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상

블랙 코트, 그레이 반소매 티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윤계상이 연기한 몇몇의 인물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처럼 일견 평범한 듯하지만 진정한 자신은 꾹 누른 채 살아가는 위태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소수의견>에서 약자를 위해 국가를 상대하는 가난한 변호사가 그렇고 드라마 <라스트>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흔들리는 남자가 그렇다. 또 윤계상은 <굿와이프>에서 완벽해 보이지만 외로운 감성이 묻어나던 ‘서중원’을, 최근작 <죽여주는 여자>에서 장애를 가진 이웃 청년 ‘도훈’을 연기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과 닮은 배경 속 인물을 주로 맡아온 그가 올해는 유난히 어둡고 잔혹한 세계로 들어간다.

강윤성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범죄도시>의 크랭크인을 목전에 둔 윤계상은 극악무도한 조직 폭력배 두목을 연기한다. 배우의 길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잔혹한 악역을 맡은 그는 요즘 온 힘을 다해 자신을 가다듬고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다. 가수로 활동한 기간보다 두 배가 훌쩍 넘는 배우의 삶 동안 오로지 연기에 대한 생각만으로 스스로를 이끌어온 그가 무자비한 악인으로 변신해 또 한번 승부수를 던진다.

 

윤계상

블랙 재킷, 팬츠, 셔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최근 몇 년간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 와중에 god 활동까지 놓치지 않았다. 작품을 할 때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큰 에너지 소모는 없었던 것 같다. 정말 재미있으니까 힘들지 않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편인가? 사실 20대 무렵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끼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데 배우가 되고 나이가 들어가니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연기를 시작하고 한 작품씩 쌓아가면서 무언가를 느끼게 됐다. .

그 무언가는 뭘까?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일이다. 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또 예민하기도 하고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건 전혀 못 보는 타입이다. 연기라는 일 자체가 이런 내 성향과 꼭 맞는 것 같다. 어느 캐릭터를 맡으면 한동안 새로운 사람으로 사는 데에만 몰입해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god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한다고. 너무 좋다. god로 무대에 오를 때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사실 배우로는 13년 차지만 god로 활동한 기간은 5년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로 사는 게 더 익숙하다. 그래서 무대에 오를 때마다 엄청 긴장한다.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도 일단 무대에 서면 더없이 행복하다. 눈앞에서 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고. 몸져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5명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무대를 완성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예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른가? 어릴 적 데뷔할 당시에는 솔직히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다. 아, 내가 기적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가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와 배우로 작품을 해냈을 때 드는 성취감은 확연히 다를 것 같다. 맞다. 가수는 수많은 사람이 모인 무대에서 그간 준비해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일이고, 연기는 완전히 다르다. 집중하고 가다듬고, 몇 달 동안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 작품이 완성된다.

 

윤계상

니트 스웨터 에디션 M.R 바이 비이커(Editions M.R by Beaker), 와이드 팬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슈즈 코스(COS).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 윤여정이 ‘윤계상은 고집이 센 배우다. 이것저것 참 많이 하는데, 쉬운 길로는 가지 않는다’라고 한 걸 봤다.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해왔는지 궁금하다. 영화계에 처음 들어 왔을 때, 그러니까 <발레교습소>를 찍을 때의 초심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당시 현장에서 스태프들이나 배우들,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이 작품 한 편을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열렬히 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모두들 ‘이 영화로 돈을 벌고 싶다’가 아닌 ‘이 영화가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간의 촬영이 끝나니 이전에 추구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소신이 생겼다. 무언가 남는 영화, 의미 있는 영화를 해야겠구나 하고. 나는 몇 십 년이 지나도 그 작품을 찍을 때 내가 무슨 생각과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가 선명히 드러나는 영화를 선택하고 싶다.

그렇다면 크게 한 방 터지는 영화를 만나고 싶은 기대는 없나?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않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를 하고, 무조건 망할 것 같았는데 뜻밖의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열심히, 꾸준히 하면 되는 것 같다. 사실 한 5년 전쯤엔 흥행이 안 되면 억울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근사한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결국 내 잘못인가 싶기도 했다. 수없이 자책하고 고민하다가 많은 걸 내려놓았다. 연기라는 일을 평생 할 거라 생각하니까 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시행착오와 실패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오히려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이렇게 꾸준히 작품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드라마 <굿와이프>의 ‘서중원’부터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옆집 청년 ‘도훈’까지 맡아온 역할이 무척 다양하다. 똑같은 역할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은 이상한 욕망 같은 게 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 순간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두는 것에 영감을 받는 편이다. 살면서 누구든 그때그때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지 않나. 그래서 내가 연기한 인물들은 인간 윤계상이 당시에 빠져 있는 감정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그런 작품을 일부러 찾는 건 아니고, 그냥 시나리오에 몰입해 자연스럽게 선택한다. 돌이켜보면 각 작품마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겪고 있는 시간, 배경이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모두 자신이 어떤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잘 모르는 남자,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내면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인물들이다.

 

강윤성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범죄도시>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이번엔 어떤 인물을 연기하나? 배우로서 가장 도전해보고 싶었던 색깔의 역할이다. 사실 흥행성, 연기력, 스타성을 모두 갖춘 배우들에게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들어오는데, 나는 그 1퍼센트 안에 속한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폭넓은 시나리오를 받아보지는 못한다. 서중원처럼 젠틀한 역할, 그저 순하게 사랑하는 남자, 혹은 흔들리는 청춘을 대변하는 인물 정도다. 보통은 그런 역할의 제안이 반복적으로 들어오는데, 이번 영화는 다르다. <범죄도시>에서는 엄청난 악역을 맡았다. 사람도 쉽게 죽이고, 돈이면 뭐든지 하는 잔혹한 역할이다. 지금까지 연기해온 캐릭터들과 완전히 달라서 욕심이 났다.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제대로 해내고 싶다. 배우로서 또 한번 승부를 걸어볼 기회라 생각한다.

꾸준한 작품 활동과 동시에 god로, 전혀 다른 사업가로 지낼 때도 있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영역이 또 있을까? 글쎄. 작품에 들어갈 땐 오로지 연기만 생각한다. 일상에 별다른 게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뭐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로운 것을 꿈꾸기도 하지만 아직 그게 뭔지 정확히 찾지 못했다. 우선은 영화에 온 힘을 다할 생각이다.

별다른 게 없는 일상은 어떤 모습인가? 그냥 똑같다. 늘 만나던 사람들 만나고, 먹고 자고. 거의 집에 머문다. 집에서 <무한도전> 본다.

왠지 10년, 20년이 지나도 윤계상은 지금 이대로의 모습일 것 같다. 인생은 모르는 거니 뭐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연기를 계속하고 있으리라는 건 분명하다. 단지 미래의 나는 조금 더 여유롭게 여행도 떠나고 취미도 즐기는 사람이 되어 있길 바란다.

 

윤계상

셔츠와 체크 팬츠 모두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윤계상

스트라이프 셔츠 유니클로(Uniqlo), 블랙 팬츠 비이커(Be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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