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적인 장르를 다루면서 그 무엇도 배경이 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위계도 순서도 없이,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동시다발적 덩어리로 존재하는 세계. 작가 오민의 지향.

오민은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사운드, 비디오, 렉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업을 이어가는 미술작가다.

자신이 경험한 가정 내 위계와 그로 인한 통제의 감각을 다룬 첫 작품 ‘마더(Mother)’(2011)와 ‘딸(Daughter)’(2011)부터, 그 무엇도 배경으로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카메라 뒤의 사람들을 작업 안으로 들인 ‘동시(Simultaneity)’(2025) 프로젝트까지, 작가 오민의 작품은 그가 명명한 큰 덩어리 안에 함께 부유하며 자라난다. 가까이 다가가면 완연히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멀리 떨어져 보면 하나의 행성처럼 빛나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진. ‘위계’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해 ‘시간’이라는 주제이자 재료를 더하고, 매번 새 장르, 새 협업자를 포용하는 오민의 실험은 애초에 그 크기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듯 확장, 확장, 또 확장을 거듭한다. 영상, 사운드, 렉처, 퍼포먼스를 오가고, 뒤섞고, 융합하며 작가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기꺼이 마주한다. 기존의 위계와 통제, 관념에 가장 다정하게 저항하는 작가 오민과 만나 그의 지난 시간을 찬찬히 살폈다.

암스테르담에 머물며 작업해온 지 17년이 됐다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래픽디자인으로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가 금융 위기가 닥친 시기였어요. 당시 디자인에서 미술로 넘어가는 것을 고민하던 저로선 창작의 에너지가 정체된 곳에서 어떤 시도를 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죠. 때마침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의 렉처(강의)를 들으면서 그곳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원이 활발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죠. 문득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주를 결심했어요. 그땐 17년이나 머물게 될 줄 몰랐지만요.(웃음)

라익스 아카데미를 마치고 2년 후 대표작 중 하나인 <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를 발표했으니, 미술작가로서의 삶은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되겠네요.

맞아요.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그래픽디자인과 미술, 그 경계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곳의 라익스 아카데미(Rijksakademie)에 가면서 작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거죠.

작업 공간이 잘 정돈된 사무실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출퇴근 시간을 정해두고 작업을 하는 편인가요?

영상이나 사운드를 다루는 작가들의 공간은 대개 비슷할 거예요. 작업의 많은 부분이 컴퓨터로 이뤄지니까요. 출퇴근도 사무직과 비슷해요. 주 6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회사원처럼 일하는 걸 좋아해요. 원래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하루에 몇 시간은 연습을 해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어요. 물론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물리적인 시간의 힘을 믿다 보니 미술작가가 된 지금도 일이 있든 없든 일단 나가서 무언가를 하려는 타입이에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작가의 삶과는 거리가 있죠? 예술가라고 다 불규칙한 삶을 사는 건 아니에요.(웃음)

그런 의미에서 순차적으로 첫 작품부터 얘기를 해볼게요. 작업의 출발점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시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시간은 제 작업에서 주제이자 재료이고, 또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시간’은 중간에 발견한 것일 수도 있어요. 더 깊이 들어가보면, 제 작업은 ‘위계’에서 출발한 것 같아요. 위계적이고 제도적인 것, 그 안에서 일어나는 통제에 대한 관심이 작업으로 이어진 거죠.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에 아들 생산에 실패하면서 가정에서 가장 낮은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에서 찾지 못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교회에 가게 되는 엄마의 모습이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현상의 집합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 감각을 첫 작품 ‘마더’와 ‘딸’로 다루게 됐어요. 그리고 이를 사운드와 영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재료이자 형식이 발견된 것이고요.

첫 작품부터 사운드와 영상을 다루는 모든 작품을 ‘시간 기반 설치(timebased installation)’라 명명했어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죠.

영상이라고 하면 이미지에 너무 치중되어 있고, 오디오-비주얼이라고 하면 움직임에 대한 감각이 누락된 것 같았어요. 작품을 구성하는 구성체 중 그 어떤 것도 배경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위계적으로 구성하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상태로 바라보려면 시간이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베이스)이라 생각한 거죠.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시간 안에 놓이면 모든 것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움직일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미지와 소리로 남는다.” 이 구조를 설명하려면 영상도 사운드도 아닌 다른 명명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시간 기반 설치’라는 단어를 만들게 됐어요.

