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예능 프로 <나 혼자 산다>에 게스트로 등장한 하석진은 신선했다. 막 혼자 살기 시작한 그는 자신만의 공간을 꾸미기 위해 전동 드릴을 이용해 직접 블라인드를 달고(석회 가루가 떨어지니 수경을 쓰고 작업하는 센스), 알뜰한 소비 생활을 위해 중고 거래 사이트를 수시로 드나들며, 판매자에게 논리적으로 흥정해 중고 공기청정기 값을 깎는다. 하석진은 TV 밖에서도 그냥 그렇게 산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유별나게 굴지도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척척 알아서 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우리와 너무나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듯한 외모와 캐릭터 뒤에 숨겨져 있던 하석진의 인간적인 매력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문과 출신 여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대생의 로직, 비닐봉투는 무조건 모아놓고 보는 생활인의 면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배짱을 갖춘 이 남자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오늘 촬영 어땠나? 누워서 쉬고, 맥주도 주고,(웃음) 편했다. <나 혼자 산다>를 보니 맥주를 물처럼 마시더라. 아침에 일어나서 시리얼과 맥주를 마시는 건 좀 심했다. 그날 아침에는 숙취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침 맥주가 좋은 게 숙취를 덜어준다. 술이 깨기 시작하면서 속이 쓰리고 갈증과 두통이 느껴지며 너무 고통스럽지 않나. 맥주가 그 과정을 부드럽게 해준다. 모르겠다, 권할 수는 없지만 내 경우에는 통한다.
오늘은 특정 작품 때문에 만난 게 아니라서 편하게 그냥 사는 얘기를 할 수 있겠다. 난 원래 작품이 끝난 직후가 아니면 인터뷰에서 작품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홍보 목적의 인터뷰는 일이라는 생각에 흥이 잘 안 난다.
혼자 지내보니까 어떤가? 이제 1년 4개월 정도 됐고, 지금은 아주 좋다. 전혀 외롭지 않고, 그 자체가 외로운 거라고 해도 혼자서 이겨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할 일이 있다. 운동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요즘은 요리에 빠져 있다.
요리에 좀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요 며칠은 크림 파스타를 만들었다. 처음 독립하면 누구나 한번쯤 시도하는 메뉴다.(웃음) 나는 처음에는 부대찌개, 카레, 볶음밥 같은 걸 만들었다. 근데 크림 파스타에 비하면 그게 훨씬 더 어려운 거였다. 내가 만든 파스타가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
무릎 위에 세탁한 옷을 올려놓고 개는 모습은 마치 주부 같았다. 가족이랑 같이 살 때도 세탁은 내가 했다. 왜냐하면 군대에 있을 때 빨래에 대해 좀 연구를 했거든. 그래서 제대한 후에도 엄마가 세탁기를 돌리는 게 못 미더운 거다. 내가 세탁하면 옷감이 훨씬 더 오래 보존된다.
공유할 만한 생활의 지혜가 있나? 큰 봉투는 무조건 모아놓는 게 좋다.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기니까. 특히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싸주는 비닐은 끝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지 않나. 그 부분만 테이프로 돌돌 말아서 분리수거할 때 사용하면 그게 용량이 꽤 커서 유용하다.
<나 혼자 산다>를 본 여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물건을 사는 귀여운 보통 남자, 데프콘의 말대로 ‘미개봉 신품’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그게 왜 그럴까? 방송 당시 촬영 때문에 해외에 있어서 몰랐는데, 검색어 순위에 내 이름이 계속 있었다고 하더라. 사실 나는 걱정을 했다. 실제로 술이 안 깬 상태에서 촬영을 하고, 술이 취해가면서 촬영이 끝났거든. 술이 문제가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계획을 세워 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엉성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게 뭐가 좋다고.(웃음)
직거래로 물건을 사는 연예인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성격이 급해서 그렇다. 배송받을 때까지 이틀을 못 기다려서. 열 번 넘게 직거래를 했는데 상대가 알아보지는 못하더라. 어머니가 절약에 좀 민감한 분이다. 안 쓸 때는 전자제품의 코드를 다 빼놓으신다.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을 들었는데 코드가 뽑혀져 있어서 TV가 켜지지 않으면 정말….(웃음) 그 피로감과 다시 꽂으러 가는 시간, 부팅되는 전력 등이 더 아깝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에게 자주 뭐라고 했더니 이제는 전력 차단이 가능한 제품을 구입하셨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을 것 같다.(웃음) 아, 별로 안 닮았다. 절약하려면 사회생활에서나 친구들 만날 때도 계속 스스로에게 자극을 줘야 하는데 그건 잘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버림받을 것 같다.(웃음) 데이트할 때 내가 밥 샀으니 네가 커피 사, 하면 집에 가면서 뿌듯하긴 할 거다. 왜냐하면 난 전기도 아끼고, 비닐봉투도 아끼는데, 여자를 만나 커피 값까지 안 냈으니까.(웃음) 하지만 거기까지는 안 될 것 같다.
