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31_love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자리만큼 긴장되진 않아도 또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이 남자 친구를 나의 여자 친구에게 소개하는 자리다. 이왕이면 내 남자가 썩 괜찮은 남자로 보였으면 좋겠고, 내 친구들에게 매너 있게 행동했으면 좋겠고, 나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주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친구들이 우리의 관계를(정확히는 나를) 부러워하는 쪽에 가까웠으면 좋겠다. 여자들 사이에는 그런 게 있다. 친구의 남자일지라도 여자의 눈으로 찬찬히 뜯어보고 평가한다. 그래서 어색한 첫만남이 끝나고 친구와 내 남자 친구가 조금씩 친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심이 생기는 건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다르다고 하더라. 내가 아는 어떤 남자는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친구의 여자가 있다고 멋있는 척하며 이야기했었다. 친구의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나? 정말 그럴까? 대학 동기 중 한 명과 사귀었던 K는 이별 후 그 그룹과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 그러니까 구애인의 친구이던 남자가 계속해서 연락을 해왔다. 특별히 작업의 뉘앙스를 풍기는 건 아니었지만, 그 남자가 K에게 연락하는 건 모두에게 비밀이었다. 그리고 K는 지금도 그 남자가 그다지 좋은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발랄하고 털털한 게 매력인 한 후배는 자신과 스타일이 정반대인 친구를 남자 친구에게 소개했다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고 했었다. 본인처럼 명랑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던 남자 친구가 여릿여릿하고 조신한 친구의 여성스러움을 칭찬한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가 친구가 내 남자 친구와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있을 때 기분이 꽤 나빴었다. 한 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뚱해 있는 것 말고는 달리 기분을 표현할 길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그가 야구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귀를 닫고 딴청을 피우거나, 그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면박을 줬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 정말 별로다 싶으면서도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내 남자 친구뿐 아니라 내 친구 또한 꽤 매력적인 여자라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유학하다 일년 전 한국에 들어온 Y는 진정 쿨했다. 그녀는 유학 시절 만난 프랑스인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를 동시에 한국에 초대했는데, 그 둘이 한국에서 지낼 집을 셰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셋은 원래 파리에서도 똘똘 뭉쳐 다니며 친하게 지낸 사이라는 것이다.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도 같이 사는 건 다른 문제지.” “너는 그렇게 자신 있니?” “그게 파리지앵 스타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트러블 없이 둘이 한집에서 잘 지냈다면 그들의 쿨함에 감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Y는 여자 친구와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친구가 남자 친구와 같이 밥을 먹고, 같은 화장실을 쓰고, 그의 소소한 생활 습관을 알게 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Y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럴 땐 오래된 진리가 떠오른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게다가 같은 집을 쓰는 친구는, 있기 어렵다. 그리고 연애에서 쿨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나와 연락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내 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건 몰라도, 나 모르는 사이에 둘이 안부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는 건 싫다. 다 함께 술 마시는 자리는 즐겁지만 술기운에 말을 놓고 막역해지는 건 싫다. 내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 나의 친구와 접선했다는 말을 듣고 벌컥 화를 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머리 맞대고 선물 고르고 차라도 한잔 같이 마셨을 걸 생각하면 싫다. 그리하여 너 남자 친구 되게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라,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도 역시나 싫다. 그가 괜찮은 건 내가 제일 잘 알거든? 속 좁고 지질하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들이 계속 존칭을 사용했으면 좋겠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국은 나와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왔으면 한다. 친구는 그가 모르는 나의 장점을 충분히 이야기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고, 그는 본인이 모르는 나의 과거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어떤 싹도 미리 잘라버리는 철벽 방어의 귀재이자 훌륭한 수비수였으면 한다. 아니다. 나 없이 둘이 만나는 건 역시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