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남을 처음 봤을 때, 예상과 사뭇 다른 결의 이야기를 쏟아내서 앞으로 좀 더 다가가서 앉았다. 싫어하는 것, 그때의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에릭 남은 무엇보다 음악을 좀 더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에게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음악들과 비슷한, 팝의 색채가 강하게 가미된 미니 앨범을 냈고 곧 전 세계를 돌며 투어 공연을 펼쳤다. 상황은 작년보다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데도 1년 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많은 물음표에 둘러싸여 있다. 퍼포머로 남아 있지는 않겠다는 오기,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포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애정. 그가 품은 발전적인 고민들은 결국 에릭 남이 가고 싶은 길로 그를 데려다줄 것이다. 에릭 남이 10월 말 싱글 앨범으로 발표하는 ‘Miss You’는 수록 곡으로 두기엔 아까워서 따로 내게 된 그의 자작곡이다. 그 곡을 들어보면 에릭 남이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조금은 알 수 있다.
1년 전에 만났다. 그때와 지금,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 많이 내려놓았다. 그게 더 편하다. 스트레스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다 받는 것 같고, 지금 겪 는 일이 그 사람한테는 늘 제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 편하게 생각하려고 하는 게 강해졌다.
미니 앨범도 내고 해외 투어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캐나다 밴쿠버와 토론토, 미국의 12개 도시, 멕시코와 자카르타, 홍콩 등에 다녀왔다. 지금도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 정신없이 지내서 좋았다. 공연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이렇게 긴 투어가 재밌기도 했고 ‘가수가 하는 일이 이런 거구나’라고 처음 느꼈다. 한국에서 공연을 마지막으로 한 게 2015년이었다. 3년 반 전이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내 공연에 와서 노래를 같이 해주는 게 가수의 일인 것 같다.
작년 인터뷰 때는 음악 활동에 대한 갈증이 있어 보였다. 좀 풀린 것 같나? 풀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인터뷰한 뒤 연말까지 아무것도 안 했다. 다 내려놓고 쉬어야 다른 걸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심리 상태로 쭉 가면 나는 물론 보는 사람들에게도 안 좋을 것 같아서 회복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올 4월 미니 앨범을 내고 투어를 갔다 오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더 많이 해야 하는데 몸이 하나니까.(웃음) 일에 많이 관여하는 편이라서 시간이 빨리 가버렸다.
4월에 낸 미니 앨범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좋아하는 장르가 많아서 곡을 어떻게 추리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미니 앨범은 어떻게 구성했나? 제일 하고 싶은 음악들을 조금씩 맛보기로 보여준 것 같다. 오랜만에 내는 앨범이다 보니 욕심이 나서 들려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다 담을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던 노래 위주로 선곡했다. 멕시코에서 영상을 찍는 등 이미지나 외적인 것들도 전과 다른 색깔을 시도했다.
작사와 작곡을 겸한다. 영어로 작사할 때와 한국어로 작사할 때가 많이 다를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영어로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아예 내용을 바꾸는데, 이게 제일 어려운 작업이다. 저번 타이틀 곡 ‘솔직히’도 영어 가사에서 한국어로 바꾸는 데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작사가 가장 어렵다.
새 싱글 앨범의 곡인 ‘Miss You’도 직접 작사했나? 그렇다. 원래 이 노래가 미니 앨범의 수록 곡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반응이 좋고 나도 좋아하는 곡이라 수록 곡으로 두기 아까웠다. 그래서 가을에 따로 포장해서 내는 거다.
오늘 에릭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촬영을 했다. 들어보니 ‘Miss You’ 도 미니 앨범의 곡들도 모두 에릭의 취향으로 채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미니 앨범으로 내려 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일단 싱글 앨범으로 내기로 했는데 문제는 써놓은 곡이 점점 유행이 지난 느낌이 든다는 거다. 나머지 곡들은 어떡하지? 겨울에도 발라드로 싱글 앨범이 나올 예정인데 그것도 써놓은 지 1년이 넘었다. 다행히 그 노래는 한국 정통 발라드 느낌이라 유행이 지날까 걱정되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 갖고 가는 나의 색깔은 ‘팝’인데 갑자기 한국 색깔의 곡을 내는 게 맞는지도 고민이다. ‘Miss You’와 그 곡을 내고 미니 앨범을 냈을 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예 다 새로 써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웃음)
곡을 쓸 때 어떻게 작업하나? 거의 다 해외에서 작업한다. 미국에 가면 프로듀서, 멜로디를 함께 쓰는 분들이 있는데 적으면 3명, 많으면 5명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곡이 나온다. ‘Miss You’도 최근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했더니 그걸로 곡을 써보자고 해서 작업한 곡이다. 주로 내 일상 속 일 들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않나? 나의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서 직접 작업물을 만드는 거니까. 그렇다. 겨울에 발표할 발라드는 영어로 작사해놨는데 한국어로 도저히 가사를 쓸 수가 없어 그룹 ‘데이식스’의 친구에게 도움을 받았다. 내 아이디어를 듣고 한국어로 잘 해석해줬다.
뮤지션 친구가 많고 그들에게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더 받았으면 좋겠다.(웃음) 조금 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작업했으면 하는데 너무 바쁘다 보니 가끔은 친구들이 섭섭함을 토로한다. 최근 오래된 친구에게서 ‘우리는 널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데 너는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바쁘게 지내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음악을 같이 하는 친구들도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모르겠다, 노력하는데 쉽지는 않다.
