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에서 발견한 작은 흔적과 멀리서 바라본 풍경 사이에서, 작가 마리나 라인간츠(Marina Rheingantz)는 자신만의 속도와 리듬으로 그림을 그린다.

오는 10월 24일까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리는 <편린(Míope)>은 한국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입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작업의 흐름에서 이번 전시는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제가 사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어 기쁩니다. 전시 기간 동안 한국 관객을 만나며 색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설렘이 커요. 이번 개인전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자리라기보다 지금까지 이어온 작업을 한 차원 확장하는 자리라는 점에서도 제게 의미가 남다릅니다.

‘míope’는 포르투갈어로 ‘근시의, 근시안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니죠. 전시 제목에 이 단어를 차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기에 적합한 단어라 생각했어요. 제가 실제로 근시라 안경을 쓰는데,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때 일부러 안경을 벗고 멀리 있는 사물이나 풍경을 흐리게 보거나, 다시 안경을 써서 선명하게 보는 등 여러 방식으로 보기를 시도했습니다. 광활한 풍경을 가까이에서 보다 보면 전체 이미지가 한눈에 전부 들어오지 않거나 특정 부분에 초점을 맞춰 봐야하는 경우가 생기잖아요. 이를 계기로 이번 전시에서는 본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다양한 ‘보는 방법’을 포괄할 수 있는 제목을 택했습니다.

전시된 작품들 역시 멀리서 봤을 때와 가까이에서 봤을 때 감상이 전혀 다릅니다.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에 특별히 관심을 두는 이유가 있나요?

작업의 규모가 클 때는 멀리서 그 작품을 감상했을 때 보이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서 작은 부분에 집중했을 때 보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작을 좋아하는 이유죠. 그림을 가까이에서 볼 때 비로소 전체를 구성하는 세부를 살펴볼 수 있고, 거대한 작품을 이루는 것은 아주 작은 자국들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의도적으로 작은 자국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제 작업은 멀리서 보면 풍경화지만 또 다른 거리에서 보면 추상화처럼 읽힐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Marina Rheingantz, ‘Míope’, Oil on canvas, 210×300cm, 2026 (작품 일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자주 방문했던 가족의 농장과 그곳의 자연이 오랜 시간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들여다보면 풍경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와 질감도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레이스를 연상시키는 표현 같은 것들이요. 자연이나 풍경 외에는 무엇에서 영감을 얻나요?

주로 장소와 풍경에서 영감을 얻고 이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지만, 어떤 광활한 곳에 가면 이를 구성하는 세세한 요소들, 이를테면 작은 풀꽃 같은 것들에 매료돼 이를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합니다. 이와 더불어 V&A 박물관의 빅토리아시대 레이스 컬렉션에 관한 책, 아프리카 태피스트리를 소개하는 책 등 소장하고 있는 서적에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멕시코의 유서 깊은 교회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작은 프레스코화도 큰 영감을 줘요. 제게 영감을 주는 여러 요소와 자연 풍경이 결합하면서 작품을 구성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들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하나로 종합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작품마다 만들어지는 과정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에요. 어떤 작품에서는 텍스타일을 중심에 두고 그 위에 풍경을 얹고, 반대로 풍경화에 태피스트리 요소를 더하기도 합니다.

직물이 지닌 특성에 매료되고, 그 특성을 회화에 녹여낸 계기 역시 궁금합니다.

직물에 대한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됐어요. 늘 집에서 자수와 태피스트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거든요. 하지만 회화 작업을 시작한 뒤에는 풍경에 더 집중했죠. 그러던 차에 V&A 박물관에서 방대한 직물 컬렉션을 접하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부터 제 작업에 직물의 영향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직물은 모로코 태피스트리였어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죠. 태피스트리 안에 담긴 풍경의 상징적 요소가 추상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에 순식간에 매료됐고, 이후에 작은 회화 작업을 할 때 모로코 태피스트리에서 얻은 영감을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풍경화와 태피스트리 요소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작업을 전개하고 있어요.

물감을 두껍게 쌓거나 긁어낸 흔적, 또는 붓질의 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등 작품 전반에서 물감의 질감과 물성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물감을 다루는 방식이 작업을 만들어가는 데 어떤 의미를 갖나요?

