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품의 기준이 발색과 성분에서 손의 그립감과 조작성을 포함한 인간공학적 사용성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 틸트 뷰티와 가이드 뷰티 등은 관절 통증이나 손 떨림이 있는 사용자도 편하게 쓸 수 있는 패키지를 만듭니다.
- 누군가의 불편을 해소하는 포용성 디자인은 모두에게 더 나은 사용 경험을 제공하며 뷰티의 범위를 넓힙니다.
우리가 놓친 화장품의 기능은 무엇일까?
화장품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주로 발색과 지속력, 성분과 텍스처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얼마나 선명하게 발색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지, 어떤 성분이 피부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지가 오랫동안 제품의 품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장품을 손에 쥐고 뚜껑을 여는 순간, 그리고 실제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각은 왜 그동안 기능의 범주로 여기지 않았을까? 피부 위에 나타나는 변화는 눈으로 확인하고 비교하기 쉽다. 그러나 손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잡히는지, 뚜껑을 여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지, 원하는 만큼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하는 사용성은 상대적으로 부수적 문제로 여겨왔다. 이제 그 익숙한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화장품은 왜 이렇게 잡기 어려울까?
가늘고 매끄러운 마스카라 튜브, 손가락 끝으로 잡아 돌려야 하는 작은 립스틱 뚜껑, 힘을 줘 눌러야 하는 펌프. 너무 익숙하게 사용해온 탓에 의문을 품지 않았지만, 화장품 하나를 사용하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손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동작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쉽지는 않다는 데 있다. 사람마다 손의 크기도, 쥐는 힘도, 손가락과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 범위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가 손에 더 잘 잡힐까? 국제 인간공학 전문 학술지 에 실린 한 연구에서 손의 움직임에 제한이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여러 형태의 뚜껑을 비교한 결과, 뚜껑의 지름보다 높이가 사용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얇고 납작한 원형보다 손가락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높이 그리고 측면이 볼록한 형태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뚜껑이 작은 경우에는 표면에 요철을 내는 것이 그립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단순히 크기를 조정하기보다 손가락이 어디에 어떻게 걸리는지까지 고려하는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화장품도 손에 맞춰 다시 설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하는 브랜드 중 하나가 틸트 뷰티(TILT Beauty)다. 이번 뉴욕 출장에서 처음 접한 틸트 뷰티는 동글동글한 형태의 귀여운 패키지 디자인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브랜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니 그 모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건선성 관절염을 앓던 창립자 에린 글레이저(Aerin Glazer)는 주변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쓰는 화장품을 잡고 여는 일조차 쉽지 않았고, 이 경험에서 브랜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건선성 관절염은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뻣뻣하거나 붓고 통증을 동반해 작은 물체를 쥐거나 비틀어 여는 동작에 부담이 따를 수 있다. 그래서 틸트 뷰티는 넓은 그립과 짧은 완드, 자석식 뚜껑처럼 손의 움직임을 덜 요구하는 구조에 집중했다. 완성된 화장품에 편의 기능을 더하는 대신 처음부터 손의 움직임을 고려해 제품을 설계한 것. Engineered for Ease, 즉 사용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그립 스틱 하이드레이팅 립 트리트먼트에는 최소한의 힘으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자석식 캡을 적용했고, 래시스케이프 볼류마이징 마스카라는 일반 마스카라보다 그립감이 부드럽게 하고 완드를 짧게 디자인해 보다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 더 이지 웨이 립스틱과 더 이지 웨이 립 라이너 등 틸트 뷰티의 모든 제품은 미국 관절염 재단(Arthritis Foundation)의 ‘Ease of Use’ 인증을 받았고, 이는 뷰티 브랜드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따라서 관절염과 만성 통증 환자를 포함해 모두가 더 쉽게 열고 잡고 바를 수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기능을 위해 제품의 외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에린 글레이저 역시 사용성을 고려하면서도 심미적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다. 소장하고 싶은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손에 닿았을 때 경험은 다르게 설계하는 것. 사용하기 편한 것도 좋은 화장품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움직임을 디자인한다면?
패키지를 넘어 메이크업을 할 때 필요한 동작 자체를 다시 바라보는 브랜드도 있다. 가이드 뷰티(Guide Beauty)의 창립자 테리 브라이언트(Terri Bryant)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고, 이를 계기로 보다 쉽고 안정적으로 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대표 제품인 가이드 완드는 손가락을 올려둘 수 있는 받침에 검지를 고정하고 완드 한쪽을 광대뼈에 기대어 지지할 수 있어 손의 흔들림을 보완한 애플리케이터. 가운데에 뚫린 윈도를 통해 아이라인을 그리는 위치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라이너는 물론 인조 속눈썹과 립 라이너처럼 정교한 메이크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 콜 크리에이티브스(Kohl Kreatives)는 브러시의 형태를 바꿨다. 손잡이가 고정된 직선 형태가 아니라 사용자의 그립과 움직임에 따라 휘어 손목을 브러시에 맞추기보다 브러시의 각도를 자신에게 편한 위치로 조절할 수 있다. 이 움직임은 메이크업 브러시 컬렉션인 더 플렉스 컬렉션(The Flex Collection)에 적용되어 있다. 사용자가 제품에 동작을 맞추는 대신 제품이 사용자가 편한 방식에 맞춰지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 각각의 방식은 다르지만 이 브랜드들이 지향하는 지점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화장품의 기능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일까?
발색이나 지속력, 보습력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는 오랫동안 화장품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지표였다. 하지만 제품을 사용하는 경험까지 기능으로 본다면 살펴봐야 할 기준은 훨씬 많아진다. 그립감, 마찰력, 필요한 힘, 조작성, 무게와 균형감. 중요한 것은 손이 닿는 위치와 면적, 표면의 질감, 제품의 형태가 사용자의 힘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적절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게 하는지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꼭 특정한 신체 조건을 가진 사용자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손톱을 기른 상태에서 작은 뚜껑을 열어본 사람, 스킨케어를 마친 미끄러운 손으로 보틀을 열어본 사람, 한 손에 거울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립 제품을 열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봤을 터다. 제품을 사용하기가 조금만 더 편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인간공학적 디자인은 특정 사용자의 불편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기능은 다른 누군가에게 더 나은 사용 경험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 모두를 포괄하는 포용성 뷰티가 지향하는 바도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별도의 제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품의 기준 자체를 넓혀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 뷰티가 이야기해야 할 새로운 사용성의 의미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