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e스포츠는 오래된 친구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을 이루는 한 조각이다. e스포츠 컬렉터들이 수집하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 순간의 열기와 추억, 그리고 시간이 켜켜이 쌓인 흔적이다. 플레이가 끝나도 컬렉팅은 계속되고, 그 컬렉션은 게임을 삶의 일부로 이어주는 가장 개인적인 방식이 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자신만의 e스포츠 문화로 만들어가는 4명의 컬렉터를 만났다.
T1 페이커 선수 아이템 컬렉터
김영명·회사원


페이커 선수와 관련된 아이템을 오랫동안 꾸준히 모아왔죠. 컬렉션의 시작이 된 첫 아이템과 그때의 기억이 궁금합니다.
처음으로 산 건 페이커 선수가 사용하던 레이저의 데스에더 마우스였어요. 당시 학생이라 살 돈이 없어서 부모님을 한참 졸라서 구입한 기억이 나네요.(웃음) 10년 넘는 시간 동안 게임 할 때도, 일할 때도 항상 그 마우스를 썼어요. 그 이후로 페이커 선수의 아이템들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어요.
페이커 선수의 어떤 모습을 보고 e스포츠에 열광하게 됐나요?
페이커 선수를 계기로 e스포츠의 세계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페이커 선수를 좋아하는 걸 넘어서 존경하게 된 건 우승할 때보다 오히려 패배의 순간이었어요. 글로벌 무대에서 아쉽게 패한 뒤에도 좌절하기보다 다시 연습하고 도전하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거든요. 그때 깨달았죠. e스포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실패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신의 한계를 깨는 스포츠라는 걸요.
그 경험을 계기로 e스포츠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e스포츠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저한테 e스포츠는 성장기를 함께 보낸 오래된 친구 같아요. 제 또래들처럼 ‘리그 오브 레전드’ ‘배틀그라운드’ ‘오버워치’ 등 다양한 게임을 즐기면서 자랐어요.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보낸 학창 시절의 기억부터 선수들의 도전과 성장을 응원해온 시간까지, e스포츠는 언제나 제 삶 곁에 있었고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됐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소장품이 있다면요?
가장 애착이 가는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용돈을 모아서 처음으로 직접 산 2016 FILA 페이커 마킹 유니폼이에요. T1의 중요한 경기마다 매번 그 유니폼을 입고 응원했거든요. 그래서 경기의 치열함이나 응원의 열기, 우승의 순간이 유니폼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T1의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 유니폼을 입고 응원해요.

‘리그 오브 레전드’ 역사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템을 하나만 꼽는다면요?
2013년 페이커 선수의 데뷔 시즌 유니폼이에요. 이보다 상징적인 아이템이 또 있을까요? 현재의 페이커를 있게 한 모든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잖아요. 수많은 우승과 기록, 그리고 지금의 T1을 만들어낸 서사가 모두 그 유니폼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페이커 선수 아이템 컬렉터로서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가 지금까지 모은 컬렉션을 진열해둔 방을 한참 바라볼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페이커 선수와 T1을 응원하며 함께 보낸 시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 들어요. 저의 컬렉션은 좋아하는 우상을 오래 응원하며 쌓아온 시간을 기록한 아카이브예요. 그럴 때마다 컬렉팅을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FIFA’ ‘EA SPORTS FC’ 시리즈 컬렉터
임형철·축구 해설위원


