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을 어떻게 내느냐, 그게 결국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집요하고도 치열한 과정 끝에, 나홍진 감독이 <호프>로 생생하게 빚어낸 영화적 감각.

2026년, 가장 뜨거운 반응을 촉발한 한국 영화는 단연 <호프>일 것이다. <추격자> <황해> <곡성> 이후 10년 만에 등장한 나홍진 감독의 네 번째 장편은 전작과 사뭇 다른 매력으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항구 인근의 작은 마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와 사투를 벌이는 ‘범석’(황정민)과 ‘성애’(정호연), ‘성기’(조인성)의 이야기가 박진감 있게 펼쳐지며 사람들을 스크린 속 세상으로 끌어당겼다. 제79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프리미어 상영을 한 후 7월 15일 국내 개봉해 4백50만여 명의 관객을 만난 영화는 9월부터 세계 곳곳의 극장을 찾아가는 중이다. 국내 일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해외 여정을 앞둔 감독과 마주 앉아 <호프>에 담아낸 감각에 대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열정과 희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집요하고도 치열하게, 오직 느낌만을 전하며 자신만의 방향을 뚜렷이 그려가는 그의 방식.

네 번째 장편 <호프>로 제79회 칸영화제에 다녀왔고, 지난 7월 국내 개봉한 이후 한 달 반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어떤가?
큰 도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과가 다가올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호프>를 통해 경험하고 확인한 걸 종합해봐야 앞으로의 길이 선명하게 보일 것 같다. 생각해둔 방향은 있지만, 그게 맞는지는 모든 게 마무리 되어야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어 ‘망상회’ 콘텐츠가 쏟아질 정도였다. 그 모호함 속에도 의도한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국내 개봉 직후에는 명확히 말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얘기해도 될 것 같다. <호프>가 한국 관객에게 낯설게 다가갔을 거라 짐작한다. 괴수와 외계인이 나오고, 기존 액션 신을 오마주하는 등 이상한 조합을 보여주지 않나. 그 요소들을 잘 섞어 수준 높은 ‘B급 장르영화’를 만드는 게 내 목적이었다. 잘해냈다고 보는데, 반응을 더 살펴야겠지.
관객의 뜨거운 관심은 어떻게 다가왔나?
덕분에 인상적인 경험을 했고, 무대 인사 때 받은 응원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객석의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대화하고 같이 사진 찍는 문화도 처음 겪어봤다.(웃음) 관객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받을 수 있어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그게 호든, 불호든 직접적으로 다가와서 좋더라.
호오가 갈린다는 점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관객의 호오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개인의 취향과 영화의 수준. 보편적 취향을 따를수록 대중의 만족도는 높아질 텐데, 여태껏 그런 선택을 한 적은 없다. 물론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건 아니고, 누군가의 취향과 맞닿으면 기쁘기도 하다. 두 요인의 균형을 잡아가려 하는 편이지만, 작품성에 대한 호평을 받을 때 제일 기분이 좋다.
호평이 자아내는 희열을 느끼려면 지난한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집요한 면이 있다고 들었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그 기질이 발현되는 지점이 달라지기도 하나?
물론이다. <호프>에서 크게 달라졌다. 전작 <곡성>이 ‘분위기’에 초점을 뒀다면, <호프>에서 집중한 건 ‘움직임’이다. 모든 숏을 탁월하게 촬영하고 그 조합을 통해 움직임의 밀도를 높이는 데 굉장히 집착했다.
<곡성>에 이어 또다시 홍경표 촬영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베테랑인데도 치열하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홍경표 감독님이 <베테랑>은 안 하셨는데.(웃음) 농담이다. 베테랑인 홍경표 감독님을 비롯해 예전부터 자주 협업해온 이들이 <호프>에 함께했다. <곡성> 이후 10년 만에 다시 만나니 시너지가 엄청났고, 저마다 열정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이런 순간이 다시는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멋진 현장이었다.
현장에서 도파민이 가장 크게 터진 순간은 언제였나?
어느 한 순간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작업하다 보면 작품의 운명을 직감할 때가 있는데, 이번에 그 느낌을 자주 받았다. 지금까지와 완전히 결이 다른 촬영이었다. 연출을 했는데도 ‘포착’이 중요했고, 그걸 끝내주게 해내야 하는 컷이 많았는데 모두 정말 잘해줬다. 기적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현장을 진두지휘한 감독의 역량 덕분이기도 할 거다. 조인성 배우가 한 인터뷰에서 “감독님처럼 분명한 분과 작업할 때 편하다”라는 말도 했다.
나도 현장에서 조인성 선배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힘든 촬영을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 어려운 연기를 수행해내는 모습이 대단했다. 또 무한 신뢰하 는 황정민 선배님, 화면에서 천부적 개성을 드러내던 정호연 배우, 음문석 배우와 이상희 선배님 등 모든 출연자가 참 든든했다.
연출부터 연기까지 조화롭게 어우러져 영화 ‘감상’이 아니라 ‘체험’을 하는 듯했다. 이를 위해 중시한 것이 있었다면?
