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의 기쁨은 하루면 잦아들고, 필요한 건 한 수 앞을 보는 감각뿐이다. ‘페이커’ 이상혁은 비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한다.

오랜 시간 e스포츠 경기를 지켜본 팬들에게 ‘페이커’는 이름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됐습니다. 스스로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고 실감할 때가 있나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다만 누군가 그렇게 말할 때 ‘아, 그렇게 됐구나’ 하고 한 번씩 실감하는 정도예요. 그 이상의 특별한 감정은
없습니다.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했고, 올해도 아시안게임 같은 큰 대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또 한 번 우승에 도전하는 것이 지금의 이상혁 선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프로의 세계에서 우승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어렵잖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승을 향한 열망은 비슷합니다. 지금 저에게 우승은 제가 얼마나 준비하고 성장했는지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승 자체보다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준비하고 삶을 살아왔는지가 중요합니다.
우승이 삶의 자세와 연결되는 건가요?
제 목표는 선수로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다른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계속 발전하고 배우는 것뿐이에요.
세계 최고의 e스포츠 선수에게도 여전히 성장할 부분이 남아 있나요?
항상 남아 있습니다. 최고 수준의 선수들과 경쟁하다 보면 배울 점이 계속 보이고, 부족한 부분도 늘 있어요. 그래서 성장에는 끝이 없다고 느낍니다.
스스로도 미드 라이너를 넘어 선수로서 세계 최고라는 자각이 있나요?
많은 대회에서 우승한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 자리에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불과 몇 달 전의 우승도 결국 몇 달 전 일이고, 지금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우승이 항상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상태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할지를 더 많이 고민합니다.
패한 경기는 어떻게 복기하나요?
경기에서 패배하면 항상 피드백을 하고, 스스로 왜 졌는지를 많이 분석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화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선수 개개인의 실수도 있었을 것이고, 저 역시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피드백을 할 때 겉으로 드러난 흐름에 머무르지 않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짚어내 철저히 분석하려고 합니다.
최근 메타에서는 바텀 구도와 초반 주도권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지금의 미드 라이너는 팀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최근 메타에서는 미드보다 다른 라인의 영향력, 특히 후반에 다른 라이너들이 미치는 영향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미드는 예전보다 전체 흐름을 조율하고 각 라인을 연결하는 역할이 중요해졌어요. 과거에는 미드의 후반 잠재력이 컸으니까 게임을 자기 위주로 풀어가면 됐기에 오히려 단순한 면이 있었죠. 지금은 경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살피며 무엇이 중요한지 계속 판단해야 해요. 그만큼 미드의 역할이 더 복잡해졌다고 느낍니다.
게임 안에서뿐만 아니라 팀 내에서 맡는 역할에도 변화가 있나요?
예전에는 단순히 게임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것뿐만 아니라 선수들이 원활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T1은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할 만큼 상징적인 팀입니다. 그만큼 소속 선수로서 더 잘해야 하고, 말과 행동에서도 높은 기준을 요구받는다는 부담감은 없나요?
외부의 기대나 요구에 크게 부담을 느끼는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분이 보내주시는 관심을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런 관심은 경기를 준비하고 일상을 보내는 데에도 큰 의미가 되고요. 늘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유튜브 쇼츠나 댓글에서 자신의 경기가 언급되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최근 쇼츠에 달린 댓글을 보면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영상에서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다른 영상에서는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영상이나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에 변별력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수없이 반복하고 경험을 쌓다 보면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경기 중 ‘지금 공격할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감각은 어떻게 단련된다고 생각하나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이 유리하면 조금 더 안정적으로 플레이해도 되고, 불리할 때는 공격적으로 경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판단은 프로 게이머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상황을 인지하는 감각이 생깁니다. 저 역시 열심히 연습하고 반복하다 보니 그런 감각이 발달한 것 같습니다.
경기 도중에 곧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미리 그려지나요?
그렇죠. 한 경기를 30분 정도 진행하는데, 그런 경기를 수천 판, 수만판 하다 보면 비슷한 패턴을 학습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다음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관적으로 “몇 수 앞을 내다보세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어요?
한 수 앞만 내다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한 수 다음에 어떤 수가 이어질지를 빠르게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T1의 역사를 함께 이끈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떠나고 새로운 선수가 합류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어떤 기분이 드나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선수가 오면 그 선수와 잘 해보려 노력하고, 오래 함께한 선수와는 잘 맞는 호흡만큼 다시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합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승리하면 박수받고 패배하면 비판받는 승부의 세계에서 10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승패를 떠나 스스로 지키는 기준이나 원칙이 있나요?
연차가 쌓일수록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외부에서는 경기의 흐름이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승패는 제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누구 한 사람이 혼자 잘한다고 되지 않는 팀 게임이고, 어느 정도 운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보다 연습에서 어떻게 준비해 승리 확률을 높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그런 제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사람들은 ‘페이커’가 이기는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기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제가 항상 이길 거라고 믿어주시는 건 응원이라기보다 기대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습니다. 저도 경기에서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고, 제 퍼포먼스에 만족하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결국 제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더 많이 이기도록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프로 게이머가 된 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사회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책임감을 자각한 뒤 행동이 달라졌나요?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원래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에요. 언행에 유의하고 예의를 갖추는 태도는 공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지켜야 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임감을 의식해 특별히 행동을 바꾸기보다 평소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유지해온 것 같습니다.