옛 ‘FIFA’ 시리즈부터 현재의 ‘EA SPORTS FC’ 시리즈까지 한 편도 빠짐없이 컬렉팅해왔죠. 생애 첫 번째 게임을 만난 순간은 언제인가요?
2002 한일 월드컵 직후였어요. 대한민국 온 국민이 축구 열기로 들떠 있는 시기였는데, 그때 생애 처음으로 ‘FIFA 2002’를 샀어요. 제 컬렉션의 시작점이 된 게임이죠. 그즈음부터 자연스럽게 시리즈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플레이했어요. ‘EA SPORTS FC’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후로도 매년 신작을 모았어요.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간들이 어느새 제 컬렉션이 됐네요.
축구 해설위원으로서 피지컬 스포츠를, 축구 게임 컬렉터로서 e스포츠를 모두 경험해왔죠. 두 스포츠를 관통하는 매력은 무엇인가요?
두 스포츠 모두 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와 승부욕을 느낄 수 있어요.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가 많은데, 끝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역시 큰 자극을 받아요. 특히 e스포츠는 아주 짧은 순간의 판단과 집중력이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그 긴장감과 몰입감은 피지컬 스포츠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어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게임 컬렉션 가운데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게임을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가장 특별한 게임은 원년작인 ‘FIFA International Soccer’예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건 루드 굴리트 선수가 커버를 장식한 유럽 출시 버전이고요. 앞으로 플레이스테이션 버전의 디스크 패키지가 점차 사라질 예정이라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실물 패키지를 꾸준히 모아온 사람으로서 e스포츠 시대의 변화를 가장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해요.

축구 게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임이 있다면요?
저는 ‘FIFA 07’ 국내 플레이스테이션 2 출시 판을 꼽고 싶어요.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이던 김남일 선수가 국내 커버 모델로 등장했는데, 정규 ‘FIFA’ 시리즈에서 국내 선수가 커버를 장식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죠. 그만큼 한국 축구와 ‘FIFA’ 시리즈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던 시기를 상징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오랜 시간 쌓아온 컬렉션이 마침내 꿈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제가 오랫동안 모아온 ‘EA SPORTS FC’ 시리즈 컬렉션을 e스포츠 관계자분들이 알아봐주셨을 때 가장 벅찼어요. 그저 게임이 좋아서 하나씩 모았을 뿐인데, 그 시간이 결국 제가 ‘EA SPORTS FC’ 시리즈의 한국어 해설위원이 되는 밑거름이 됐죠. 축구 해설위원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 게임 속에서 제 목소리로 경기를 전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거든요. 컬렉터로서도, 해설위원으로서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죠.
레트로 게임·콘솔 컬렉터
민경록·레트로 게임 숍 ‘가족오락관’ 대표


향수를 자아내는 각종 레트로 게임과 콘솔 게임기들을 컬렉팅해왔죠. 컬렉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10여 년 전 일본 여행에서 아키하바라의 한 레트로 게임 숍에 들른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세가의 16비트 비디오게임 콘솔인 메가 드라이브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문득 떠올랐어요. 잊고 있던 시간을 다시 마주한 기분이었죠. 메가 드라이브를 시작으로 패미컴, 슈퍼 패미컴, PC 엔진 듀오처럼 어린 시절의 로망이던 게임기들을 하나둘 찾아 모았어요. 단순히 오래된 게임기를 모으는 게 아니라, 제가 성장해온 시대의 추억과 게임 문화를 컬렉팅한 거죠.
현대 게임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운 레트로 게임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옛 시절의 비디오게임은 중간 저장 기능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게임의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몇 시간이고 한 게임을 붙잡고 클리어할 때까지 플레이해야 했죠. 다소 불편했지만, 오히려 그만큼 한 게임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으면서 게임에만 매달렸던 순간 자체가, 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낭만이었던 것 같아요.
컬렉션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특별한 게임을 꼽는다면요?
저에게는 ‘바람돌이 소닉 2’가 가장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어린 시절 처음으로 엔딩을 본 게임이거든요. 가족들이 TV를 보려고 하는데도 눈치를 보면서 몇 시간씩 TV 모니터 앞에서 끝까지 플레이했어요. 최근 그 게임을 다시 구해서 어릴 때처럼 엔딩까지 몇 시간 동안 했는데, 아무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열두 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어요.(웃음)