‘시간 기반 설치’ 작업을 이렇게 긴 시간 이어갈 거란 예상을 했나요? 혹은 계획이 있었나요?

정확한 계획은 없었어요. 다만 확장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뿐이죠. 내 작업은 영상이 있어야 되고, 시간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내가 아닌 다른 몸(안무가와의 협업)도 등장해야 할 것 같고, 또 언어도 들어오고, 영화도 들어와야겠고. 그게 얼마만큼일지는 모르지만 계속해 확장, 확장, 또 확장이에요. 어쩌면 제 작업은 ‘시간 기반 설치’라는 것을 키워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암스테르담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 오민.

그 확장의 첫 시도가 다른 협업자를 작업에 출연시킨 <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 >죠? 개인의 감정을 배제한 채 공연에 집중하는 무용가, 연주자, 그리고 그들을 촬영하는 작가의 ‘생각의 표정’을 담은 비디오 작업으로, 관람객들이 작가님을 인식하게 된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안무가 안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르(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렉처 ‘안무가의 악보(A Choreographer’s Score)’ DVD를 본 적이 있어요. 거기엔 자신의 작업을 칠판에 쓰면서 설명하는 모습과 이따금씩 설명했던 공연 장면이 교차되며 나오는데, 설명할 때의 표정과 실제로 공연을 할 때의 표정이 똑같아 보이는 거예요. 보통 춤출 때의 표정과 강연할 때의 표현은 다를 거라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두 가지가 같다고 느끼는 순간, 표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고, 그것이 장르별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안무가, 연주가와의 협업으로 <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를 완성하게 됐어요.

그리고 2년 뒤, 또 다른 형태의 확장인 ‘ABA’를 완성했습니다. 발표 당시 “이전까지는 음악을 차용하는 정도에 그쳤다면 이번 ‘ABA’를 통해서는 음악의 형식 자체에 대해 끝장을 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그 작업은 오랫동안 연주자로 음악을 해오다 미술로 들어오면서 발견한 두 장르의 차이인, 듀레이션(지속되는 시간, 기간)에서 출발했어요. 미술에선 듀레이션 개념이 상대적으로 흐릿해요. 영상 작품의 러닝타임이 있긴 하지만, 그게 감상의 듀레이션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미술에서는 시간을 굉장히 관념적으로 탐험했다고 보지만, 그 듀레이션을 같이 겪어내지 않고 걸어가면서 봐도 정말 괜찮은 건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반대로 음악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관객이 듀레이션을 함께 겪어내는 것도, 작곡가들은 그 듀레이션이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흘러가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단 말이에요. 이러한 음악을 미술로 가져왔을 때 듀레이션의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음악의 정서를 가져오는 게 아니고, 이를 시각적인 관계로 재배열하고 구성했을 때 미술에서 음악으로, 음악을 미술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죠. 소리라는 게 시각 정보보다는 모호하게 느껴지니까, 이 음악이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 혹은 좋은가 안 좋은가에 대한 판단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면, 관람객이 자유롭게 운용하도록 듀레이션 안에서 보다 다채로운 질문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ABA’를 만들었어요.

앞서 언급한 확장은 장르와 장르를 섞고 융합하며, 경계를 무너뜨리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 장르를 작업 안으로 들이거나, 여러 장르를 한 작업 안에서 펼쳐내는 것이 궁극적인 지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어 보라색을 만드는 것보다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점처럼 각자의 색을 드러낸 채 구분하기 어렵게 얽혀 있는 것이 제가 지향하는 상태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작업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보기에 따라 이렇게 보일 수도 있고, 저렇게 보일 수도 있는 상태를 만들고 싶은 거죠. 작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장르가 들어오면 새로 공부해야 될 것도 많고,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생기는 충돌도 있어요. 저는 그 충돌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봐요. 충돌 안에 그 장르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시도하기 두려웠던 매체나 장르도 있었나요?

