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기의 코’로 불리는 세계적인 조향사이니만큼, 조향사가 아닌 당신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어릴 때부터 조향사가 꿈이었나요? 저는 스위스에서 나고 자랐어요. 향수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그라스에서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죠. 향수라는 세계를 처음 접한 시기는 대학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하고 처음으로 직장에 들어간 뒤였어요. 결정적으로 조향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굳힌 건 구찌와 불가리 등 유명 브랜드의 향수를 만든 조향사 알베르토 모릴라스(Alberto Morillas)를 만난 후였죠. 그가 젊은 여성들에게 새로 만든 향수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향을 맡은 여자들이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기쁜 감정을 나누는 광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순간 확신했죠. 조향사야말로 제가 원하던 직업이라는 것을요. 그때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고, 공부했죠.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고요. 그때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지면서요.
에르메스에 들어오기 전에도 많은 향수 히트작을 선보였어요. 에르메스에 오고 나서 전과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이에요. 에르메스는 크리에이티브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죠. 그 덕에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원료의 선택지도 무지 다양해졌어요. 이곳은 따로 시장조사 부서나 소비자 패널 집단을 두지 않아요. ‘마케팅’ 부서 대신 ‘컬렉션 개발’이라는 명칭으로 창작 과정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죠. 다른 브랜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랄까요? 이런 시스템이 크리에이티브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만들고요.
본인의 어떤 부분과 에르메스가 지닌 가치가 부합하는 것 같은가요? 에르메스는 어떤 부분이든 진정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그리고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마르지 않는 열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요. 이 모든 과정이 제 가치관과 꼭 맞는 것 같아요. 저 또한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요. 그래서 에르메스를 더욱 친근하게 여기게 되는 듯해요.
오랜만에 새로운 향수가 나왔죠. 새로 출시한 ‘H24 에르브 비브 오 드 퍼퓸’은 기존 H24와 무엇이 달라졌나요? H24 에르브 비브 오 드 퍼퓸은 마치 자연의 향기를 줌인 해서 들여다본 것 같은 향수예요. 재료가 공명하며 만들어지는 새로운 균형을 통해 아주 강렬하고 신선한 느낌을 선사하죠. 즐거운 산책길의 채소밭에서 만난 자그마한 허브의 풍성한 아로마 향기를 강조하고 싶었어요. 내리던 비가 그치면 세이버리와 소렐, 파슬리 등의 향이 더욱 짙어지는 것처럼요. 저는 단순한 향에서 강렬한 분위기를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해요. H24 에르브 비브 오 드 퍼퓸에는 제가 사랑하는 이 역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에르메스 향수의 보틀은 정형화된 형태가 아니라 향과 컬렉션에 따라 다른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어요. 이번 H24 에르브 비브 오 드 퍼퓸의 보틀은 어떻게 구상했나요? 소나기가 내린 후 식물로 뒤덮인 도시에서 영감을 받은 만큼, 자연이 지닌 초록빛을 새롭게 구현하고 싶었어요. 에르메스의 제품 디자이너인 필립 무케(Philippe Mouquet)가 디자인한 H24 라인의 보틀과도 잘 어울리는 쾌활한 초록색이요! 옅고 오묘한 초록빛이 일렁이며, 마치 물방울처럼 확대경 같은 효과를 주는 것도 무척 재미있어요. 역동적인 느낌을 더하기도 하고요.
H24 라인의 완전히 새로운 향수가 탄생한 과정이 무척 흥미로워요. 완성된 포뮬러를 지속적으로 다듬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작업이에요. 탄탄하고 아름다운 기초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그 위에 차곡차곡 다른 이야기와 참신한 디테일을 더하면 세계가 무한히 확장되죠. 단 한순간도 싫증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여전히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에요.
지난 ‘운 자르뎅 아 시테르’를 포함해, 어떤 공간이 주는 풍경과 기억에 착안한 제품이 많은 것 같아요. 추억의 장소가 주요한 영감의 원천인가요? 꼭 그렇게 국한하긴 어려워요. 제 주변을 이루는 모든 것이 영감의 원천이니까요. 물리적 장소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여정을 따르는 때도 있죠. 그럴 땐 제 감정과 생각, 욕망, 사색 등을 고스란히 향에 녹이곤 하고요. 창작은 정해진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에 형태를 부여하면서 드러나는 충동과 욕망의 결과물인 것 같아요.
향을 만드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향기를 ‘크리스틴화’하는 것이죠. 개성을 드러내는 코드 네임을 비롯해 제 상상력과 창작 과정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은 캐릭터를 향수에 부여하려고 해요. 향수는 스토리텔링이 무척 중요하니까요.
코로나19를 비롯해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다소 어두운 시기를 지나왔죠. 뷰티와 향수 시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이전과 다른 부분을 체감하나요? 세계 곳곳에서 격변이 일어나듯, 향수업계도 활발하게 변화하고 있다고 느껴요. 특히 젊은 세대에서 개성이 뚜렷한 니치 향수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에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아요. 여기에 환경과 사회문제도 전보다 더욱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고요. 천연 원료와 유기농 제품, 공정무역 등에 대한 관심이 전보다 높아진 것도 큰 차이점인 것 같으네요.
특별히 마음이 가는 향료가 있나요? 하나의 향에 국한되지 않으려고 해요. 모든 원료와 향기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고,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거든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향이 흥미롭기 그지없죠. 제 개인적 취향이나 습관이 향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요.
그렇다면 에르메스의 향수 중 가장 애정이 가는 것 하나만 골라주세요. 하하, 아직 밝힐 수가 없네요. 지금 만들고 있거든요. 다음에 출시할 향수가 애착 향수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당신이 정의하는 이상적인 향기는 무엇인가요? 시대를 초월하면서, 변화하는 유행이나 트렌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이상적인 향기라고 생각해요. 명확한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는 언제나 대체 불가하니까요.
향은 마치 열린 결말의 소설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서, 원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조합하게 되니까요. 에르메스의 조향사로서 이곳에서 써나가고 싶은 이야기는 무언가요? 향수에 대한 사랑스러운 표현이네요. 향수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향수는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공존한 채 은근하게 다가오는 존재예요. 우리의 뇌는 단순히 냄새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을 자극하는 상황과 냄새를 연결해 기억해내죠. 참 신비로운 화학반응이에요. 이런 점에서 특정 계절과 시간, 상황,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고요. 향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기쁨과 감동을 오롯이 느끼는 거예요. 그 감동과 기쁨을 안기는 향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향수는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공존한 채 은근하게 다가오는 존재예요. 우리의 뇌는 단순히 냄새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을 자극하는 상황과 냄새를 연결해 기억해내죠. 참 신비로운 화학반응이에요. 이런 점에서 특정 계절과 시간, 상황,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