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소리도 없이>가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에서도 연기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시상식마다 감독과 배우가 나란히 호명되는 것은 배우로서 인상적이고 기쁜 일일 것 같다. 영화 <소리도 없이>가 개봉한 지 1년이 가까워지는 지금 무엇이 새롭게 보이고 느껴지는가? 지금보다 20kg이 더 나가던 육중한 몸의 감각들이 수치 이상의 큰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몸의 움직임뿐 아니라 내적인 에너지와 흐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홍의정 감독은 현장에서도 관찰하는 재미와 놀라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특유의 통찰력과 유연함이 도드라지는, 전에 본 적 없는 스타일을 지닌 이였다. 전통적 위계를 답습하는 영화 현장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현장을 장악했다. 마초성이 현장에 추진력을 불어넣던 과거와 완전히 다른. 그런 면들이 놀랍다. 사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다. 나는 <소리도 없이>라는 영화를 내용뿐 아니라 영화의 형식과 존재 방식까지 총체적 아이러니의 전위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참여자로서 해석이나 감상을 드러내는 것이 작품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 유아인이 지난 한 해를 의미 있게 보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수상과 수치는 배우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외부의 평가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얼마큼 거리를 둬야 할지도 고민하나? 외부에서 가능한 모든 평가는 최초에 타인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안에서 생성된다. 나는 평가의 대상이 되는 그 인물의 내부에 있는 동시에 외부에 존재한다. 배우는 외부의 비평과 만나기 전에 본인 스스로 비평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안팎의 압력과 해석, 평가 사이에서 인물을 가공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 나의 일이다. 외부의 평가와 이를 대하는 내 태도에 대한 고민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다. 이 상태가 상당히 분열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이 책에 홍의정 감독의 인터뷰도 실린다. 유아인 배우가 컷마다 다른 연기를 해 그걸 보는 즐거움이 컸다고 하더라. 본인 역시 한 인터뷰에서 ‘비교적’ 행복한 현장이었다고 하던데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현장은 어떤 모습인가? 최근 배우 간의 앙상블을 고려해 선택한 작품이 많다. 다른 배우들과 주고받는 과정에서 새 에너지를 얻길 바라며 현장에 임하는 중이다. 몸에 밴 외골수 같은 기질이 있어 여전히 겉도는 인간이긴 하지만 동료들과 둘러앉아 사사로운 농담을 나누면서도 좋은 에너지를 얻고 있다. 재미있다.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 신인으로서 대선배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 안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사람들과 편히 어울리는 걸 어려워했다. 눈치를 보기도 했고, 또 방법도 몰랐다. 그때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은 나를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거였다. 섞이지 않는 것. 위계 밖으로 나를 내보내고 한 발은 작품에 담근 채 다른 발은 밖에 두고 살았다. 외로움과 쓸쓸함 같은 감정이 들었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배우는 좀 힘들어야 하나? 불행해야 하나? 이런 착각으로 스스로 위무하기도 했고. 근데 요즘은 그런 것조차 다 오버다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니까 이렇게 재미있고 즐겁잖아?’ 하는 중이다.
최근 토론토 국제영화제 프라임타임 부문에 초청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공개될 예정이다.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종교인이건 아니건 지옥과 천국, 선과 악, 죄와 속죄, 자유와 억압의 개념은 보통 사람의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지 않은가. 지옥을 제목으로 전면에 내세운 작품에 호기심이 있었고, 작품 내부에서 펼쳐지는 초자연적 현상을 종교적 컨셉트로 프레이밍 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정진수’라는 교주(혹은 의장)가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상호라는 아주 흥미로운 인간과 함께 하는 작업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기대했던 연상호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진지하고 심각한, 어쩌면 충격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이토록 유쾌할 수 있나 싶었다. 모니터를 확인하는 감독이 대중성을 크게 의식하는 것을 느꼈는데, 그게 어떤 상업적 야욕으로 읽히지 않고 보편적 관객에 대한 예우로 보였다. 대규모 자본을 집행하는 작업 과정에서 유머를 잃지 않고 자신의 의도와 작품의 메시지를 견고히 다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큰 사랑을 받은 원작, 검증된 이야기라는 점은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데 믿음 혹은 두려움을 주는 요소로 작용할까? 믿음도 두려움도 없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수렴하고 과제를 이행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은 원작이 아닌 각본이고, 내가 상대하는 건 원작의 팬이 아니라 시리즈의 관객이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상화하는 작업에 꽤 많이 참여했는데, 이런 태도로 작품에 접근했을 때 원작의 팬들까지 만족시킬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 같기는 하다.
신흥 종교 새진리회의 수장 정진수 의장을 연기하던 당시 배우를 오래 붙잡아둔 생각이나 질문이 있다면 무엇인가? 절대적 고독과 외로움.
그 절대적 고독과 외로움을 어떻게 가늠해보려 했는가? 학문적 영역에서 설명하기는 어렵고 이미지 트레이닝, 상상에 기대는 일을 선행한다. 그리고 역지사지! 인물의 마음을 내 안에 이식하는 거다. 내 안의 가장 깊은 절망 같은 것이 뾰족하게 상기되는 순간 인물과 내가 ‘퓨전’ 된다.
