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트, 니트 톱, 슬리퍼, 브로치 모두 구찌(Gucci).
로이 킴은 고양이보단 강아지과에 가까운 사람이다. 먼저 다가와 안부를 묻고 짧은 질문에 긴 답을 조잘조잘 뱉어내고 그 좋은 목소리로 농담도 서슴지 않는 덕에 그가 있는 현장은 늘 유쾌하다. 이런 사람이 “이번에는 음반 활동을 안 하잖아요?” 하고 지나가는 말로 물었을 때 “제가 하기 싫다고 했어요” 라고 대답하면 조금 더 몸을 그 쪽으로 내밀어 긴 얘길 듣고 싶어진다. 신변과 안부를 묻는 겉도는 대화 끝에야 로이 킴은 요즘 자신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일들에 대해 툭 털어놨다. 곡을 쓰지 않은 지 꽤 됐고 그 덕분에 맘이 좀 편해졌다고. 티는 많이 안 냈지만 그간 속으로 혼자 껴안고 있던 것들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 보였다. 못 본 새 핼쑥해진 얼굴과 어딘가 지친 기색이 그제야 아귀가 맞았다. “요즘엔 누가 물어보면 잘 지낸다고 말해요. 잘 지내는 것 같고.”
로이 킴은 자신이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안다. “이런 옷 싫어할걸요? 물론 전 좋지만요.” 기대와 똑같은 것만큼 시시한 게 또 있을까. 아직 사람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 매력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 것이다. 비록 그 모습이 누군가의 취향엔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로이 킴은 그런 것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 만큼 유연한 사람이니까.

셔츠 비욘드클로젯(Beyond Closet), 팬츠 앤더슨 벨(Andersson Bell), 목걸이 구찌(Gucci), 선글라스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스니커즈 골든구스 디럭스(Golden Goose Deluxe), 베레모와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사람들이 ‘방학 가수’라고도 하던데요. 이번에 특히 더 그래요. 3개월밖에 활동할 시간이 없으니까 바쁘게 달리고 있죠.
<뉴요커> 매거진 인터뷰는 어땠어요? 진짜 신기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학원에서 읽으라고 시켰던 매거진이거든요. 회사와 소통이 느려서 직접 연락해서 만났는데 그게 <뉴요커> 스타일인진 모르겠지만 사진 촬영도 안 하고 커피 마시고 같이 짧은 공연 보고 점심 먹고 끝이었어요. 제 이야기는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휙 기사를 썼더군요. (한국에서는 가수고 미국에선 평범한 학생인) 제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요. 좀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읽는 잡지니까 더 좋았죠.(웃음)
여행 좋아한다고요. 좀 다녔어요? 뉴욕은 뭐 맨날 갔고요. 좀 멀리 간 건, 봄방학 때 페루에 다녀왔어요. 서울에서 벗어나면 맘이 편해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서울에 도착하면 괜히 스트레스가 쌓여요. 미국에서 내가 신경쓸 건 공부니까 그것만 신경 쓰면 되잖아요. 점수가 안 나와도 알아서 털어버리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고 신경 쓸 것도 무지 많아요. 들어오자마자 스케줄표 받으니까 바로 스트레스. 좀 더 여유를 가지려고 하는데 미국에 있을 때와 달리 여기선 왔다 갔다 해요. 혼자 짜증 내는 모습에 뜨끔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곤 하죠.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김상우가 1백 명 있는 거예요.
목걸이는 페루에서 산 거예요? 할머니가 준 거예요. 할머니가 초등학교 교사였었는데 거북이나 상아 같은 오리엔탈 소품을 좋아하세요. 제 사주를봤는데 상아가 잘 맞는다고 해서 할머니가 주신 상아 목걸이를 항상 하고 다녀요.
사주 종종 봐요? 고독하다는 얘기는 기본적으로 항상 나와요. 혼자 고민을 풀 수 없을 것 같을 때 종종 보는데 큰 영향을 받진 않아요. 결국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든요.