어떻게 대답했나? 무슨 말인지 알겠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 것 같아서 서운했으면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보다 소홀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서운해하는 건 이해하는데 그건 내 성격인 것 같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고 사람들 만나는 것.
그런 기운이 되레 좋아 보인다. 작년에는 사람들에게 많이 지친 느낌이었다. 맞다. 그래서 많이 쉬었고 8월부터 11월까지 아무것도 안 했다. 누군가는 그 시간이 아깝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너무 필요했고 중요한 시기였다. 충전을 잘한 것 같다. 새로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있다고 들었다. 하나는 외국에서 할머니들을 모시고 와 그분들이 직접 만든 각 나라의 음식으로 식당을 운영하는 거다. 거기서 내 역할은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자’라고 하더라.(웃음) 또 하나는 배우들과 남미에 가서 멸종 위기의 동물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프로그램이다.
재미있을 것 같다. 근데 너무 멀다. 여행 가는 걸 좋아하지만 최근 여행 예능인 <오지의 마법사>를 비롯해 야외 촬영을 많이 했는데 너무 리얼하니까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갔다 오면 좋은 추억이 남는다. 이번에는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서 찍는 것이라 새로울 것 같아 재밌게 해보려 한다. 잠시 쉬다가 다시 예능 활동을 하니까 상황 파악을 계속 하고 있다.
매번 새롭나? 그렇다. 대중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고, 인기나 유행이 몇 개월마다 빠르게 변하니까 ‘나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떤 역할이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영어를 쓰는 일도 좋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지겹지 않을까? 식상해진 거 아닐까? 불안할 때도 있고, 한편으론 사람들이 나를 봐주는 대로 편하게 가는 것도 좋을 듯싶고. 4월에 앨범 낼 때도 다른 색깔과 이미지를 시도해보려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잘 맞는 변화고 좋았지만 주변에서 가사가 에릭 남에게는 기대하지 않는 내용이라 매칭이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내가 쓴 가사들은 솔직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인데 ‘에릭 남은 러블리하고 로맨틱해서 발라드를 불러야 하는데 왜 이런 내용을 썼지?’라는 시선이 있다 보니 ‘나는 그런 음악밖에는 할 수 없나?’ 싶었다. 그 안에서 내 중심이나 색깔을 잡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앨범을 들어보면 에릭이 원하는 음악이 뭔지 생각보다 뚜렷하게 보인다. TV에서 비춰지는 이미지가 그의 작업물에도 그대로 투영된다면 누구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다. 에릭 남이 음악에서조차 로맨틱한 사랑 고백만 한다면…. 나도 그런 생각이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서 나는 좋은데 이번 ‘miss you’도 가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지만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스스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 가사가 좋다. 그런데 대중들은 대놓고 분명하게 ‘좋아! 싫어!’ 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맞나? 답은 없는데 나와 가장 맞는 선택을 하는 게 어렵다.
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면 조금씩 그쪽으로 길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많은 고민 속에서 한 결정이겠지만 그게 결과물에서 보인다. 정말 큰 위로가 된다. 내가 고집하는 것을 회사와 많은 논의를 거친 결과로 내는 노래들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R&B 같은 거 해, 그게 제일 잘 먹히니까’라고 하지만 나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노래를 하고 싶다. 힙합이나 R&B는 몇 년 전부터 붐이 시작됐다. 방송에서 많이 밀고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계속 시도하다 보니 요즘 인기 많은 노래들이 나오게 된 건데, 팝 쪽으로는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더라. 어떻게 보면 위험 부담이 크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나는 기회라고 본다.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 한국엔 없는데 내가 독보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을 계속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그건 에릭 남만 할 수 있는 음악이 되지 않을까? 조금 더 고집이 생긴다. 그래서 겨울에 발표할 발라드가 고민이 되는 거다. 이게 지금까지 내가 가져온 색깔과 어울리나?
그래도 전체적인 균형이 잡혀간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하고 싶은데 못 한다는 고민을 했고, 지금은 하고 있는데 어떤 걸 해야 할지를 고민하니 발전하고 있는 거 아닐까? 이전 인터뷰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뭐냐고 물었는데, 오늘은 반대로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묻고 싶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만들어 내는 게 재밌다.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콘텐츠나 사업 아이디어. 이런저런 토론하는 것도 좋아한다. 타블로 형과 BTS의 슈가와 음악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슈가가 며칠 전에 같이 ‘북 클럽’ 같은 걸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한국어로 책 읽기가 어려운데.(웃음) 생각해보면 하는 일이 많아서 좋아하는 것도 많다.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공연 투어를 하는 동안 매일 ‘행복하다, 좋다’고 생각했다. 도시마다 공연장이 꽉 차 있었다. 백인, 흑인, 라티노들이 내 노래를 다 알고 따라 부르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남은 올해 한국 활동 계획은 어떤가? 예능 프로로 많이 찾아뵐 것 같고 그 사이에 곡 작업도 열심히 하지 않을까? 아, 얼마 전에 방송된 프로그램을 보고 팬들에게 메시지가 많이 왔다. 왜 나갔느냐고,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고. 내가 그랬나? 체해서 뱃멀미가 심했던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웃음) 예능 프로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사람들이 실망한다는 걸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계속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올해는 음악으로도 방송으로도 한 번 더 나를 재정비하는 시기가 될 것 같다. 쉽진 않지만 재밌다. 재밌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