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년간 비밀리에 바레니아 오 드 퍼퓸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처음으로 향을 공개한 순간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8년의 시간 동안 다른 많은 향수도 함께 작업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늘 바레니아 오 드 퍼퓸의 작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보통 오랜 기간 하나의 프로젝트를 이어가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고, 퍼퓨머에게 특정한 향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래, 이제 이 향을 피에르 알렉시 뒤마에게 보여줘야겠어”하고 다짐했고 바로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꽤 긴장하며 시향을 권했는데 향을 맡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 “와,무척 마음에 듭니다. 이걸로 하죠.”
‘콜리에 드 시엥(Collier de Chien)’ 브레이슬릿의 디테일을 접목한 보틀은 매혹적인 뉘앙스와 지극히 클래식한 분위기 두 가지 미덕을 모두 겸비했다. 마치향과 동시에 탄생한 것처럼 완벽하게 어울린다. 피에르 알렉시 뒤마에게 피드백을 받은 후 바로 제품 디자이너 필립 무케(Philippe Mouquet)에게 연락했다. 원료의 향을 함께 맡아보고 생각을 나눈지 몇 주 만에 그가 이 향수를 위한 디자인을 완성해 나를 찾아왔다. 그는에 르메스 하우스의 아이콘인 콜리에 드 시엥 브레이슬릿을 활용했는데, 손목 둘레에 딱 맞춘 팔찌는 마치 향수가 손목을 완벽하게 감싸는 듯한 인상을 줬다. 필립이 “이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 또한 “이거네”라고 답했다. 강렬하고 명확한 정답을 만난 것 같았다.
수많은 가치와 유산, 패션 코드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거대 하우스의 퍼퓨머로 일한다는 건 단순히 취향과 미감을 내세우는것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을 건 컬렉션을 만드는 것보다 브랜드의 후각적 연결 고리가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 에르메스 안에서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향수병안에 매우 높은 기준, 예외적인 품질, 세심한 디테일, 뛰어난 원재료 등 하우스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에르메스 향수를 구매한다면, 그것이 메종에서 처음 구매하는 물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처음 시작할 때 피에르 알렉시스 뒤마는 내게 어떠한 제약도 없는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그 덕분에 우아하면서도 나만의 노하우가 드러나는 에르메스 향수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까닭인지 에르메스의 향수를 시향할 땐 다른 기준으로 대하게 된다. 독보적이고 창의적인, 강렬한 무언가를 기대한달까? 대담하지 않으면 창의적일 수 없다. 바레니아 오드퍼퓸처럼 시프레 향수를 만드는 것 또한 매우 도전적인 시도였다.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처럼 과일이나 달콤한 캐러멜 향조를 활용하게 될 테니까. 시프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원료로 매우 우아하고 중독적인 구조를 가졌다. 시프레와 사랑에 빠진 여성은 평생 그 향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웃음) 게다가 트렌드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 향이니 에르메스처럼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타임리스 브랜드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퍼퓨머로서 본능을 믿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강인한 여성들에게 늘 영감을 받았다. 나는 시프레 향수가 그런 본능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인터뷰 전, 당신을 기다리며 바레니아 오 드 퍼퓸 캠페인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봤다. 도심과 자연을 넘나들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여성, 고삐를 풀고 힘차게 움직이는 말, 그들 위로 강렬하게 드리우는 햇살. 그런 이미지에 당신의 이야기가 더해지니 이 향수를 사랑할 여성들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에르메스 여성은 매우 본능적이고 감각적이다. 퍼퓨머로서 본능을 믿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강인한 여성들에게 늘 영감을 받았다. 대부분의 여성이 주방에서 일해야 했던 시절에 대담한 여행을 떠났던 여성들부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소니아 들로네(SoniaDelauney), 낸시 커나드(NancyCunard)처럼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술을 추구한 예외적인 여성들 말이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인생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나는 시프레 향수가 그런 본능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퍼퓨머는 섬세한 후각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한정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의 하루 루틴은 어떻게 흘러가나? 아침에 출근하면 나의 후각은 가장 예민한 상태다. 가장 먼저 시향지를 체크하고 피부에 직접 향을 테스트하며 포뮬러를 수정한다. 이 과정을 하루 종일 반복하고 틈틈이 원료 공급업체 담당자와 만나 새로운 합성원료나 천연 원료를 확인한다. 계속 향을 맡는 건 즐겁지만, 저녁때쯤이면 감각이 살짝 둔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갈 때 버릇처럼 향수를 뿌린 시향지를 차에 두고 내린다. 다음 날 출근하기 위해 차를 타면 완벽하게 컨디션을 되찾은 후각이 그 향을 알아차린다. 그 시간부터 또 다른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그렇게 열정을 불태운 후, 다시금 당신을 채워주고 영감을 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훌륭한 셰프와 함께 하는 식사, 해외여행 등에서 영감을 받곤 한다. 얼마 전 베이징에서 산책하던 중 집 안에서 자라는 작은 풀을 보았는데 아주 독특한 냄새를 지녔었다. 또 한 번은 말의 목에서 풍기는 향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런 순간에는 꼭 그 향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진다. 그 외에도 에르메스에서 보는 모든 것이 창조의 기반이 된다. 유서 깊은 역사와 수많은 예술가가 공존하는 이곳은 마치 놀이터에서 노는 듯한 자유를 준다. 물론, 일할 때는 조금 달라지지만.(웃음)
최근 몇 년간 우리에게 향수는 뷰티 그 이상의 무언가로서 우리 삶에 더 가까워졌다. 대중의 향을 즐기는 방식이나 수준도 높아졌고. 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며 이제야 사람들이 후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냄새를 잃고 맡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우울한 일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 기준이 높아졌고, 매우 독창적이며 개성 있는 향을 기대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집 안을 채우는 향은 단순했고 플로럴 향조가 대세였다. 이제는 공간에 특화된 향들이 존재하고 더 정교해졌다. 부드러운 파우더리 향조나 식물의 느낌을 살린 그린 노트 등 더 편안하고 감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과거 비교적 단순한 제품을 만들던 향수 브랜드도 에르메스가 ‘에르메상스(Hermessence)’ 컬렉션을 선보이기 시작한 때처럼 시그니처 역할을 해낼 특별한 컬렉션을 만든다. 이런 흐름을 보면, 에르메스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향수를 전혀 즐기지 못하거나 나만의 향수 취향을 찾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향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삶에서 얼마나 향과 향수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설명하자면, 프랑스 사람들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을 때 “저 사람 못 참겠어”라고 하기보단 “저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없어”라고 한다. 어떤 상황이 불편할 때도 ‘이 상황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좋지않은 냄새가 난다’라고 표현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땐 그 사람이 가진 냄새가 마치 둘만을 위한 특별한 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의 냄새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아마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많은 예를 들었는데 결론은, 후각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본능을 따라야 할 때가 온다. 그냥 이 향이 좋다거나 싫다고 말해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끝으로 오늘의 주인공, 바레니아 오 드 퍼퓸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한 단어로는 너무 부족하다.(웃음) 우아함, 감각적인, 그리고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고유한 시그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