스카잔 점퍼, 티셔츠, 팬츠, 슬리퍼 모두 구찌(Gucci), 선글라스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스타일이 많이 변했어요. 머리도 짧아지고.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맨날 5:5로 가르마 타고 다니고 댄디한 스타일, 흔히 말해 ‘훈남 룩’을 자주 입었는데 전 싫었거든요. 원래 그런 스타일도 아니고. 이번엔 음반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하는 마음으로 바꿨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에 대해 좀 답답함을 느끼나봐요. 제가 지향하는 스타일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살면서 이루어온 일들의 리스트만 보고 ‘FM적’이라는 이미지가 된 거지, 전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성격이나 생활방식도 전혀 다르고. 친한 형이 스트리트 패션과 힙합 쪽의 마스터예요. 그 형 영향을 많이 받았죠. 항상 어쿠스틱한 음악만 들었는데 어느 순간 차에서 힙합을 듣고 있더라고요.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새로운 뮤지션 찾아 그의 음악 듣는 게 버릇이 됐고 쇼핑도 스트리트 패션 쪽에서 쿨한 브랜드에 눈이 가요. 조금은 바뀐 것 같아요.
좋지 않아요? 다른 세계의 지평이 열리면 원래 내 세계와 만나면서 다르게 발현되곤 하잖아요. 너무 좋아요. 그 세계를 알아가는 것도 재밌고.
그중에서 꽂힌 거 있어요?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챈스 더 래퍼’라는 뮤지션을 찾았어요. 힙합과 가스펠을 섞는데 너무 멋있어요. 옷은 한동안 슈프림에 빠져 있었고요. 스트리트 패션의 입문 브랜드잖아요. 미국에 있으니까 더 편하더라고요. 매일 신제품이 공개되는 목요일 정시에 앱으로 바로 살 수 있었어요. 뉴욕 가면 숍도 있고요. 아직도 빠져 있어요. 그런 걸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죠. 좀 더 정리하고 얘기해야 될 것 같지만 그런 느낌의 브랜드. 팔려는 게 아니라 제가 만들어서 입고 싶어졌어요.
오리지널리티가 분명한 브랜드? 네. 슈프림이 대단히 질이 좋은 건 아닌데 그 질 자체도 아이덴티티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런 쿨한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옷에 관심이 많아졌나봐요. 원래 많았어요. 고등학생 때 아르바이트해서 옷만 샀어요. 졸업 후에 바로 가수 활동을 해서 한동안 옷에 신경 쓰기 싫을 정도로 바쁘다가 학생 신분이 되니까 다시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점프수트 프라다(Prada), 로브 오디너리피플(Ordinary People), 선글라스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가죽 앵클부츠 알렉산드르 플로코브(Alexandre Plokhov), 스카프와 베레모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대학원은 여전히 갈 계획이에요? 가야죠. 인생의 어느 지점엔 가겠다는 거지 졸업하자마자 바로 서둘러 준비해서 가고 싶진 않아요. 참, 사회학과로 전과했어요. 원래는 경영학교에 있었는데 거기선 사회학을 전공할 수 없거든요. 문과대학으로 넘어가려면 지원해야 하는데 허가됐다는 매일을 엊그제 받았어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와 나> 촬영으로 바빴다면서요. 한국에 오자마자 일주일 동안 라오스에 다녀왔어요. 부모님과 같이 시간 보낼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엄마랑은 통화도 자주 하고 늦게 들어가더라도 얼굴 보고 대화할 일이 많거든요. 아빠랑은 그러지 않아서 이 방송이 좋은 계기가 됐어요. 막상 가는 게 힘들지, 가서는 어려운 거 하나도 없더라고요. 다녀와서 친구들한테 얘기했어요. “아빠랑 여행 가는 상상만 해도 어색해 죽을 것 같지만 막상 가니 그렇게 좋을 수 없더라. 다 필요 없고 아빠 쉬는 날 맞춰서 가라”고요. 잊지 못할 추억이 생기는 거잖아요. 늦둥이라 아빠가 친구들 아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셔서 아빠는 그저 아빠로만 보였거든요. 일주일 같이 지내면서 아빠한테 아기 같은 면도 있고 제 또래 남자 같은 면도 있다는걸 깨달았죠.