e스포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레트로 게임이 있다면요?
‘스트리트 파이터 2’는 e스포츠의 초석이 된 레트로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e스포츠의 토대와도 같은 플레이어 간 1:1 경쟁을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작품이거든요. 승자에게는 승리의 쾌감을 안겨주고, 패자에게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죠. 오락실에서 시작한 이 게임은 이후로 온라인 대전, 세계 규모의 토너먼트로 확장됐어요. 게다가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의 e스포츠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국가별로 경쟁하는 스포츠가 됐죠. 그런 점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는 e스포츠의 시작을 상징하는 게임이에요.
게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레트로 게임 숍 ‘가족오락관’으로 이어졌어요. 컬렉터로서 가장 벅찬 순간은 언제였나요?
오랫동안 좋아한 레트로 게임들을 다시 모아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인 ‘가족오락관’을 열었을 때 가장 벅찼어요. 어린 시절 제게 행복을 안겨줬던 게임들이 이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추억을 선물해준다는 게 무척 뿌듯해요.
‘포켓몬스터’ 굿즈 컬렉터
신보근·디자이너


어린 시절부터 ‘포켓몬스터’ 게임과 굿즈를 차곡차곡 모아왔죠. 처음 ‘포켓몬스터’를 접했을 때 어떤 매력에 빠졌나요?
초등학교 1학년 때 TV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포켓몬스터’를 접했어요. 포켓몬 마스터가 되기 위한 지우와 피카츄의 모험에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캐릭터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대결, 포켓몬과 포켓몬 트레이너가 쌓아가는 우정에 단숨에 매료됐죠. 실제로 포켓몬이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면서 과학자를 꿈꿀 정도였으니까요.(웃음)
‘포켓몬스터’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비디오게임, 트레이딩 카드 게임, 만화, 영화처럼 다양한 미디어 프랜차이즈예요. 그중에서도 게임을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처음으로 돈을 모아 게임기를 산 이유도 오직 ‘포켓몬스터’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어서였어요. ‘포켓몬스터’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뿌리가 게임이어서 출발점부터 함께하고 싶었거든요. 지금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꼭 플레이하는데, 매번 새로운 포켓몬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서 늘 기대하게 돼요. 그렇게 제가 처음으로 전 시리즈를 모은 게임도 ‘포켓몬스터’ 시리즈예요.
오랜 시간 동안 모아온 게임 컬렉션 가운데, 특별한 추억이 담겨 있는 게임은요?
2010년에 발매된 ‘포켓몬스터 소울실버’예요. 무엇보다 제가 가장 오랜 시간을 쏟아부은 게임이거든요. 스토리만 끝낸 게 아니라 도감을 채우고, 배틀을 즐기고, 숨겨진 콘텐츠 하나하나를 즐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세이브 데이터 자체가 제 어린 시절의 시간과 기록이라서 가장 소중하죠.

시리즈에는 1천여 종의 포켓몬이 등장하죠. 가장 애정이 가는 포켓몬을 꼽자면요?
귀여운 악동처럼 생긴 팬텀을 가장 좋아해요. 조금 장난스럽고 사악한 설정까지도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오거든요. 아무래도 귀여운 외모는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웃음) 그래서 팬텀의 포켓몬 카드만 따로 컬렉팅해서 만든 컬렉션 북도 있어요. 그걸 한 장씩 넘겨 보고 있으면 괜히 뿌듯해져요.
팬텀을 좋아하는 마음이 컬렉팅에도 고스란히 반영됐을 것 같아요.
특히 팬텀 캐릭터가 있는 티셔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포켓몬스터’와 유니클로, 그리고 아티스트 다니엘 아샴이 협업한 티셔츠 컬렉션은 종류별로 가지고 있고요. 2020년 협업 당시 바로 품절된 디스이즈네버댓 협업 티셔츠도 구매해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죠. 물론, 팬텀 캐릭터가 프린트된 버전의 티셔츠를요.(웃음)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포켓몬스터’ 게임과 삶의 여러 순간을 함께했네요. ‘포켓몬스터’는 삶에서 어떤 존재인가요?
인생 그 자체죠. 어릴 때부터 ‘포켓몬스터’ 게임의 새로운 시리즈만 손꼽아 기다렸고, ‘포켓몬 GO’를 켜고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지역에서 포켓몬을 만났어요. 지우 곁에 항상 피카츄가 있는 것처럼, 제 곁에도 늘 ‘포켓몬스터’가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