어릴 때 강가에서 진흙 놀이 하는 걸 좋아했어요. 대학교에서 본격적으로 회화를 공부하기 전에는 점토로 조각을 즐겨 만들곤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어떻게 하면 유화물감으로도 물질성을 발현시킬 수 있을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어요. 그 고민이 물감을 여러 겹 쌓아 두께를 만들거나, 다시 긁어내 흔적을 남기는 등 재료가 지닌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방향으로 이어졌습니다.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로부터 물감을 해방시킴으로써, 하나의 회화 조각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작업하고 싶었어요. 쉽게 말하면 회화에 몸을 부여하는 겁니다. 회화가 단순히 어떤 풍경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매체에 자유를 주고 싶었어요.

일상에서 마주한 풍경이나 이미지가 실제 작품이 되기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가장 먼저 사진을 찍으며 이미지를 모으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뒤에는 이미지들을 프린트해서 스튜디오 벽에 가득 붙여 놓고 한참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수채화 작업도 다양하게 진행했어요. 참조한 이미지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다기보다 드로잉 작업을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죠. 지금은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니 이전과 같은 작업 프로세스를 충분히 거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다시 수채화와 드로잉을 겸하는 작업 방식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최근 유독 아름답다고 느낀 장면이나 순간이 있다면요? 무엇이 시선을 멈추게 했나요?

얼마 전에 페루를 여행했어요. 해발고도가 높은 고원지대이다 보니 식물의 키가 작고 꽃송이도 조그마하더군요. 여행에서 찍어둔 사진들을 기반으로 작은 식물을 모티프로한 추상 작품을 그리게 됐어요. 작은 꽃들이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 풍경이 마치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다가오더군요. 최근에는 브라질의 폭포가 지닌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한 시골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데, 그곳의 풍경을 중심으로 한 작품도 다양하게 그리고 있어요.

구체적인 작업 과정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작업을 시작할 때 화면의 구성을 어느 정도로 계획하는 편인가요?

사전에 화면을 구상하거나 세세한 계획을 세워서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림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직관에 따라 그리는 편이에요. 저는 이를 그림과 제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이라 표현하고 싶어요. 그림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요. 이 아이가 제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저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죠. 그러다 보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림이 건네는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이 지닌 아름다운 움직임을 온전히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Marina Rheingantz, ‘Periquita’, Oil on linen, 60×50cm, 2026 (작품 일부)

그림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요. 이 아이가 제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저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죠.

빈 캔버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에는 어떤 감정이 드나요? 반대로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지도 궁금합니다.

첫 붓 자국을 남기는 순간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느낌이에요.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는 것 같죠. 때로는 무섭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해요. 그때그때 느끼는 에너지가 조금씩 다릅니다. 반대로 작품을 언제 끝낼지 판단하는 일은 어려워요. 작은 요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를 건드리다 보면 다른 부분까지 모두 고쳐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히 대작은 모든 작은 요소가 하나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큰 과제입니다. 그래서 한 작품을 마쳤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한동안 그대로 두고 기다리곤 해요. 일주일쯤 지나 다시 봤을 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번 전시를 통해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나요?

작품을 감상하며 느끼고 발견하는 것들은 많은 경우 말로 풀어내기 어렵죠. 작품과 관람객이 맺는 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저 역시 미술관에 갈 때 관람객으로서 저만의 고유한 의미를 얻고 싶기에, 관람객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제 작품을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의미를 정해놓기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말이죠.

마무리할까요. 예술, 그리고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는 행위는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게 예술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의 하나입니다. 작업과 삶을 완전히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상 속 행위와 경험이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지곤 하죠. 그중에서도 걷기는 제 작업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어요. 걷는 속도와 리듬이 제가 캔버스에 붓으로 획과 자국을 남기는 속도와 연결되어 있거든요. 한 획, 한 점을 남기는 것이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을 걷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걸으면서 저를 둘러싼 작은 것들을 눈에 담거나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작품 제목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도 해요. 이번 전시 <편린(Míope)>처럼 말이죠. 결국 제가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하는 모든 것이 작업의 일부입니다.

<편린(Míope)>
기간 9월 1일~10월 24일
장소 화이트 큐브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