24시간 카메라가 붙어 있는 게 불편하진 않았나봐요. 전혀요. 제작진이 최소한만 같이 있고 별다른 요구도 안 해요. 분량이 걱정될 정도였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기에 진짜 하고 싶은 대로 했죠. 여행 경비가 1인당 하루에 10만원이었는데 라오스에서 10만~15만원이면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 있어요. 유럽 같은 데로 갔으면 좀 빠듯했을 텐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제일 좋은 호텔에 묵고 모든 게 좋았어요.

셔츠, 팬츠 모두 발렌티노 바이 무이(Valentino by MUE), 슬리퍼 타임 옴므(Time Homme).
앨범 내기 전에 취향이나 기호가 반영된 방송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일단 앨범 활동은 안 하는 거잖아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3년 동안 정규 앨범 세 개를 냈는데 너무 달린 것 같더라고요. 전 끊임없이 노래를 발표하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팬들도 그게 더 좋겠죠? 그러다 보니 큰 방향을 생각할 시간이 적었던 것 같아서 이쯤엔 쉬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덕분에 심적으로 여유도 생겼고요. 선배님들은 계속 곡을 써야 한다고 얘기해요. 20대 초·중반에 쓰는 곡이 제일 좋은 게 많다고요. 근데 그건 그 나이되면 스스로 느껴보려고 지금은 그냥 살고 있어요. 요즘엔 누가 잘 지내냐고 하면 잘 지낸다고 해요. 예전엔 “바빠서 힘들어” 그랬거든요. 여유를 갖다 보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지만 가수도 힘든 게 많은 직업이잖아요. 전엔 힘든 점만 생각했는데 요즘엔 좋은 점만 보려고 해요. 사생활을 대부분 포기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납득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거든요. ‘내가 이런 것까지 버려가면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모든 연예인이 다 그럴 거예요. 그런 부분을 납득하려니 다른 직업보다 이 직업이 뭐가 좋은지 생각해봐야 했어요. 물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배부른 소리라고 쉽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들은 자기 사생활이 있으니까, 잃으면 어떤 기분인지 모르니까. 좋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하니 여유가 생겼어요. 없어진 건 없어진 대로 놔두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요.
찾아보니 뭐가 좋던가요?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부분이 있죠. 물론 일은 비정규직이고 잠깐 사이에 (은행 잔고가)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뒤집힐 수도 있지만 현재는요.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 것으로 돈을 번다는 게 참 행복한 거죠.
가수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나를 표현하는 일을 했을까요? 이 일을 안 했다면 분명히 증권가에서 일하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그것도 하늘의 별따기지만. 근데 그건 감정을 표출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항상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겠죠. 가수라는 직업은 내 창작물에 타인이 공감을 해주잖아요.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아요.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일이 없는 날이 곧 주말인 점도 좋고요. 한때 존경하던 사람,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나랑 친구라는 것도 신기하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잃어야 하는 것들이 크게 느껴지니까 힘들었나봐요. 이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럴 거예요. 되돌릴 수 없는 거라면 맘 편히 생각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곧 나오는 앨범은 왠지 이전과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흠,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제대로 시작한 게 없어서. 해보고 싶은 건 있어요. 흔히 저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게 달달한 거거든요. 근데 제 앨범 들어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 알아요. 오히려 쓸쓸하고 우울하다고 하죠. 그래서 작정하고 여심 저격하는 노래 해보고 싶어요. 리얼 사운드가 아닌 건반으로 전자음 음악도 해보고 싶고요. 지금까진 계속 진짜 연주만 했거든요. 잘 섞어서 해보고 싶은데 제가 쓰는 곡들이랑 전자 사운드가 어울리기가 어려워요. 그 사이를 잘 찾아봐야죠. 색다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