나멜링과 색대비, 다이아몬드의 조화가 돋보이는 이 모델은 손목을 유연하게 감싸며 관능적인 실루엣을 이룬다. 메종을 대표하는 헤리티지 피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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