인간적인 매력이 많아서 그게 드러났을 때 더 호감을 느끼게 되는 사람인 것 같다. 사실은 맥주를 좋아하는 캐주얼한 남자인데, 배우로서는 바에서 위스키 마시는 캐릭터를 주로 했다는 인상이 있다. 그 사이에서 괴리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도 있고, 5년 후에도 할 수 있는 역할을 지금 한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고, 실제로 그 역할을 이해하고 표현하기엔 아직 내가 어린 부분도 있었다. 나는 실제 내 나이보다 어리게 생각하고 어리게 사는데, 인생 경험이 나보다 앞선 사람의 삶을 표현하려니 답답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뭔가 달라질 것 같다. 사람들이 당신의 헐렁한 모습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으니까. 다음 날 아무 계획도 없는 자유의 밤, 뭘 하나? 자주 보는 몇몇 프로그램이 있다. <라디오스타> <나 혼자 산다> <마녀사냥><썰전> 같은 프로그램을 몰아서 본다.
주위에는 남자 친구만 많은가? 맞다. 여자친구는 별로 없다. 사실 남녀 관계는, 특히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겉으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일면에는 상대를 이성으로 보는 관점이나 기류가 분명히 남아 있다고 본다.
고질적으로 연애에서 문제가 되는, 구 여친들이 지적해온 나쁜 면이 있나?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혼자서 화요일 오후 6시 정도에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여자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나 자신과 약속해놓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나의 일상이나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연애도 끊어버린 것 같다. 끊으려고 해도 못 끊는 감정이 언젠가는 오겠지. 하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나? 연기는 조금 다른 문제고, 일상에서는 내가 짜놓은 구도에서 벗어나는 게 싫은 것이다. 연기자라는 직업은 일정한 입지에 올라서지 않는 이상 1년 후를 기약하기가 쉽지 않은 직업이다. 여유 있게 계획을 세울 뿐, 정확하게 잡지는 못한다. 그 대신 일주일 단위는 완벽하게 짜려고 노력한다. 그것에 대한 믿음과 당위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하석진이 가진 욕심은 뭔가? 그냥 살면서 계속 뭔가를 배우고 싶은 욕심이 있다. 다른 나라의 언어나 요리처럼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늘리고 싶다. 계속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블로그나 책을 보면서 동기부여를 받는다. 배움에 중독된 사람들이 좋아 보인다.
진짜 일 이야기를 잘 안 한다. 보통은 기자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연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김새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발성 수업을 듣고 있다. 물론 연기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좋은 발성과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는 게 한 남자의 인생에서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소속사가 나 덕분에 돈을 더 잘 벌게 될 수 있는 종류의 노력은 잘 하지 않고 있다.(웃음) 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현재 하석진의 싱글 라이프는 즐거워 보인다. 앞으로도 그럴까? 외로움을 느끼는 날이 언젠가, 조만간 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하고 할 일이 없고, 누굴 찾을 수도 없는 시간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겁나지는 않는다. 그 순간을 넘어서면서 분명히 한 인간으로서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어렴풋이 해본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미리 예상하면 데미지가 덜한 것 같다. 나는 부끄러운 실수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계속 리플레이해서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질때까지 생각한다. 너무 창피한 기억들, 밤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사건들, 술 먹고 한 실수부터 인간관계에서의 문제, 불만족스러운 연기 등도 계속 생각하고 나면 뭔가 나아져 있더라. 모두 내 개인적인 바운더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없는 편이고, 반대로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 걸 잘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한테 가장 집중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맞다. 나쁜 사람이다. 가끔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