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앤더슨이 2027 봄여름 디올 맨즈 컬렉션에서 격식과 일탈이 공존하는 새로운 디올의 언어를 선보였습니다.


폭염과 파라솔, 오히려 완벽한 아침
지난 24일 아침 9시, 파리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Musée Nissim de Camondo)에서 디올 맨 2027 봄 컬렉션 쇼가 이른 시간에 막을 올렸습니다. 40도를 웃도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오후 2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기존 쇼가 이틀 전 전격 변경된 것이죠. 묘하게도 그 이른 시각은 이번 컬렉션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졌습니다. 밤새 파티를 즐기다 그 길로 나타난 듯한 모델들이 런웨이 위로 등장한 것이죠.
이번 컬렉션의 핵심은 ‘Come Undone’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완벽함에서 한 발 비켜난 우아함이었습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최근 런던을 중심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레이브(Rave) 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는데요. 밤새 음악에 몸을 맡긴 청춘들의 자유분방함과 디올이 오랫동안 품어온 귀족적인 우아함이 한 컬렉션 안에 자연스럽게 공존했습니다. 디스코 볼처럼 빛나는 트라우저와 드레싱 가운을 연상시키는 코트, 속이 비치는 시스루 턱시도와 워싱 쇼츠의 조합은 격식과 일탈 사이를 오가는 새로운 남성상을 보여주었죠.


불완전함의 미학, 다듬어지는 디올의 언어
조나단 앤더슨이 지난해 데뷔 컬렉션에서 18~19세기 의복을 복원에 가깝게 재현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더 가볍고 현실적인 방향을 택했습니다. 과감한 실험 대신 옷장 속에 실제로 자리할 법한 아이템들이 주를 이루었죠. 이번 컬렉션의 핵심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를 자유롭게 섞는 데 있었는데요. 조나단 앤더슨은 영국 뮤지션 프레드 어게인(Fred again)의 작업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번 쇼를 위해 프레드 어게인을 음악 감독으로 직접 섭외하기도 했죠. 기존의 음악을 샘플링하고 재해석해 새로운 곡을 만들어내듯, 이번 컬렉션 역시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을 한데 엮어 새로운 분위기를 탄생시켰습니다.
1979년 디올 오뜨 꾸뛰르에서 영감 받은 스카프 모티프부터 18세기 신사복에서 차용한 실버 자수와 가볍고 투명한 소재로 재해석된 전통적인 턱시도까지. 런웨이에는 디올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변화를 주는 컬렉션이 등장했습니다. 디올의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오늘날의 옷으로 번역하려는 과정이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죠. 쇼가 끝난 뒤 앤더슨은 “레이브 문화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며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이번 컬렉션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는데요. 새벽 7시의 센 강변에서 저마다의 스타일로 차려입고 모이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변화하는 에너지가 이번 컬렉션에 반영된 셈입니다. 디올의 유산 위에 오늘날 청춘들의 자유로움을 겹쳐 놓으며, 격식과 일탈의 경계를 허문 이번 컬렉션은 브랜드 역사와 동시대적 감각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새로운 시그니처의 등장과 상징적인 테일러링
이번 시즌 가장 주목할 요소 중 하나는 새로운 테일러링입니다. 앤더슨은 빈티지 재킷에서 영감 받은 ‘보비(Bobby) 수트’를 중심으로 컬렉션을 구성했는데요. 기존 디올 수트의 단정함 대신 여유로운 실루엣을 강조했고, 시폰 소재와 핀스트라이프 패턴을 활용해 전통적인 남성복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총 66개 룩으로 구성된 이번 쇼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스모킹 재킷이었는데요. 짧은 봄버 재킷부터 길게 떨어지는 코트까지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됐고, 데님과 니트웨어에도 앤더슨 특유의 자유로운 감각이 더해졌죠. 여기에 반짝이는 스팽글 팬츠와 골드 쇼츠, 디스코 볼에서 영감 받은 부츠까지 등장하며 지난 시즌부터 이어 온 글램 무드도 한층 강해졌습니다. “패션은 즐거워야 한다”는 앤더슨의 말처럼 이번 컬렉션 역시 정해진 정답보다는 실험과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유산이 잠든 공간, 역사가 된 쇼장
이번 쇼가 열린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 역시 컬렉션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모이즈 드 카몽도(Moïse de Camondo)의 옛 저택인 이곳은 18세기 장식 예술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공간인데요. 2030년까지 복원 공사로 문을 닫은 상태지만,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이 평생 매료됐던 18세기 미학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죠. 이번 쇼를 위해 저택 내부에는 컬렉션 룩을 입은 모델들을 그린 유화 신작이 걸렸고, 고풍스러운 장식 예술품이 런웨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앤더슨은 복원 공사가 끝나지 않은 공간 자체가 이번 컬렉션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는데요. 완벽하게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은 이번 시즌이 추구한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