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길

안경 라피스 센시블레(Lapiz Sensible), 조끼와 셔츠 모두 프라다(Prada).

스스로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한 시간 남짓한 대화의 상대로서 김남길은 좀 복잡했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길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생각 회로가 엉켜 있었다. 김남길을 먼저 만났던 이들은 그가 능청스러우리만치 친근하고 수더분한 사람이라고 했다. 소문대로 그는 스스럼없이 다가왔지만 쉬이 마무리되지 않는 이야기의 끝엔 불안감과 조바심, 조금의 죄책감이 묻어났다. 더 좋은 사람, 예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박과 진짜 ‘김남길다운’ 것을 찾고자 하는 욕구 사이의 딜레마에 오래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는 배우 김남길도 포함된다. 자주 털털하게 웃음 짓고 시국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사랑하고 증오하는 영화에 흥분하고 연기를 위한 뜨거운 고민을 털어놓다가도 그는 끝내 꺼지지 않은 마음의 불씨 하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양손 가득 쥐었던 욕심을 내려놓으면서 그는 자연스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말하는 작품에 눈이 간다고 했다. 영화 <어느 날>은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긴 강수(김남길)가 미소(천우희)를 만나면서 자신의 아픔을 마주하고 치유해가는 이야기다. 주어진 자리에 충실하면서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그가 이 영화에 메시지를 담았다. 상처와 트라우마를 관통해야 비로소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상처받은 치유자’. 김남길은 ‘강수’를 그렇게 지칭했지만 그건 강수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김남길 스스로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일지 모른다.

 

김남길

셔츠와 스웨터, 팬츠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원래 이윤기 감독의 팬이라고 들었다. 호흡이 길고 여백의 미가 있는 영화를 많이 하셔서 좋았다. 여성 중심의 이야기를 주로 하던 감독님이 남자와 여자가 같이 갈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지도 기대됐고.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 <파이란>을 느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한 <파이란>의 톤 앤 매너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의 극본을 쓴 분이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님이더라. 돌고 돌아 각색을 이윤기 감독님이 한 거다.

좋아하는 장르가 분명한가 보다. 이윤기 감독의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나? <여자, 정혜> <멋진 하루>. 최근 건 잘 안 봤다. <남과 여>도 시나리오는 봤는데 그런 감성적인 느낌을 역시 잘 표현하신다. 이윤기 감독님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보통 그렇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영화는 가벼우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드라마하곤 다르게 영화는 돈을 주고 선택해서 보는 거다. 내가 선택한 작품과 나의 연기가 관객의 선택을 받으려면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그 영화에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있어야 하고. 장르마다 다르긴한데 그 장르성에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어두운 영화라는 편견을 가진 영화에 끌리는 것 같다. 캐릭터나 이야기에 트라우마나 정서가 담긴 영화. 사회적인 메시지도 좋고.

<어느 날>에도 김남길이 좋아하는 이윤기 감독만의 디테일이 살아 있던가? 조금 달랐다. 이윤기 감독님 영화 중에 <어느 날>이 가장 상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에게 가장 친절한 영화가 될 테고. 감독님도 찍으면서 그 지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감독님의 영화는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기보다는 인물의 정서를 따라가면서 여백의 미가 살아 있는 앵글감도 많이 보여줬는데 <어느 날>에서는 감독님 스타일과 많이 다르지 않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설명을 한다. 하지만 찍다 보면 감독님이 가진 본질적인 감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타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이 조화롭게 맞물리지 않았나 싶다.

 

영혼과 소통한다는 소재가 독특하면서 그 반대이기도 하다. <어느 날>이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다른 영화와 분명한 차이를 두는 지점은 무엇인가? 이야기의 차별성은 없다. 판타지가 소재의 메인이 될지 이야기의 장치로 활용될지에 따라 차별성이 있을 수 있는데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슬펐던 건 우리네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남는 상황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봐줬으면 한다. 이 영화가 가진 힘이 그것이다.

