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길 잘했어 여섯 개의 밤 강진아

베스트 코스(Cos) 이어커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늘 손발이 땀에 절어 있는 ‘춘희’는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로 하루에 3만원씩 벌며 다한증 수술비를 모은다. 혼자에 익숙한 고요한 삶에 어느 날 1998년의 어린 춘희가 등장해 말을 걸기 시작하고,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 그는 서서히 외로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씩씩하게 봄을 맞이한다. 강진아는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에서 어제를 버티고 오늘을 살아낸 춘희를 연기했다. 영화가 외롭고 지친 이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응원은 오늘의 강진아에게도 닿아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지난달 <태어나길 잘했어>가 개봉했고,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최창환 감독과 작업한 <여섯 개의 밤>이 상영되었어요. 본인이 참여한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대중을 만나게 되었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최진영 감독님과 저에게는 <태어나길 잘했어> 감독과의 대화(GV) 일정이 이 영화의 마지막 축제같이 느껴졌어요. 지금이 아니면 관객들을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기회가 닿는 대로 GV 행사에 최대한 많이 참석하려고 해요. <여섯 개의 밤>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가 처음으로 관객을 만난 자리이자 제가 완성된 영화를 스크린으로 처음 본 자리이기도 해요. 영화에서 변중희 선생님과 모녀로 나오는데, 우리 모습이 영화에 어떻게 담겼는지 확인할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어요.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에서 주인공 춘희를 연기했죠. 최진영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춘희는 원래 훨씬 우울하고 답답한 캐릭터였다고 하더라고요. 강진아 배우가 독립영화 특유의 우울한 캐릭터의 틀을 깨보자고 제안했다면서요.  시나리오 초고에서 춘희는 굉장히 수동적이었거든요. 죽어 있다고 느껴졌고 살려주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독립영화 신에서 활동하는 동안 제게 주어진 역할은 대부분 이렇게 어둡고 사는 게 힘겨운, 이 시대 청년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이었어요. 물론 건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필요도 있죠. 하지만 때로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촘촘히 들여다보고 고민해서 인물을 좀 더 살아 있게 만들어보는 거죠. 영화 한 편에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깃들잖아요. 그러니 쉬운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춘희는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이에요. 초고에서는 춘희가 진짜 “네”밖에 안 했기 때문에.(웃음) 스스로 선택하는 것들이 있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녀의 욕구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면면을 꺼내어 들여다보면서요.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한 사람 같아요. 소각장에서 불을 만지려 하는 어린 춘희에게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따뜻하게 안아주잖아요. 영화 곳곳에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려 하는 춘희의 단단한 마음이 느껴졌어요. 환경에 발목 잡혀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춘희를 그렇게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비관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거든요. 어떻게든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이길 바라요. 많은 사람이 피해자다운 것으로 규정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밝아선 안 되고, 웅크려 있어야 하고. 저는 춘희가 부모님의 극단적 선택 가운데서 살아남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이와 동시에 춘희가 ‘피해자다운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작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되게 행복한 감정이거든요. 계속 거기 머물러 있고 싶은 거니까. 근데 저는 머물기보다 다음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태어나길 잘했어 여섯 개의 밤 강진아

블레이저 나누슈카(Nanushka), 슬리브리스 자라(Zara), 데님 팬츠 아르켓(Arket), 로퍼 닥터마틴(Dr.martens), 자물쇠 모양의 네크리스 멀버리(Mulberry), 레이어드한 실버 네크리스 포아크(Foarc).

태어나길 잘했어 여섯 개의 밤 강진아

블레이저 나누슈카(Nanushka), 슬리브리스 자라(Zara), 링과 네크리스 모두 포아크(Foarc)

촬영 현장에서 생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이 영화를 생각하면 촬영 현장 곳곳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이 떠올라요.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함께 전주에 머물면서 촬영했거든요. 스태프들과 복작대며 춘희가 어떤 것 같은지 묻느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지금은 아주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촬영 초반에는 아마 저 때문에 힘든 부분이 많았을 거예요.

