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화보 촬영은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매거진 관련 업계의 지인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마다 기분이 참 좋아요. 함께한 시간이 쌓인 만큼, 최근 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응원해주셔서 더 즐겁게 일할 수 있어요.
‘새벽’ 역으로 출연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어요. 이 정도로 화제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직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싶었어요. 한 달쯤 지난 지금에야 현재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느껴야 할 감정은 ‘감사’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요.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사이가 각별해 보여요. 맞아요.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낸 상황을 함께 맞은 배우들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 관계가 더 단단해지고 있어요. 단체 채팅방도 한창 촬영 중일 때처럼 활발하고요.
<오징어 게임> 대본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강렬했어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굉장히 복잡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어요. 게임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물 간 관계와 작품 속에 형성된 사회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있다고 느꼈거든요. 새벽을 비롯한 캐릭터들이 실제 작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도 궁금했고요. 촬영할 때도 놀라움의 연속이었어요.
황동혁 감독이 호연 씨를 보며 새벽을 떠올린 이유 중 하나가 눈빛이라고 들었어요. 호연 씨가 특히 좋아하는 새벽의 눈빛은 어떤 눈빛인가요? 새벽이 한 사람의 자살을 목격하면서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 장면이 있어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자신의 목표에 대한 의문 등이 한데 어우러진 감정이죠. 그때 새벽이 보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어요.
새벽은 북한에 남겨진 어머니와 한국의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남동생이 있는 새터민이죠. 새벽과 본인의 공통점으로 ‘외로움’을 자주 꼽았어요. 한국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 새벽이 느끼는 감정이 모델 활동에 열중하던 당시의 제 감정과 비슷해요. 그래서 보다 쉽게 새벽을 이해할 수 있었죠.
새벽에게 가장 깊이 공감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오징어 게임> 후반부에 새벽이 혼자 화장실에 서 있는 장면이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난처한 상황에 빠진 새벽이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돼요. 그 장면에 대한 부담이 컸는데, 촬영하고 나니까 새벽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처럼 연기하는 시간이 지나간 이후 새벽과 저 사이에 놓인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 장면들이 있어요. 새벽과 ‘지영’(이유미)이 구슬치기를 하는 장면도 그중 하나고요.
구슬치기를 하는 장면의 비하인드 영상이 넷플릭스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되었죠. 두 배우가 연기한 감정의 여운이 촬영 이후에도 길게 남아 있더라고요. 촬영이 끝난 뒤 제가 유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는 걸 비하인드 영상을 보고 알았어요. 유미랑 정말 깊이 교감했어요.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있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촬영이 시작됐을 땐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죠. 유미가 의젓하게 잘 견뎌줘서 완성할 수 있었던 장면이에요. 저 또한 새벽의 감정을 잘 연기해낼 수 있을까, 촬영이 반복되다 보면 그 감정이 변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계속 싸워야 했죠.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현장에서 불안감을 이겨내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 배우와 모델의 교집합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했어요. 어렵고 힘들지만, 해내고 나면 매력 있는 일이라는 점도요.
새벽이라는 인물이 호연 씨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타적인 마음. 가장의 짐을 짊어진 새벽의 삶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흘러가잖아요. 앞만 보고 질주해온 저로선 깊이 고민해보지 못한 마음이었어요. 또 새벽을 만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새로운 현장을 경험했고,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과정을 겪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제 시야가 한층 넓어진 듯해요.
새벽을 연기하며 북한 사투리를 배우고 구사하는 과정은 어땠어요? 사투리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많이 썼어요. 북한도 지역에 따라 말투가 조금씩 다른데, 새벽은 함경북도의 사투리를 써요. 남한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 애쓰지만, 동생을 비롯한 일부 북한 사람들을 만나면 북한말과 남한말이 뒤섞인 말투로 말하죠.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사투리부터 액션까지 소화해야 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연기자로선 축복받은 기회지만, 신인인 만큼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오징어 게임>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하나요? 맞아요.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닌데, 마치 엄청난 행성의 충돌이 일어난 듯한 커다란 복이 제게 찾아온 것 같아요. <오징어 게임>이 공개되기 몇 주 전, 제가 뉴욕에서 생활하던 당시에 마치 어머니처럼 저를 챙겨주던 절친한 언니를 만났어요.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삶의 힘듦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언니가 제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호연아, 너도 나도 잘될 거야. 이 말을 계속 하면서 우주에 기운을 보내야 해.” 식사를 마친 뒤, 하늘을 향해 ‘잘될 거다’라고 소리친 기억이 있어요. 그 이후 신기하게도 <오징어 게임>이 크게 흥행했죠. 우리가 보낸 기운이 다시 돌아온 것 같더라고요.
살면서 오징어 게임 못지않게 큰 도전을 한 경험이 있나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도 놀이 기구 탑승에 도전할 정도로 모험심이 강한 편이에요. 2014년 여름에 친구들이랑 괌에 놀러 갔을 때 제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스카이다이빙을 했어요. 우리 앞에 있던 사람들이 문밖으로 사라질 때마다 두려웠지만, 결국엔 해냈어요. 낙하산이 펼쳐진 후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공중에 떠 있을 때 기분이 참 좋았죠. 함께 뛰어내린 전문가가 저에게 낙하산을 직접 조종할 수 있는 손잡이를 주셨는데, 제가 너무 거칠게 움직였더니 다시 빼앗아 가시더라고요.(웃음) 저 자신이 광활한 하늘에 존재하는 하나의 점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만약 오징어 게임이 실제로 열린다면 참가하고 싶어요? 지금은 참가하지 않겠습니다.(웃음) 기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현재에 집중할 거예요. 전 항상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몇 년 후에 돌이켜봤을 때 좋지 않은 선택으로 여길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 해요. 언젠가 ‘일남’(오영수)만큼 긴 세월을 보내고 ‘이 정도면 됐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지 않을까요? 공기놀이나 땅따먹기가 게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 성공적인 시작을 알린 호연 씨에게 앞으로 가장 필요한 건 뭘까요? 꾸준함이요. 제 삶은 계속 변화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꾸준히 정호연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라요.
바쁘게 활동 중인 지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어요? <오징어 게임>을 향한 큰 사랑 덕분에 요즘 국내외로 부지런히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일단 잠을 푹 자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떡볶이 먹을 거예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