배우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겠다.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압박은 없었나? 예전에는 그런 중압감이 있었는데 이 시나리오에선 누구나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는 아픔이나 비밀을 편안하게 표현하자는 마음이었다. 보는 사람들에게 강수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묻어두었다가 보여줘야 할 때 보여주자고. 특별히 표현하려 하지 말고 편하게 나에게 있는 모습 안에서. 그래서 좋았다. 내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이야기를 잘 흡수해서 따라올 수 있는 영화겠구나 싶어서. 캐릭터보단 이야기가 두드러졌으면 하는 영화다. 물론 그만큼 편안하게 잘해야 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확실히 예전에 비해 많이 편해졌다.

강수 같은 캐릭터가 실제로 있다면 그렇게 담담할 것 같다. 모든 걸 겪어 냈기에.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라고 한단다. 강수 같은 사람을. 강수는 자기 아픔을 자꾸 외면하려고 한다. 아내와 같이 지냈던 곳에 못 들어가서 거실만 맴돈다. 자신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어서 계속 도망 다니는데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든 그걸 견뎌내야 살아갈 수 있지 않나. 누구나 트라우마를 이겨내면서 성숙해가는 건데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이 그런 사람을 운디드 힐러,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했다. 심리상담가든 누구든 자신의 아픔을 극복해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덜어줄 수 있는데 그 아픔을 마주하지 못하면 모른다는 거다. <어느 날>은 강수가 미소를 만나면서 상처 받은 치유자가 되는 이야기다. 미소의 아픔을 보면서 공감하고 자신을 돌아 보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어느 날>의 ‘강수’, 전작인 <판도라>의 ‘재혁’은 인간적인 갈등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동안 연기한 강렬한 캐릭터들과 다르다. 대중에게 강하게 기억되고 싶은 욕심보다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건가? 배우로서의 지향점이 달라지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둘 다인 것 같다. 이제는 나이도 있어서 어린 친구들처럼 스타를 꿈꿀 수 없고 선배님들처럼 이름만 들어도 무게가 느껴지는 배우도 아닌 그 길목의 중간자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버렸다고 할까. 생각을 한다고 해서 내 욕심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면서 우리 이야기, 사람의 고민을 하는 것이 와 닿는다. 나 역시 살면서 뭐가 더 중요한지, 내 정체성이나 본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니까 요즘엔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를 하는 시나리오에 더 끌린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작품도 그렇게 선택하는 것 같다.

 

김남길

애슬레틱 무드의 점퍼와 셔츠 모두 닐 바렛(Neil Barrett).

맘에 쏙 드는 시나리오를 찾기는 힘들지 않나? 힘들다. 뒷장이 못 견디게 궁금할 정도로 재미있지 않다면 조금 지루하더라도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이 좋으면 된다. 어떤 시나리오는 뻔해서 ‘이럴 줄 알았어’ 하면서 덮었는데 계속 생각이 난다. 예전에 연기 고민이 많을 때 선배님들에게 “한 작품이라도 같은 캐릭터를 하고 싶지 않다. 다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더니 한 선배님이 웃으면서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인격을 표현할 수 있겠냐. 같은 이야기더라도 깊이 있게 다루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건 어떠냐”라고 하셨다. 꼰대 같은 이야기인데 왠지 그럴 듯했다. <어느 날>이 그렇듯 큰 영화가 아니어도 기본적으로 시나리오가 좋으면 괜찮다. 소재가 다양한 영화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나는 천만이 든 영화가 의미 있는 영화가 아니라 의미 있는 영화가 천만 영화가 되도록 만들고 싶다. 하지만 요즘엔 기본적으로 천만이 들 만한 걸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그렇게 해야 잘되니까 사실 영화 홍보를 할 때도 딜레마에 빠지는 게 매번 플랜과 형식이 같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어떡해, 시키면 해야지.(웃음) 사실 대중 영화는 평론가가 뭐라고 지껄이던 포스터가 얼마나 후지던 대중에게 많은 선택을 받았으면 그게 끝이다. 그렇다고 해도 토론거리가 많은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을 텐데.