저는 매번 두려워요.

작품만 보면 굉장히 과감한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웃음)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입니다.(웃음)

다양한 장르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업 안에 여러 영역의 협업자가 등장합니다. 이를 보며 작업에서 가장 주요한 단계는 소통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장르가 들어오면 창작 리허설이라 부르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가능하기만 하다면 초반에는 대화가 리허설이에요. 예를 들어 안무가와 협업을 할 때 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동시대 춤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충돌 지점이 발생해요. 그때 빠르게 서로의 맥락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게 사실 쉽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관련된 책을 추천받아서 찾아 읽기도 하죠. 어떨 때는 소통 자체가 또 하나의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협업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너무 흥미로워 이걸 나만 듣기는 아깝다 싶어서 글로 정리해서 출판한 적도 있고, 설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를 퍼포먼스로도 만들어보고, 그런 식이에요.

‘ABA’가 공개된 이듬해에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며, 작업이 더 넓은 세계에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심사위원단은 “그의 작업은 간결한 제스처, 반복적 패턴, 최소한의 표현의 정교한 결합에 의해 성스러운 의식처럼, 가벼운 유희처럼 진행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나의 작업이 의식과 유희 사이 어디쯤에 머문다 생각하나요?

모든 퍼포먼스는 그 뿌리가 의식에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반복할 수 없는 것이 곧 아름다움인 공연도 있지만, 대부분의 퍼포먼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재구동할 수 있고, 그것이 수동적인 것과는 다른 태도라 여깁니다. 다시 실행시킬 수 있는 것 자체가 실은 주체적인 것이고, 달라지더라도 반복 가능하니까 그것은 의식에 가까운 것일 수 있겠다 싶어요. 또 다른 시선에서 보면 유희도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반복한다는 게 꼭 고통스러운 과정만은 아닌 게, 반복은 이미 한 번 내 몸이 경험한 것에 대한 관찰과, 어제와 오늘이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관찰, 그리고 다음 반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의 흥미로운 발견이 분명히 있다 생각해요. 그 발견을 동력으로 연주자는 연습을 하고, 작곡가는 곡을 만들고,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그렇게 각자의 연습이 이루어지고 그 안에 각자의 유희가 있다 생각해요.

이후 2022년에는 첫 작품부터 쌓아온 생각과 개념을 정리해 ‘포스트 텍스처(Post-Texture)’ 개념을 만들어 비디오 렉처로 공개했습니다. 앞서 얘기한 위계에 대한 관심을 정리된 언어로 전파하는 형태로요.

협업하는 과정에서 다원적인 장르를 다루면서 그 무엇도 배경이 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도구화하지 않으면서 협력하고 싶었던 거죠. 예전에는 위계가 효율의 도구라 생각했어요. 모든 걸 간단하게 하고, 또 조화도 위계에서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어쩌면 그래서 조화가 위험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맥락에서 조화를, 위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그것이 깨졌을 때는 불편하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위계 없이 복잡하게 덩어리가 된 것에서도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물론 이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어쨌든 그 아름다움을 확인한 이후부터 위계가 없는 상태를 지향해봐야겠다 싶었고, 실천의 용어로 ‘포스트 텍스처’라 명명했어요.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 자체를 정리할 수 없는 혼동 상태를 포스트 텍스처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만들고 나니 자칫 용어적인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 고민을 거쳐 2024년 ‘동시’라 재명명한 프로젝트가 시작됐죠.

맞아요. ‘동시’라고 이름을 바꿨어요.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주와 부가 없고, 전체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지 않고 개체가 유지되면서,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중간 상태. 저는 ‘동시’ 작업에 대해 ‘하부구조를 겹쳐놓는다’라고 표현해요. 영화가 만들어지는 촬영이라는 과정을 퍼포먼스로 겹쳐놓은, 그러니까 춤이기도 하지만 실제 촬영이기도 한, 퍼포먼스지만 모든 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상태를 ‘동시’라 명명한 거죠.

‘동시’라는 개념으로 렉처 비디오, 라이브 퍼포먼스, 시간 기반 설치를 선보인 데에 이어 오는 9월에는 LP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또 다른 확장을 보여주는 형태가 될 거란 점에서 기대가 큽니다.

