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효주 하면 특유의 청순하고 해사한 분위기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탁월한 ‘예쁨’을 걷어내고 필모그래피만 본다면 한효주는 꽃이기보다 전사에 가까운 배우다. 10여 년간 11편의 영화와 7편의 드라마에 몸담으며 타고난 지구력과 집중력을 발휘해온 이. 좀처럼 공백을 찾을 수 없는 그녀의 이력서는 자신이 ‘운명 같은 작품을 기다리는 꽃’이 아님을 증명한다. 최근 2~3년의 행보는 그녀가 배우로서 새로운 막에 진입했음을, 다른 차원의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데 그 시작이 영화 <감시자들>이다. 이 영화에서 한효주는 남자 배우들의 에너지에 밀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견인하는 ‘하윤주’로 분하며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뷰티 인사이드>를 현실 세계에 단단히 묶어놓은 것 역시 깊은 눈빛과 정확한 톤의 목소리로 극의 무게를 더한 한효주의 공이 크다. 그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시킨 <해어화>와 배우로서 대중성과 흥행력을 다시금 입증한 드라마 까지. 사극, 멜로, 범죄 액션을 넘나들며 배우로서, 또 한 명의 직업인으로 한효주는 누구보다 치열한 20대를 보냈다.
함께 나눈 이야기에서 정리해보면, 20대의 한효주는 그 시절 하고 싶은 작품을 계산 없이 해왔을 뿐이다. 많은 작품 중 흑역사 하나쯤 있겠거니 싶어 건넨 질문에는 ‘후회 없음’으로 일축했다. 일말의 후회가 없다는 건 주변의 오지랖이나 강요에 휘말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인생을 선택하고 설계해온 ‘자기 삶의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이다. 우리는 인터뷰를 위해 사진가의 작은 방에 마주 앉았다. 한효주는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자신의 시선이 닿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질문과 대답 사이에 예의 그 차분한 눈빛을 꽃에 두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니 이어지는 문답은 연주 기호로 치면 ‘트란퀼로(tranquillo)’로 읽어야 한다. 담담하고 단단한 그녀의 말투와 리듬에 맞춰 한 음 한 음 침착하고 신중하게.
1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짐을 줄이며 단순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어떻게 지냈나요?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은 잘 지키고 있어요? 나름의 선에서는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큰마음 먹고 정리를 단행했어요. 이후부터는 집 안에 새 물건이 들어오는 것에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갖게 됐고요.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거든요. 큰 집에 살다 보면 수납공간이 넉넉하기도 하고 또 넓은 공간을 채우려고 물건을 끊임없이 들이게 돼요. 그런 와중에 바쁘게 살다 보니 많은 물건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10여 년이 지나가버린 거죠. 어느 순간 ‘이렇게 살면 안 되겠 다’라고 생각했고, 일단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보통 집 크기를 넓혀가는게 일반적인 이사인데 반대였네요. 작은 집에 살면서 무엇이든 내 손으로 정리하고 통제하고 싶다는 갈망이 컸어요. 내 집 구석에 짐이 하나씩 쌓여가는데 정작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물건이 많았어요. ‘내 집에 왜 내가 모르는 물건들이 이렇게나 많지?’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낯선 물건들이 찜찜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내 집 안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적어도 주인인 나는 알아야겠다는 깨달음과 창틀 먼지 하나를 닦더라도 내 손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거죠.
묵은 짐 정리는 마음 정리와도 연결 되던가요? 집 청소를 하면 심신이 정리되 는 느낌을 받아요. 적어도 제게는 도움이 됐지만 모두에게 추천하기는 어렵고요. 반드시 단순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유행처럼 따를 만한 일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자신에게 맞는 생활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는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생활인의 영역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누군가가 해주는 것을 받는데 익숙해 지기 쉽죠? 돌아보면 20대에는 일 외적인 것들, 즉 생활을 꾸려나가는 면에 지금처럼 분명한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나에게 담아보고 싶은 것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내 색깔과 다른 것도 가져보고 입어보고 먹어봤죠.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점에 변화가 생겼어요. 사는 방식이 더 분명해졌고요. 일이 워낙 힘들기도 하니까 일하지 않는 시간, 생활 면에서는 그 주체가 온전히 나였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고요.
연차가 늘고 공력이 생기면서 자신만의 고집이나 신념이 형성되는 건 반 운 일이죠. 고집스러운 성격은 아니에요. 약간은 타협도 잘하고(웃음),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걸 스스로 더 불편해하는 편이라 부드럽게 넘어가는 일들이 많았어요. 살면서 고집을 부려본 적도 별로 없어요. 한데 자신만의 고집이나 신념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의견을 명확히 표현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30대에는 약간 고집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 해요. 일과 생활 모든 면에서요. 그렇다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제가 싫어하는 일이에요.