영화 <소리도 없이>는 사회 윤리와 범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데 혼동을 주는 이야기고, <지옥>은 서로가 서로에게 참회를 요구하고 심판하면서 지옥의 풍경이 펼쳐진다. 두 이야기가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준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는 것 같은가? 좋은 이야기의 교집합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야기마다 접할 당시 처한 시간과 환경, 조건이 예민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한데 최근 내가 경험한 좋은 이야기는 쓸데없는 악이 없었다. 저렇게까지 악해야 하나 싶은 서사가 많은 세상이지 않나. 그런 인위적인 것 없이 이야기를 맛있게 풀어가는 게 좋은 이야기가 아닐까. 적어도 요즘엔 그렇다.
배우 유아인이 생각하는 지옥의 풍경은 어떤가? 그곳에는 무엇이 있거나 없을까? 온갖 미디어와 텍스트가 묘사한 지옥에 대한 오조오억 개의 무수한 파편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다. 진짜 지옥이 있다면 그건 인간의 두려움이 빚어낸 불구덩이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시공 같은 것을 상상해본 적은 있다. 연상호의 <지옥>은 텍스트로는 전달력이 높은 동시에 현생의 지옥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전생이나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닌 현실에 펼쳐지는 지옥이 우리가 배웠거나 주입당한 지옥의 속성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산 채로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지옥>에 이어 영화 <승부> <하이파이브> 등 진행 중인 작품들이 있다. 스스로를 ‘많이 소비된 배우’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소비의 빈도보다는 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명작을 가져가 대충 한 번 읽고 냄비 받침으로 쓸지라도 그건 소비자의 몫이다. 나는 최대치의 소비를 목표로, 전제로 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상업 배우이고, 관객의 모든 해석과 소비 방식을 존중한다. 다만 무능한 작업자들에 의해 현장에서 겉핥기 식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한 편이다. 심지어 그런 작업조차도 내 성장 욕구를 키우기도 한다.
연기를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가까워진다. 무엇이 계속 배우로 살 수 있게 했을까? 왕도가 없다는 것. 그 점이 끊임없이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이 일은 사람을 불타오르게 하고 또 무기력하게 만드는데, 그 반복이 생명 유지 장치가 되는 듯하다.
어떤 순간 불타오르고 또 무기력해지는가? 이를테면 오케이 사인이 날지라도 스스로는 오케이 할 수 없는 연기의 흠결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열패감에 빠져드는 때가 있다. 그 미완 상태의 반복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지만 땅굴만 팔 수는 없으니 갖은 재료를 다시 모아야겠지. 그것들을 태워 뭐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내 표현의 어떤 미완이나 불완전성이 나를 괴롭히고 거기에 대한 저항이 내 안의 불씨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염려하고 경계하는 모습이 있다면 무엇인가? 염려와 경계를 멀리하는 배우의 모습을 염려하고 경계했는데 거기에 몰두하다 보니 염려와 경계 그 자체를 경계하게 된다. 나는 요즘 좀 나를 풀어버리고 싶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 뭐가 됐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나.
영화라는 매체 안에 머무는 동안 즐거울 때는 언제인가? 최근 몇 년 사이 영화의 실질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멋있는 것, 멋있어 보이는 것, 나에게 향하는 이 조명을 최대한 멋있게 반사하는 데 몰두하던 욕망들은 무너지고 이제는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진짜를 찾아 헤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꽤 기분이 좋을 때는 홍의정 같은 사람을 세상에 소개할 수 있을 때다. 내 힘을 쓸 수 있다는 데 즐거움을 느낀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세상에 소개하고, 그의 성공에 이바지하는 것이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데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와 어떤 현실을 마주한 후부터는 내가 힘을 갖고 사용하는 데 가치를 둘 게 아니라 스스로 그 힘을 귀하게 여기고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깥으로 힘을 쓰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내가 나를 먼저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처럼 촬영하며 스태프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는 날도 있지만, 때때로 모든 게 징그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시간을 지나 두 발로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길 바란다.
오늘 영상 인터뷰 도중 ‘나의 영화로운 순간’을 묻는 질문에 답하는 데 유독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영화롭다는 말은 너무 거해.(웃음) 너무 종교적이야. 영화배우라서 말장난처럼 질문한 것 같은데 영화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로운 순간의 그 ‘영화’도 어렵지만 내가 하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도 너무 어렵다. 영화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궈낸 성취가 꽤 영화롭게 다가온 순간들도 있었지만 어떤 때에는 다 가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로운 순간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 아직 자신이 없는 것 같다. 보다 적극적으로 내가 나라는 사람을 갈무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해석으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나와 그 가운데 나인 것, 내가 아닌 것 사이를 오가는 방황을 멈추려고 한다.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로운 순간을 만들고자 한다면.
연기한 수많은 인물 중 유독 그리운 사람이 있나? ‘종대’(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완득이’(영화 <완득이>), ‘선재’(드라마 <밀회>)
모두에게 훌륭하다고 박수 받고도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스스로 미진했다고, 실패했다고 느끼는 날들도 있나? 언제나 미진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래도 퇴근길이 가장 행복하다.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다.(웃음)
미진하다는 생각을 떨치고 다시 현장으로 가는 힘은 어디서 오나? 모닝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