제 작업이 주로 영상 형태로 이뤄지는데, 초반에는 ‘이게 음악일 수도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만들기는 했어요. 내러티브가 없고, 어떤 행위들이 주재료가 되는, 마치 음악을 작곡하는 것과 유사한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왔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럼 이게 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라면서 라이브 퍼포먼스로도 선보이게 됐고요. 그러다 협업하는 촬영진과도 소통을 위해, 그들의 작업관을 이해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게 됐고, 이것이 리서치로 이어지면서 이것들을 과정으로 끝내지 않고 다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그런데 대화로 이뤄진 리서치를 작품으로 만들어보니, 이 말이 모든 걸 다 빨아들여서 다른 것을 배경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상이 벌어지더라고요. 제가 지양해온 위계가 생겨버리는 거죠. 그래서 말이 그냥 소리가 되는 방법을 고민했고, 이미지가 없고 음성만 있는 상태에서 진짜 음악으로서 다시 한번 듣고 싶다는 생각으로 LP를 만들게 됐어요. 이때 디지털 음원으로 할 수도, CD 아니면 테이프로 할 수도 있었는데, 처음으로 음반의 형태를 만드는 거니까 그래도 가장 클래식한 방법, 좀 더 물질적인 것을 선택한 거죠.

‘동시, 인터뷰 2: 나탈리, 아녜스, 카롤린(Simultaneity, Interview 2: Nathalie, Agnès, Caroline)’(2026), 전시 설치 전경,
<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 오민, 카밀 노먼트>, 아르코미술관, 2026, PHOTOGRAPHY: 최용준, 아르코미술관 제공
‘동시, 인터뷰 1: 폴린, 마리오르, 가랑스, 기욤, 두니아(Simultaneity, Interview 1: Pauline, Mariore, Garance, Guillaume, Dounia)’, 영상 스틸 이미지

스스로 저항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나요? 계속해서 위계를 무너뜨리려 하고, 배제되거나 차선으로 물러나는 것들을 작업 안으로 들여오려는 방식에서 저항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레디메이드를 미술관 안으로 들여오면서 어떤 다른 종류의 선언을 한 것처럼! 작곡가 헬무트 라헨만(Helmut Lachenmann)이 구조화되고 관습화된 연주 제스처를 바꾸면서 그것이 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 것처럼! 어떤 새로운 것이 들어왔을 때 생각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측면을 저는 굉장히 흥미롭게 바라봐요. 그렇지만 저는 뒤샹처럼 아주 래디컬한 무브먼트를 하기보다 공통점이나 유사성을 조금씩 조각해나가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저항이 대놓고 보이는 게 아니라, 엿보이는 정도일 거예요.(웃음)

계속된 변형과 확장이 다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지금은 문학을 생각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말과 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저라는 사람이 문학과는 거리가 먼 반서사적인 사람이거든요. 언젠간 서사가 아니던 것이 서사가 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막연히 해보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이미 가기도 전부터 너무 두려워서 못 가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만 끝내 가보는 편이죠?

그렇겠죠. 누군가가 보기에는 안 간 것일 수 있어도, 저는 간 거겠죠.(웃음)

이토록 다채로운 작업을 추동하는 힘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건가요?

글쎄요. 호기심? 혹은 데드라인?

데드라인 너무 중요하죠. 마감일을 정해 놓는 편인가요?

네. 일단 일을 저질러서 안 할 수 없게 만들어요. 그 안에서도 거의 매일매일 데드라인을 만들면서 쉼 없이 추동하고요. 이는 반농담이자 굉장히 실질적인 부분이고, 추동은 사실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어요. 늘 순수하게 알고 싶은 마음으로 출발해요. 그러고 나면 자연히 궁금증이 자라나고,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이 세상이 너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니, 스톱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두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곧 추동의 힘일지도 모르겠네요.

맞아요. 소리가 나는데 안 들을 수 없고, 보이는데 안 볼 수 없는 거죠.

‘헤테로크로니의 헤테로포니(Heterophony of Heterochrony)’(2021), 올해의 작가상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2021
PHOTOGRAPHY: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