삶이 팍팍해진 탓도 있는 것 같다. 영화에까지 머리나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거지. <해적>이 이럴 때 개봉했어야 하는데.(웃음)

일기를 곧잘 쓴다고 들었다. 최근의 일기엔 무엇에 대해 썼나? 내가 사는 이야기. 워낙 사회적인 문제가 많아서 그 부분에 대한 글도 많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판도라>도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내 자리에서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것.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영화를 개봉하는 작은 것 하나부터 행복감을 느끼자는 이야기도 많이 쓴다. 내 연기나 삶에서 가장 크게 변화된 부분은 힘을 뺄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연기도 옛날엔 좀 더 강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글을 쓸 때도 혼자 보는 일기인데 행여 누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의식하면서 썼다. 나만의 공간이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의 본질만 고민하면 되는데. 예전의 내 과오, 남녀 관계를 포함해 모든 인간 관계를 돌아보기도 한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거나 받았던, 내가 잘못 생각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뭐가 더 중요한지 생각하다 보니 남의 시선 을 덜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추리닝을 자주 입는 건 아니지만. 하하.

평소에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은 뭔가? 연기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크다. 그이전에 인간적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 일이 잘되고 안 되고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패 안에서 성공을 볼 수도 있는 거고. 물론 계속 실패하면 나도 속상하지. <판도라>를 더 많은 사람이 봐주길 바랐다. 나는 그 영화가 세상을 움직일 줄 알았다. 시기적으로 안 좋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부여했던 의미가 있어서 아쉬움이 컸다. <어느 날> 같은 영화는 잘 안 되더라도 크게 실망하진 않을 것 같다. 좀 편안해진다고 할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간다. 성숙해져서 더 좋은 사람이려고 노력한다. 철부지 때와는 생각이 달라졌다.

 

김남길

코트 우영미(WooYoungMi), 팬츠 시스템 옴므(System Homme), 슈즈 지미추(Jimmy Choo).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연기를 했으니 가치관도 생각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나?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나는 뭘 하든 좋은 사람이려고 한다는 걸 문득 자각한다. 말 한마디를 할 때나 뭔가를 결정하거나 고민할 때도. 그래서 자신감이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가장 김남길다운 게 뭔지 고민한다. 내 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하면서도 김남길다움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많이 내려놨다고 생각하는데 혼자 생각하다가 문득 놀랄 때가 있다. ‘내가 내려놓은 게 아니라 참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 본질적인 것을 고민하는 와중에 ‘나다움’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좋은 사람이고 싶은 게 나다운 걸 누르는 게 아닐까? 그런 부분도 있다. 요 근래 배우로서, 연예인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살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꿈이 배우였고 그걸 이뤄서, 화려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하거든. 근데 가끔 혼자 침대에 앉아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돈이 엄청 많아지면 연기를 계속 할 거냐고 물었었다. 당연하다고, 더 잘하겠다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는데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다 버리고 여행 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여행 좀 다녔으면 좋겠다. 그러고 싶다. 사실 여행을 많이 가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부분도 있다. 일하러 다니는 것 말고는 여행을 별로 다녀본 적이 없거든. <어느 날> 촬영 끝나고 1년 정도 쉬었는데 쉬려고 쉰 게 아니다. 계획한 게 밀리고 엉켜서 1년이 된 거다. 차라리 맘 편히 쉬기로 한 게 아니었기에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여행을 가도 머릿속에는 일 생각뿐이기도 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 기회가 있어서 해본 적은 있는데 하면서 제작사나 감독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하고 싶은 생각도 있긴 한데 배우로서 정점을 찍는 게 우선이다. 더 많은 정서를 표현하는 배우가 되고 나면 그때는 후배들이나 꿈을 가진 사람들이 꿈을 펼치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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