비주얼, 사운드, 미장센, 피사체를 비롯한 모든 요소가 제 위치에 배치되고,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잘 작동해야 관객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 있다. 그 느낌을 어떻게 내느냐, 그게 결국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 영화들을 느낌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한 컷, 한 컷이 정보 전달만을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제작자 입장에서 좀 속상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최근 본 영화 중 <호프>에서 그 느낌을 가장 크게 받았다.
감사하다. 그 말도 지면에 써줄 건가?(웃음)
꼭 쓰겠다.(웃음) <호프>와 전작들의 교집합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 보기에는 어떤가?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일 테니, 이 이야기에 대한 내 느낌으로 답하겠다. <호프> 시나리오를 쓸 무렵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가 좋지 않았다. 전쟁과 난민을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고, 잔혹한 사건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개인이나 사회 구성원 간 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그 상황을 감독으로서 어 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생각했다. 거시적인 일이라 ‘부감’으로 담아야 했고, 시선을 높이다 보니 우주까지 갔다. 그곳에서 세계의 분쟁들을 내려다본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전하기 위해 인간과 대비되는 상징적 존재인 외계인을 등장시켰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의 폭력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폭력은 이미 발생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나아가야 한다고 보나?
<호프>의 인물들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희망을 저마다 갖고 있지만 결국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좀 더 긍정적인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망은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을까?
비유하자면 우리는 횃불을 쥔 채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끝은 보이지 않고, 끝이 너무 멀거나 없을지도 모른다. 되돌아가기엔 이미 많이 왔고 횃불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걸어가야 한다. 어느 순간 눈앞에 빛이 보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 확신을 가져도 된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실감한다. 크랭크인하는 날이면 ‘도대체 언제 끝날까?’ 싶지만, 언제나 무조건 끝이 났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비극을 얘기하고 싶다. 어떤 시선을 갖느냐에 따라 비극만 보일 수도 있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있다.” 시점(perspective)에 대한 관심도 여러 번 언급해왔는데,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입체적으로 볼 줄 알아야 진실에 가닿지는 못하더라도 근접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한 측면만 보고 봤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거나 무모한 일이다. <호프>의 인물들도 특정한 면만을 바라 보지 않나. 그들의 입장에서 커다란 괴수가 달려드는 모습을 마주한다면… 아유, 끔찍하다. 이러한 인물들의 한계를 영화에 선명히 그려냈다. 이와 달리, 관객은 각 캐릭터의 입장을 두루 고려할 수 있다. 관객에 따라 인간이나 외계인 또는 양측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며 시점을 단순하게 배치하지 않고 비틀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테고, 결말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일 수 있다고 본다. 결국 <호프>는 시점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가 감독에게 하나의 기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의 날들을 그려볼 때, 영화의 영역 안에서 가장 큰 바람이 있다면?
다양한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를 바란다. 선택의 폭이 아주 넓어 저마다 보고 싶은 작품이 한 편 정도는 늘 상영되고 있다면 좋겠다. 이를 가능케 하는 영화 시장과 영화관을 기대한다.
<호프>가 영화관으로 향하는 재미를 일깨워줬다. 한차례 위기를 겪으며 조용 했던 극장가가 최근 다시 북적이기도 했다.
<호프>를 비롯한 3편의 영화가 올해 한동안 극장을 휘어잡았다. 나는 <호프> 감독이니 <오디세이>와 <스파이더맨>은 안 봤지만(웃음) 이 작품들을 전부 재미있게 본 관객에게는 기분 좋은 한 해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나홍진 감독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떤 가치를 지니나?
데뷔 초반에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젠 이 일을 깊이 고민해봤고 꽤 경험하지 않았나. 경험치가 축적된 만큼 시행착오나 새로운 습득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었고, 영화와 현실을 애써 분리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 안팎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계속 만들어갈 뿐이다. 지금의 내게 영화는 그냥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 됐다. 밥을 먹듯이.(웃음)
영화의 어떤 점을 가장 아끼나?
분명히 답할 수 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백 번 다시 본다. 특정한 구간만 집중적으로 보기도, 전체적으로 살피기도 하다 보면 자신의 영화를 관객처럼 볼 기회는 드물다. 그런데 어쩌다 가끔씩 내가 내 영화의 관객이 된 듯한 순간이 있다. ‘아, 이런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진짜 좋네.’ 이런 느낌을 받는 날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제일 기쁜 하루가 된다.
본인 작품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만큼 큰 직업적 성취는 없지 않을까 싶다.
맞다. <호프>를 통해 그런 순간을 여러 차례 겪었다. 이 영화를 한국 극장에서 선보이며 참 즐거웠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호프>의 관객에게 이 지면을 빌려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깊이 감사드린다. 덕분에 행복한 여름이었다.
그 행복이 가을에도 지속되지 않을까? <호프>가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었고, 9월부터 해외 개봉도 줄줄이 이어진다.
<호프>의 여정이 이제 시작된 것 같다. 개봉을 앞둔 나라의 영화제에 참석하는 등 다방면으로 홍보할 예정이다. 아마 그곳에서도 오늘처럼 영화 얘기를 한참 할 거다.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타야 할까.(웃음)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