그만큼 춘희를 만드는 데 마음을 온통 쏟았다는 거겠죠. 맞아요. 영화를 계속 만들다 보면 ‘이렇게 하면 돼’ 하고 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런 태도로 임하고 싶진 않았어요.

영화는 지난한 시간을 버티고,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덜 미워하자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남겼다고 생각하나요?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을 부인하고 낮게 보려던 자세를 떨쳐낼 수 있게 됐다고 말해주신 관객이 있어요. 스스로에게 ‘태어나길 잘했어’라고 말해주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만, 저 역시 이 영화를 통해 확실히 나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다행히 제가 아직 삶을 사랑하고 있더라고요. 영화가 제게 남긴 것을 서서히 확인해가는 중이에요.

지금까지 작품에서 사건의 피해자 혹은 상처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인물을 많이 만났어요. 춘희에게도 아픈 서사가 있고요. 촬영이 끝나면 연기한 인물에게서 금방 빠져나오는 편인가요? 저는 바로 빠져나와요.(웃음) 촬영이 끝나면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느라 바쁘거든요. 여운은 남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려 하죠. 오히려 촬영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 인물을 다시 만나 묘한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지금처럼 관객을 만날 때요. 관객의 피드백을 기반으로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거든요.

확실히 연기를 일로 대하는 편인가 봐요. 맞아요. 처음엔 마냥 좋아서 시작했지만 이제 연기는 확실히 제 일이에요. 사실 작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되게 행복한 감정이거든요. 계속 거기 머물러 있고 싶은 거니까. 근데 저는 머물기보다 다음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관계를 맺은 사람들 사이에는 반드시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이 사랑에 어떻게 기름칠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잘 굴러가도록 만들지에 대해 자주,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

 

 

태어나길 잘했어 여섯 개의 밤 강진아

니트 산드로(Sandro).

연기는 결국 선택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일단 현장에 가면 참 행복하거든요. 숨통이 트여요. 포장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다고 느껴요. 연기하는 것도 즐겁지만, 사람과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어서 그런가 봐요. ‘내가 언제 후회 없이 연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보면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어요. 상을 받아야 후회가 없을까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거든요. 김선영 선배님이 한 인터뷰에서 “배우에게는 성공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해요. 성공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너무 좋고. 아직은 포기할 이유를 못 찾았어요.

하지만 현장에서 늘 내 마음대로 되진 않잖아요. 제가 최근에 드라마 <괴이>에 단역으로 참여했어요. 군수의 비서진 중 한 명이라 마을 주민들과 붙는 신이 있었거든요. 주민들이 저랑 눈을 마주치면서 막 항의하는데, 그걸 받아치면서 같이 호흡하는 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눈에 띄는 역할이 아닌데도 모든 단역 배우들이 엄청나게 열연하세요. 단편영화나 독립영화 현장은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배우들을 많이 못 쓰잖아요.(웃음) 그런데 여러 배우들이랑 같이 연기하니까 너무 재밌더라고요. 모든 현장이 좋을 순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한테 훨씬 더 다양한 현장이 기다리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기대돼요.

연기라는 일을 뺀 자연인 강진아의 삶에 요즘 가장 크게 자리 잡은 화두는 무엇인가요? 최근에 아주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났어요. 춘희와 많이 닮은 사람이라 촬영하는 내내 자주 떠올렸거든요. 인생에 나중이란 없고 지금 당장 내 곁을 살펴야 한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깨닫게 됐어요. 관계를 맺은 사람들 사이에는 반드시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이 사랑에 어떻게 기름칠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잘 굴러가도록 만들지에 대해 자주,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

어느덧 6월을 바라보고 있어요. 다가오는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싶나요? 지금 출연을 논의 중인 작품이 있고, 예정된 다른 작업 일정도 있어요. 그래서 여름이 코앞이지만 마치 봄을 앞둔 것처럼 설레요. 우리나라의 여름이 점점 더 더워지고 있잖아요. 요즘엔 대구보다 서울이 더 덥대요. 그래도 최대한 밖으로 나가보려고요. 에어컨 바람은 어디서든 쐴 수 있으니까. 지금뿐인 올여름을 만나러 일단 나가는 거! 그게 목표예요.