돌아보면 20대에 정말 많은 작품을 했어요. 매년 한 작품은 반드시 했고, 역할마다 모두 다른 결을 지닌 캐릭터였어요. 커리어만 보면 20대 를 딱 20대처럼 보낸 것 같아요.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었고 일 욕심이 많아서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하려고 했고요. 호기심이 강한 편이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즐겼어요. 해본 것보다 는 안 해본 것에 끌리고요. 조금 위험한 성격이죠?(웃음) 늘 새로운 도전을 해왔다고 자부해요. 이제는 그런 생각에도 조금씩 변화가 오고 있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더욱 잘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생 캐릭터를 해보겠다거나 특정 상을 받아야겠다는 종류의 욕심은 아니네요? 배우 에이미 애덤스를 요즘 굉장히 좋아하게 됐어요. 그녀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에이미 애덤스는 작품마다 얼굴이 달라서 관객은 그녀가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요. 캐릭터로 존재할 때 그녀는 늘 다른 사람 같거든요. 영화를 다 보고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야 ‘아, 이 사람이 그 사람이야?’, ‘또 그 사람이 이 사람이었어?’ 하는 느낌을 주잖아요. 이것저것 다 담을 수 있는 얼굴인데 인터뷰나 시상식 등 작품 밖에서는 또 얼마나 예뻐요. 장르 스펙트럼도 대단히 넓죠. 스릴러, 멜로, 코미디 심지어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판 주인공까지 했으니 말 다 했죠. 장르와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어떤 역할에든 녹아들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건 칸에서 상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성취라고 봐요. 당장 ‘이 작품이 대박이 나야 해’ 하는 마음보다는 좋은 작품 속 하나의 요소로 쓰이고 싶어요. 그게 진짜 꿈이에요.
에이미 애덤스라 할지라도 한국 영화에서라면 다양한 장르의 여성 캐릭터를 맡기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일전에 영화 <감시자들>에 참여한 계기로 ‘상황을 주도하거나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극 중 하윤주는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캐릭터’라고 말한 적이 있죠? 한국 영화 안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극을 이끌고 가는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여성 영화를 하겠다고 나서기가 조심스러운 이유가 어렵게 투자받고 기획된 작품이 좋은 평을 받지 못하거나 적절한 스코어를 내지 못 했을 경우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섣부르게 나섰다가 다른 누군가의 기회마저 잃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중하게 접근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해어화>가 아픈 손가락 중 하나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고요.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면서 참여한 작품이었거든요. 당시 이 영화가 잘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거든요. 그런 면에서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좀 힘 들었어요.
<해어화> 같은 작품을 다시 만난다면 또 도전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서슴없이 ‘도전!’을 외치기가 어렵고 무서워요. 도전의 결과와 책임을 온전히 나 혼자 짊어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을까요? 어느 때보다 젠더 문제에 대중적인 공감이 필요한 시기잖아요. 영화 <인턴> 정도의 무게를 지닌 작품이 나와도 좋을 것 같아요. 대중적인 코드로 조금씩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기획을 하면서 확장해나가면 어떨까 해요. 그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필모그래피를 되돌아봤을 때 어떤 점이 자랑스럽거나 아쉽나요? 지금까지 한 작품 모두를 좋아해요. 어떤 작품 하나를 아쉽게 생각하거나 빼고 싶지 않아요.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작품조차도요. 한 작품이라도 빼면 지금의 저는 없는 것이니까요. 다 칭찬해주고 싶죠.
누구에게나 이불킥 할 만한 흑역사가 있기 마련인데.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모습도 물론 있죠. 한데 그때가 없었으면 한효주라는 사람의 퍼즐이 완성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매사에 자신만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좀 있달까요. 저는 가끔 제가 불쌍해요.(웃음) 그래서 칭찬해줘야 할 것 같고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니까요.
오늘 이야기 나누는 모습에서는 중심이 잘 잡혀 있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물론 그 반대의 모습도 있는 거죠? 흔들리는 것에 불안을 느껴요. 앞으로 똑바로 걸어 나가야 하는데 비틀비틀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불안해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배우는 길게 쉴 때가 있잖아요. 작품이 없을 때는 그냥 백수죠.(웃음) 그럴 땐 오랜만에 쉬면서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을 텐데 저는 꼭 일을 만들어요. 가령 월, 수, 금요일은 운동하고 화, 목요일은 영어를 배운 뒤 수업 끝나면 피부과를 가거나 요가를 하는 식으로 혼자 스케줄을 짜지 않으면 불안해요. 그냥 하루를 보내면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급해지는 것 같아요. 때로는 마냥 늘어지고 싶은데 성격이 이렇다 보니 잘 안 돼요.
4년 전 <광해, 왕이 된 남자> 당시 인터뷰에서 ‘지금 자아가 마구 형성되고 있는 시기이고, 이때가 지나면 더 행복해질 거다’라고 했어요. 지금 얼마나 행복해졌나요? 왔다 갔다 해요.(웃음) 행복은 계속 찾고 있는 중이에요. 일상이 주는 소소한 행복이 분명 있어요. 오늘만 해도 화보 촬영하면서 행복했거든요. 꽃다발도 선물받았고, 컷마다 함께한 스태프들이 좋아해주고, 예쁜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 기분 좋았어요. 이런 작은 행복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내려놓은 것도 많죠. 꼭 행복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실은 별로예요.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좀 우울하죠?(웃음) 행복은 조금 사치인 것 같고, 만약 행복에 수치로 표현 가능한 최고점이 있다면 1~2퍼센트라도 행복의 방향으로 뻗어 갈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해요.
영화 <골든 슬럼버> 촬영이 진행 중이죠? 전 비교적 작은 역할이고, 강동원 선배가 열심히 촬영하고 있어요.(웃음)
‘황금빛 낮잠’이라는 뜻의 비틀스 노래와 동명의 작품이죠. 음악 마니아로도 알려져 있는데 지금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오아시스의 ‘Whatever’요. 문득 그래요.
왜 이 노래가 듣고 싶어졌어요? 주변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 는 의미인가요? 배우를 계속하는 한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고 봐요. 하지만 전보다는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주변의 평가나 말들에 휘둘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에요.
음, 30대에는 더 자유로워질 거예요. 앞으로의 30대가 기대되나요? 기대되면서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해요. 30대로 1년을 살아보니 이제는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올해도 벌써 4월이라니요.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휙 가버릴 수 있죠? 그래서 정말 아깝다니까요. 왓에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