지난해 T1과 2029년까지 장기 계약을 맺었고, 커리어를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 있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팀에서 계속 활동하는 것이 본인에게 중요한가요?
제가 T1에 오랫동안 있었던 이유는 T1이 제게 많은 도움을 줬고, 저 역시 팀에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T1은 <스타크래프트> 시
절부터 최고의 구단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그런 환경 덕분에 저도 오랫동안 한 팀의 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비슷한 훈련과 경기를 반복하다 보면 지겹다고 느낄 때도 있겠죠?
아주 가끔 지겹다고 느껴요. 그럴 때는 게임에 더 집중하고 제가 원하는 목표를 다시 떠올리죠. 그러면 같은 게임도 새롭게 느껴지고, 오히려 더 몰입하게 되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발전할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낄수록 더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2018년 무렵에 나이 때문에 기량이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나요?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 때문에 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외부에서 모두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프로 게이머는 20대 후반이면 은퇴하거나 실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저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나요?
그 이후로 책을 읽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기량을 떨어뜨리는 것은 나이 자체라기보다 같은 일을 오래 반복하며 생기는 권태감이나 무기력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나이를 두려워하기보다 익숙해서 무뎌지지 않도록 경계하며, 계속 배우고 몰입하는 데 집중합니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우승했을 때 기쁨보다 안도감을 먼저 느낀다고 이야기한 적이있습니다. 요즘도 그런가요?
안도감도 있고 기쁨도 있어요. 경기가 끝나면 경쟁도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 안도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동안 준비한 것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기쁨도 느낍니다.
우승의 기쁨은 얼마나 오래가나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루나 이틀 가는 것 같아요. 우승을 많이 한 영향도 있겠지만, 원래 기쁜 일이 있어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는 편입
니다.





지나간 일을 잘 잊는 성격이 멘털 관리에도 도움이 되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나간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에요.
경기에서 큰 실수를 했을 때도 그 장면이 오래 남거나 그 때문에 불안해질 때는 없나요?
예전에는 그런 실수가 오래 남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 무렵부터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마음이 줄었고, 그 점에서 성장했다고 느낍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를 마주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이미 지나간 일을 붙잡거나 후회하기보다, 그다음에 무엇을 할 지를 생각합니다.
주변에서는 ‘페이커’를 두고 한결같이 잘하고, 한결같이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본인만 느끼는 지난 13년간의 변화도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과거보다 지금의 제가 여러 면에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편은 아니라서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지만, 적어도 나빠진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조금씩이라도 나날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올해도 큰 대회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예년과 비교해 더 힘든 도전이라고 느끼나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만만찮았습니다. 올해라고 특별히 다르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